어두운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에는 넓은 탁자위에 셀 수 없을 정도의 파일 묶음과 더불어 서류가 놓여 있었다. 스탠드 등불 아래에서 탁자 위에 있는 서류를 만지작거리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컴퍼니의 사장인 치킨 박이었다.
“훗... 2라운드에서 25팀이 탈락이라... 재밌군.”
대형 스크린에서 보이던 모습과 달리 치킨 박은 닭 머리 모양의 탈을 벗은 상태로 2라운드 게임 결과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었다. 섹스 게임에 참여한 모든 참여자들은 치킨 박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탈을 벗은 그의 얼굴은 생각 외로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2라운드 역시 전원이 3라운드 진출이 가능했고, 대부분은 서로 사전 조율을 통해서 승부를 조작하려 했으나... 결국 탈락한 쪽은 배신당하는 쪽이었으니... 후후. 사람들이란 결국 거기서 거기일 뿐이구나... 후후.”
게임을 진행하는 치킨 박은 참여자들이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을 하는지 모두 지켜보았다. 직원들이 캠코더로 영상을 실시간으로 찍고 있었기에 무슨 대화를 나누든지, 치킨 박은 모두 알 수 있었다.
2라운드에서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3라운드 동반 진출을 하기 위해 자신들의 경쟁자와 합의를 통해 승부조작을 하려고 했다. 치킨 박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전혀 그 부분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았다. 굳이 간섭을 하지 않아도 경쟁자들의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신을 하는 것, 그건 아주 당연하지. 1승에 칩 1개가 늘어나는데... 당장 눈앞에 1-2천 만 원이 왔다 갔다 하는데... 포기할 사람은 없지... 후후. 지금 세상은 고작 푼돈만 쥐어줘도 사람을 죽여주는 세상인데...”
게임 종류와 방식 그리고 규칙만 정해놓고 참여자들에게 알리면, 나머지는 그 참여자들이 서로 배신을 하고 암투를 하며, 성적으로 유린을 하기도 했다. 치킨 박은 이것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판만 깔아주면 서로를 증오하고 미워하며 죽인다... 보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있듯이, 관개 입장의 치킨 박은 현재의 섹스 게임이 너무나 행복한 유희거리였다.
“풋... 기대 이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3라운드를 준비해 볼까? 단체전이 좋을 것 같은데... 조를 한 번 나눠봐야겠군...”
남은 팀은 총 75팀, 치킨 박이 3라운드에 진출한 팀의 서류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각조의 인원을 똑같이 맞추기는 힘들 것 같은데... 뭐... 어쩔 수 없지...”
치킨 박이 한참동안이나 각 서류를 통해 참여 부부들의 조를 나누기 시작했다. 참여자들의 모습과 행동, 또 성격, 그리고 게임 진행 방식을 모두 봤던 치킨 박이기에 3라운드 게임이 재밌어질 수 있는 최상의 조합들을 찾으려고 했다.
“C조는... 차영호와 강효진 부부, 한명진과 이수영 부부, 조영철과 김희자 부부, 김민석과 황지민 부부, 김영수와 박은희 부부... 그리고...”
치킨 박이 세 번째 조인 C조의 참여자들을 정리해 가며 서류에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최민혁과 김서영 부부... 이렇게 6팀이면 되겠군. 참 재밌을 것 같아. 하하하.”
@ 24부에서 이어집니다.
“엄마아아아!”
연아가 방긋 웃으며 서영에게 달려들었다. 서영은 두 팔을 벌려 연아를 꼭 안아주었다. 연아의 체온이 느껴지자 서영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띠었다.
“이거 봐봐.”
서영의 품에서 떨어진 연아가 손에 감춘 무언가를 서영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뭘까? 우리 연아가 가져온 게...”
연아가 고사리 같은 손을 조금씩 펼치기 시작했고, 그녀의 작은 손 안에는 풀 하나가 있었다.
“엄마! 이거 뭘까요?”
연아가 환한 미소를 띠우며 서영에게 말을 했다. 서영은 연아가 가져온 풀보다는 그녀의 깜찍한 모습에 무한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글세... 연아가 가져온 것 클로버 아니야?”
연아가 가져온 풀은 서영이 보기에는 확실히 클로버였다.
“엄마! 반은 맞는데, 반은 틀렸어요.”
“응?”
“클로버는 맞는데... 자세히 봐!”
서영이 오른손 검지를 통해 연아가 가져온 클로버를 움직이며 관찰을 했다. 잎이 한 개, 두 개, 세 개, 그리고 네 개, 보기 드문 네잎 클로버였다.
“아하! 연아가 가져온 클로버 잎이 네 개구나. 네잎 클로버야.”
“응!”
연아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엄마! 네잎 클로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요?”
연아가 몸을 빌빌 몸을 꼬면서 서영에게 질문을 했다. 서영은 연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웃으며 되물었다.
“뭘까? 엄마는 모르겠는데...”
“헤헤. 네잎 클로버의 뜻은 행운이래.”
“행운?”
“응!”
“우리 연아는 행운이 무엇인지 알아?”
이번에는 서영이 연아에게 물었다. 서영의 질문에 연아는 자신의 작은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잠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알았다!”
“뭘까?”
“좋은 거... 맞아! 좋은 거야.”
“좋은 거?”
“응.”
“호호호호.”
연아의 순수한 대답에 서영이 모처럼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엄마의 행복한 웃음을 보는 연아도 즐거워서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래 맞아. 좋은 거야. 행운이란... 좋은 거야...”
“이거 선물!”
“엄마한테?”
“응! 엄머 가지세요.”
“고마워!”
연아가 서영에게 네잎 클로버를 건네주었다. 서영은 행운의 상징인 네잎 클로버를 잠시 바라보더니, 연아를 다시 품에 끌어들여 안아주었다.
‘행운도 좋지만... 딸과 함께하는 것... 그게 행복인데... 우리는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연아를 안고 있는 서영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지금의 행복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섹스 게임에 참여한 이상, 아니 그 전에 사채업자에 손을 벌렸던 순간부터 행복한 삶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저... 기 아빠가 아이스크림 사 오네.”
“정말?”
연아가 서영의 품에서 벗어나 뒤를 돌았다. 민혁이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연아가 민혁에게 달려갔고, 서영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섹스 게임 2라운드를 통과한 지, 어느덧 3일 째였다. 집에 돌아 온 후, 민혁과 서영은 서로 섹스 게임에 대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2라운드에서 세 번의 게임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수와 은희 부부에게 배신을 당했고, 또 성적으로 유린을 당하기도 했다.
민혁과 서영은 게임 중 상대 부부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직접 보지는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충분히 상상은 되었다. 각자 자신들도 그 시간에 게임에 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은 안했지만 서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졌고, 한편으로는 참고 인내해줘서 고마움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난 3일간의 민혁과 서영은 보통의 생활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컴퍼니 및 섹스 게임에 대한 대화만 나누지 않았을 뿐,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해왔고, 특히 7살 딸인 연아와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아무래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던 딸이기에 그만큼 미안함이 많았던 것도 한몫했다.
오늘은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날이 매우 덥기는 했지만, 세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주세요.”
어느새 민혁에게 다가간 연아가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민혁이 연아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넨 후, 오른손으로 머리를 쓰다듬 거렸다.
“아이 차! 그런데 맛있어요.”
연아가 아이스크림을 앙증맞은 혀로 핥아 먹기 시작했다. 깜찍한 모습에 민혁이 잠시 웃음을 머금었지만, 이내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행히 연아는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열중이라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음... 무슨 일 있어?”
두 부녀에게 다가온 서영이 말을 했다. 민혁이 눈짓으로 연아를 가리켰고, 서영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연아. 저기 미끄럼틀 탈까?”
“응!”
연아가 활기차게 대답을 했다.
“먼저 가 있을까? 우리 연아? 혼자 탈 수 있지?”
“연아 혼자 탈 수 있어요!”
“엄마랑 아빠랑 연아 혼자 타는 것 보고 싶어서 그래. 조금 후에 갈게.”
“응!”
연아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우측으로 약 2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미끄럼틀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혁과 서영은 이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서영이 물었고, 민혁이 대답 대신 한 손을 뒤로 가져가 뒷주머니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
컴퍼니가 보낸 초대장임을 알아 본 서영이 잠시 말을 잊었다.
“3라운드가 시작 되나 봐.”
민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컴퍼니의 초대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그게 다시 현실로 다가오니 우울해진 민혁이었다.
“어떻게 초대장이...”
“몰라. 그냥 아이스크림을 샀을 뿐인데... 내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걸. 주위를 둘러봐도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고...”
민혁의 말을 들으며 서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컴퍼니가 섹스 게임 참여자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감시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우리 감시당하고 있던 거야? 아니, 지금도 누가 지켜보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민혁이 대답을 흘렸다. 서영이 주위를 둘러보지만 역시 수상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없었다.
“할 말을 잃게 만드네... 그보다 이번에는 어디야?”
“아직 안 봐서... 모르겠는데...”
민혁이 컴퍼니가 보낸 편지를 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영과 함께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놈의 행복한 가정을 기원한다는 말은... 쩝...”
초대장을 읽어 내려가는 민혁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컴퍼니의 섹스 게임으로 인해서 가정이 깨질까봐 불안해하며 살고 있는데, 행복한 가정을 기원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민혁이 생각하기에는 전혀 앞뒤가 안 맞았다.
“별 다른 내용은 없는데... 어? 이번에는 1박 2일인가 봐?”
3라운드를 위해 컴퍼니가 보낸 초대장은 지난 두 번의 초대장의 내용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이번 3라운드는 1박 2일로 꾸려지는 듯, 잠옷 및 간단한 세면도구를 챙겨 오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런 지옥 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니...”
7성급 호텔이라도 그곳에서 섹스 게임이 벌어지면 참여자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도 아니고 이틀 동안 게임을 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민혁과 서영은 걱정이 되었다.
“이번에는 어디지?”
“잠시만... 어... 우리 집인데?”
“집이라니?”
섹스 게임 참여 장소가 집이라는 말에 서영이 놀라 민혁에게 되물었다.
“게임은 이틀 뒤에 시작 되는데... 준비물 챙기고... 집에 있으면 된대... 그러면 데리러 온다는데?”
“시간은? 시간에 대해서는 말이 없어?”
“오전... 3시야.”
섹스 게임 초대장을 다 읽은 민혁과 서영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집에 있으면 알아서 찾아온다니, 도대체 무슨 게임을 하려는 것일까? 더구나 오전 3시라면, 남들 다 자고 있을 새벽이 아니던가.
“꼭두새벽부터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게...”
2라운드, 특히 세 번째 게임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민혁과 서영이었지만, 다시 3라운드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 반갑지가 않았다. 차라리 게임이라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30억이라는 빚을 갚을 방법이 없었다.
“휴우...”
“후......”
민혁과 서영이 나란히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답이 없었다. 겪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
“한 가지만 약속하자.”
민혁이 서영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얼?”
“다시는 속지 말자. 아니, 우리끼리 어떻게 해보자.”
민혁의 말을 듣고 서영은 영수와 은희를 떠올렸다. 생각만으로도 치가 떨렸던 경험이었기에 서영 역시 민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만... 우리만 살아남으면 되는 거야.”
민혁이 다시 서영에게 말을 했고, 서영이 그 말을 들으며 신나게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 연아를 쳐다보았다.
‘그래... 나도... 내 딸만... 내 딸만 신경 쓰자...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을 거야.’
민혁과 서영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미끄럼틀에서 내려온 연아가 두 사람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아빠 이리 와요!”
***
이틀 뒤, 새벽 3시 경.
딸 연아를 이미 외할머니께 맡긴 민혁과 서영이 컴퍼니 지시대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철컥.
정확히 3시가 되자, 민혁이 일부러 잠가놓은 현관문이 거짓말처럼 열렸다. 서영이 뒤로 물러나며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천천히 열린 현관문을 통해 몇 사람이 들어왔다.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의 컴퍼니 직원들... 그들 중에는 여자도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민혁님, 그리고 김서영님.
그들 중 리더라고 보이는 자가 한발 앞서나와 민혁과 서영을 불렀다.
“우리는... 준비가 됐어요.”
서영이 대신 대답을 했고, 리더로 보이는 컴퍼니 직원이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준비가 되셨다면, 이 검은 두건을 쓰길 바랍니다.”
리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컴퍼니 직원이 민혁과 서영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손에는 각자 검은 두건이 들려 있었다.
“이걸... 지금 쓰라는 건가요? 꼭 이래야만...”
“두건을 쓰셔야 3라운드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민혁이 두건을 쓰는 것에 대해 거부하려고 했지만, 리더의 결정은 단호했다.
“안전은 저희 컴퍼니 직원에서 보장해드립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건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민혁과 서영도 두건을 쓰는 것에 대해 조금은 주저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은 리더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말을 하자, 그때서야 민혁과 서영은 검은 두건을 쓰기 시작했다.
“모셔라.”
리더의 명령이 떨어지고, 컴퍼니 직원들이 두건을 쓴 민혁과 서영의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민혁과 서영은 앞이 보이지 않아 매우 답답했지만, 벗을 수도 없기에 차분히 컴퍼니 직원들의 유도에 따라 걸었다.
밖에는 창문조차 가려진 두 대의 승합차가 대기 중이었다. 컴퍼니 직원들은 두 대의 차에 민혁과 서영을 따로 태웠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두 대의 승합차는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새벽 3시였기에 아무도 이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민혁과 서영은 3라운드 게임 장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검은 두건 역시 벗지 못했다.
@ 25부에서 이어집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민혁은 여전히 검은 두건을 쓴 채로, 차에 앉아 있었다. 차 안에서는 컴퍼니 직원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동차 엔진 소리만이 민혁의 귀에 들려올 뿐이었다.
‘씨발... 죽겠네.’
민혁이 그동안 차안에서 한 건, 아니 당한 건 컴퍼니 직원들에 의한 몸수색이었다. 이건 이제 민혁에게 익숙했다.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행해졌던 것들이니... 그러나 검은 두건을 여전히 벗지 못하는 건 매우 갑갑했다.
민혁은 소변이 마렵다는 핑계로 답답한 검은 두건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컴퍼니 직원은 검은 두건을 벗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음료수통을 건네며 볼일을 해결하라는 지시만 내려졌을 뿐... 차안에는 남자들만 있는 듯 했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소변을 보려고 하니, 나오려던 오줌도 다시 방광으로 들어간 듯 민혁은 소변마저 해결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데 이 지랄이야.’
시간의 흐름마저 느낄 수 없었다. 오직 어둠만이 세상의 전부인 듯 답답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민혁은 갑갑한 마음에 지쳐, 정신이 혼미해져서 얼마의 시간동안 기절도 했다. 체력적으로도 지쳐갈 무렵, 민혁은 오히려 자동차의 움직임에 대해 더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체력이 있을 때는 오직 귀를 통해 너무 많은 것을 신경 썼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 것이 오히려 득이 되었던 것이었다.
‘좌회전을 하고.... 우회전... 그리고 우회전... 좌회전... 좌회전, 좌회전... 또 좌회전 그리고 우회전... 우회전... 우회전... 아!’
민혁이 느끼기에 자신을 태운 차는 일정 지역을 8자 형태로 주행을 하는 듯 했다. 일정 시간을 두고 좌회전과 우회전을 반복했는데, 그때마다 머릿속으로 차의 동선을 그려보니 8자가 그려졌고, 그것은 결국 똑같은 곳을 반복해서 돌고 있다는 뜻이었다.
‘... 주행 중인 자동차의 소리도 들리고... 밖의 인도로 다니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 생각해 보면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로 운전을 한 것 같지도 않고... 이거 도심인 것 같은데...’
민혁이 추측하기에는 자신이 도심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1-2라운드 게임 장소는 사람들이 찾지 않는 외지였던 반면, 이번 3라운드 게임은 도심 속에서 이뤄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보는 눈이 많고, 우리가 그 장소를 알면 안 되니까... 이렇게 차를 뺑뺑 돌리고 있구나...’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민혁은 계속해서 자신의 추측을 이어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둠속의 고요는 너무 지루하고, 너무 답답했다.
끼이익.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민혁을 태운 승합차가 멈췄다. 그리고 컴퍼니 직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다 왔나 보군...’
“내리겠습니다.”
누군가 민혁에게 차에서 내려야 함을 알렸다. 민혁은 컴퍼니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차에서 내렸지만, 여전히 검은 두건을 벗겨주지는 않았다.
“여기가 어디요?”
민혁이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컴퍼니 직원들은 그저 민혁의 양팔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민혁은 컴퍼니 직원들에게 이끌려가는 중에도 자신의 동선으로 이곳이 어디일지 짐작하기 시작했다.
‘꽤 큰 건물 같은데... 그런데 정상적인 입구가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울린다... 발걸음 소리가... 또...서늘한 느낌도 있어...’
민혁은 자신이 걷고 있는 곳이 어느 건물의 지하 주차장임을 확신했다. 지하가 아니고서는 발걸음 소리가 이렇게 크게 울리지도 않을 것이며, 더구나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서늘한 느낌마저 받고 있었다.
‘젠장... 어느 큰 건물의 주차장 같은데... 어디지... 어디일까...’
그 이상 민혁은 알 수가 없었다.
철컥.
민혁의 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민혁은 컴퍼니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엇!”
“조심하십시오. 계단입니다.”
바닥이 사라짐을 느끼며 민혁이 헛발질을 했다. 컴퍼니 직원의 말을 듣고 계단임을 알게 된 민혁이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밀었다.
‘지하에서... 또 내려간단 말이야?’
지하 밑의 지하, 민혁은 의아함을 느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 계단수를 셌는데, 약 70개였다. 이 정도면 지상으로 3층 높이였다. 내려왔으니, 지하로 3층을 더 내려간 셈이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답답한 마음에 민혁이 다시 되물었지만,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하로 내려온 민혁이 컴퍼니 직원의 안내로 다시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철컥.
또 문이 열렸다.
‘또 지하는 아니겠지?’
민혁이 천천히 문안으로 발걸음을 내밀었다. 다행히 지하는 아니었다.
“여기에 대기합니다.”
민혁의 귀에 컴퍼니 직원의 말이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민혁의 양팔을 잡고 길을 안내하던 컴퍼니 직원들이 그의 팔을 풀어주었다.
철컥.
문이 다시 닫혔다. 어리둥절한 민혁이 입을 열었다.
“두건을 벗어도 됩니까?”
컴퍼니 직원의 허락을 기대하며, 민혁이 질문을 했지만, 대답을 한 사람은 뜻밖에도 여자 목소리였다.
“여... 여보.”
서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민혁은 지체할 것도 없이 검은 두건을 벗었다. 밝은 세상이었지만, 민혁의 눈은 좀처럼 떠지질 않았다. 어둠속에만 있던 눈이 빛에 적응을 하지 못한 것이었고, 민혁은 시야가 확보가 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괜찮아져.”
민혁은 고개를 숙인 채, 시력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서영이 민혁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민혁의 시야에는 하나 둘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와 있었네?”
“20분 정도... 된 것 같아...”
“진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나도... 그런데 여긴 어딜까?”
서영과 대화를 하며 민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민혁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집의 평범한 안방 크기의 방이었다.
“우리 집 안방 같은데...”
“나도 둘러 봤는데... 에어컨, 침대, 벽시계, 스크린 그리고 감시카메라 2대... 이것 외엔... 없어.”
서영의 말을 들으며 민혁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서영이 말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물건이 없었다.
“이곳이 게임 장소인가 보군.”
“그런가 봐.”
“그런데 지금 몇 시지?”
“자... 잠깐... 오전 11시가 조금 넘었는데...”
서영의 말을 듣고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씨발. 닭대가리 새끼...”
“왜?”
“내가 오면서 생각했는데... 이곳은 우리 집과 멀지는 않아. 고속도로를 탄 적도 없었고... 어느 특정지역을 계속 8자 모양으로 돌았단 말이야. 우리가 새벽 3시에 잡혀오다시피 했는데... 8시간이나 지났잖아... 젠장... 8시간이나 차에서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나도... 한 곳을 계속 돈다는 느낌은 받았는데...”
“닭대가리 새끼. 뒤가 구린 새끼가 분명해. 그러니까 숨길게 많지.”
차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무려 8시간이나 고생을 한 민혁이 컴퍼니에 대해 불만을 쏟고 있었다.
“내가 2라운드 게임 장소부터 알아봤어. 이 자식들 건물을 불법 건축하고, 불법 개조하고... 여기 지하 중의 지하야.”
“한참을 내려왔는데...”
“지하로 따지면 족히 5-6층은 내려왔을 거야... 우리 위에 지하주차장이 있는 것 같으니...”
서영이 민혁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고... 좀 쉬어야겠다.”
“응. 언제까지 대기할지 모르니...”
민혁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서영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일단 컴퍼니 직원이 대기하라고 했으니, 자신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 뿐 이었다. 서영은 지속해서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천천히 1초, 1분씩 지나고 있었고, 기약없이 대기만 하고 있는 건 참 지루한 행위였다.
“12시 다 되가는데... 12시 쯤 부를 것 같지 않아?”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던 민혁이 말을 했다.
“후훗... 그럴까?”
“내 생각에는 그럴 것 같은데?”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12시가 되었을 무렵, 방안의 스크린에는 여지없이 치킨 박의 모습이 등장했다.
- 하하하하.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치킨 박입니다.
“거봐? 내가 말했지?”
침대에서 일어난 민혁이 말을 하며 스크린 속에 등장한 치킨 박을 쳐다보았다. 서영 역시 치킨 박에 집중했다. 이제 본격적인 3라운드 게임이 진행되려고 하였으니...
- 오시느라 수고하셨을 겁니다. 여러분들께 죄송하다는 인사를 드리며... 하하하.
“어휴...”
치킨 박의 말을 듣자면, 속만 터지는 민혁이었다.
- 핑계를 대자면, 저희 컴퍼니에서는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있는 곳을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 있답니다. 하하하.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이런 장면들을 연출해보고 싶기도 했고... 하하하. 재미는 없으셨는지요?
‘지켜보는 너나 재밌지. 이 닭대가리 새끼야.’
한심한 말을 계속하는 치킨 박에게 민혁이 마음속으로 향했다. 겉으로 할 수는 없었으니...
- 하하하.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좀 해야 할 텐데요. 그런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여러분들이 모두 지쳐 있을 것 같고... 점심 식사 시간도 됐으니... 방에서 다들 나오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지금부터 딱 2시간 후에 게임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편안히 식사하시면서... 게임 참여자들과 서로 인사도 나눠보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치킨 박이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저 닭대가리는 밥은 잘 챙기더라. 밥 먹고 피 터지게 싸우라는 건가.”
“배가 고프기는 해. 새벽부터 차에서 시달렸으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긴 해야겠는데...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이 우리와 싸우게 될까?”
“나가보면 알겠지... 뭐.”
민혁과 서영은 앉아 있던 침대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민혁이 방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민혁이 먼저 앞장을 섰고, 그 뒤를 서영이 따랐다.
“어?”
“왜?”
문을 열고 두어 발자국 걸었을까? 갑자기 민혁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서영이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 민혁 옆으로 다가갔고, 그때서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눈에 비쳐짐을 알 수 있었다.
“몇... 팀 인거야?”
3라운드 게임도 일대일로 생각했던 민혁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눈에는 각자의 방에서 나오는 부부들이 보였는데, 총 5쌍의 부부였다. 서영 역시 생각보다 많은 부부에 약간은 당황했다. 더구나 자신이 아는 부부도 있었다.
“영수, 은희 부부도 있는 걸?
“미친...”
서영의 말에 영수와 은희를 확인한 민혁이 욕설을 내뱉었다.
각 방의 스크린을 통해 치킨 박의 지시를 받았던 6쌍의 부부가 거의 동시에 방문을 열고 나온 상황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자, 그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못했다. 방문 앞에 서서 경쟁자 부부들을 관찰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어렸을 적, 얼음 게임이라도 하듯이 방문 앞에 서 있던 부부를 움직인 건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가 나서면서였다.
“쳇. 동물원 구경 왔어? 뭐해? 밥 안 먹을 거야?”
희자였다.
희자가 선수를 치며 먼저 움직였고, 그 뒤를 남편인 영철이 따랐다. 묘하게 얼음처럼 서로를 붙잡고 있던 분위기가 희자로 인해 깨졌고, 그 뒤로 하나 둘씩 음식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구조가 독특하네.”
“그러게...”
모든 참여자가 있는 곳, 지금의 지하 구조를 한눈에 확인한 민혁이 말을 했다. 비교적 공간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서영이 보기에도 현재 자신이 있는 지하 구조는 매우 특이함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 저 사람들이 다 먹기 전에...”
“응.”
아직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있었기에 민혁과 서영은 자신들의 의문을 뒤로하고, 음식이 있는 식당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26부에서 이어집니다.
컴퍼니가 준비한 식사는 뷔페였다. 게임 참여자들이 각자의 접시에 여러 음식들을 적당히 골라서 먹을 수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기만을 달래려는 듯 음식을 많이 먹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맛은 괜찮은데?”
“그래? 난 입맛이 없어서 그런가... 별로인데...”
민혁과 서영이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먹고 있었다. 민혁과 서영을 포함한 6팀의 게임 참여자들은 다들 따로따로 앉아서 식사를 하였지만, 눈만큼은 서로를 관찰하는데 쓰고 있었다.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좌우로 고개를 돌리는 일이 잦았고,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벌써 몇 번이나 서로 눈이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나이대가 다양한데...”
“미성년자처럼 어려 보이는 애들도 있고...”
“저 나이든 여자는 마치 제집처럼 지내는데...”
민혁과 서영은 자신들만이 들을 수 있도록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었다. 이건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분위기가 불편했던 것일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마치 자기 집에서 먹는 것처럼 식사를 하던 희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쳤다.
“눈알 돌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던데... 여기는 수캐와 암캐가 넘치는 것 같네... 밥 맛 떨어지게...”
희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두 분류로 나뉘었다. 몰래 관찰을 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사람들은 마치 그렇지 않은 양 식사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고, 또 다른 분류의 사람들은 이제 대놓고 서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에잇.”
식당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희자가 자리를 벗어났고, 그 뒤를 남편 영철이 따랐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이든 여자가 기가 세네... 남편은 무슨 애완견마저 졸래졸래 따라다니고...”
민혁이 말을 했다.
“어떤 게임이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저 나이든 여자 부부가 가장 위험하겠는 걸?”
서영이 말을 했고, 민혁이 의아한 얼굴로 질문했다.
“왜?”
“재수 없잖아. 우리야 영수와 은희를 가장 싫지만... 이미 한 번 겪었으니...”
“그렇지.”
“나머지 부부들은 우리가 전혀 모르잖아. 아마 그들도 같을 거야. 서로 모르는 상황에서 저렇게 눈을 돌리며 관찰하는데... 저 나이든 여자는 반말로 재수 없게 행동을 하니... 가장 먼저 탈락할 확률이 높지. 경쟁 팀들이 적이기는 하나,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면... 은연 중 나머지 팀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나이든 여자 부부부터 탈락시켜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걸?”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나도 별로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서영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민혁이었다. 3라운드가 어떤 게임이 될지, 아직 알 수 없으나, 최초의 탈락 팀이 생긴다면 나이든 여자의 부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 역시 나이든 여자의 행동을 보며 불편해 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생각났는데...”
“응?”
다시 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영수와 은희가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부부들도 2라운드에서 경쟁했던 팀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닐까?”
“서로 아는 체를 하지 않던데?”
“바보. 아는 체를 할 필요가 없지. 우리도 아는 체 안하잖아. 솔직히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은 사람들인데... 여기서 아는 체를 할 필요가 없지. 아는 체 해봐야, 다른 팀들에게 ‘우리는 2라운드에서 경쟁했지만, 서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적입니다’라고 광고하는 꼴인데... 그러면 불리하지. 아마 내 생각에는 서로 아는 사이도 있을 거야. 단지 아는 체 하면 불리할 수도 있으니, 다들 처음 만난 것처럼 행동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하.”
서영의 추측에 민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에 영수와 은희와 게임 전에 서로 안면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적의 적은 아군과 같지 않던가. 괜히 적이 하나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영수와 은희는 공작에 능하지 않던가.
“다 먹었어?”
“별로 안 들어가네...”
“일어나서 좀 걸을까. 이곳 구경 좀 하고...”
“응.”
민혁과 서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하 구조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저기까지 50미터는 되겠는데? 다른 쪽도 30미터는 되어 보이고...”
“난 여자라 거리 감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꽤 넓어.”
현재 민혁과 서영이 있는 지하의 구조는 직사각형의 모양을 갖춘 큰 로비였다. 로비의 좌측 상단에는 방금 식사를 한 식당이 있었고, 그 밑에는 샤워실 및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에는 곳곳에 앉아서 쉴 수 있도록, 쇼파와 테이블이 있었다. 이미 희자와 영철이 우측 하단의 쇼파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넓은 공간치고... 별달리 특별한 건 없네... 그런데 여기에 설치 된 카메라만 10대가 넘는 것 같은데...”
“그러게... 직원들이 또 캠코더로 영상을 찍을 텐데... 왜 이렇게 영상을 좋아하는 걸까?”
“알 수야 있나... 미천한 우리들이...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영화라도 보여주려나? 왜 이렇게 스크린이 커? 닭대가리 모습을 저렇게 큰 화면으로 봐야 해?”
“진짜 극장에 온 것 같다.”
로비의 중앙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가 되어 있었다. 마치 극장의 스크린처럼 매우 큰 스크린이었는데, 민혁은 벌써부터 큰 스크린으로 치킨 박을 볼 생각을 하니, 구역질이 나오는 듯 했다.
“진짜 마음에 드는게 없다니까...”
민혁과 서영은 로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중앙 하단으로 걸어갔다. 중앙 하단에는 폭이 약 5-6미터 정도 되는 통로가 있었는데, 그 길이는 약 25미터 정도 되는 듯 했다. 통로의 끝에는 철문이 있었고, 그곳은 컴퍼니 직원 2명이 지키고 있었다.
“저기로 내려와나 봐.”
“응.”
민혁과 서영이 통로에 들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통로의 좌우측에는 각각의 방이 있었는데, 점심 식사 전에 게임 참여자들이 머물렀던 곳이었다. 민혁과 서영은 통로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방 개수를 세었는데, 총 12개임을 알 수 있었다. 좌측에 6개, 우측에 6개...
“방마다 숫자가 적혀 있는데?”
“응. 좌측 방 입구부터 마지막 방에 1번부터 6번이라고 적혀 있어. 그리고 우측도 마찬가지야, 마주보는 방은 방 번호가 같은데?”
“우리가 6팀이라.. 방이 6개인 건 이해가 되는데.. 왜 2개의 방씩 12개가 필요하지? 각 방에 한 명씩 들어가나? 그러면 게임이 돼? 아... 모르겠다.”
“고민한다고 알 수야 있나...”
민혁과 서영은 12개의 방의 비밀을 알려고 머리를 굴렸지만, 결코 치킨 박의 입에서 게임 설명이 나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더 이상 오시면 안 됩니다.”
어느덧 통로 끝에 다다랐고, 철문을 지키고 있는 컴퍼니 직원이 민혁과 서영을 제지했다.
“알겠어요.”
서영이 대답을 했고, 민혁과 뒤를 돌아 다시 로비로 걷기 시작했다.
“구조가 참...”
“........”
민혁의 말에 서영이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 전에 방을 나오면서 알 수 있었지만, 이곳 지하 구조는 남자 성기를 본 따서 만든 것 같았다. 치킨 박이 나타날 로비의 대형 스크린을 기준으로 보면 정확히 남자가 발기한 모습으로 구조를 만든 것 같았다.
“훗... 욕일 수도 있어.”
서영이 살짝 웃으며 민혁에게 말을 했다.
“무슨?”
“서양 애들이 하는 거 있잖아. 가운데 손가락 욕...”
“아하... 그만큼 게임이 좆같다는 건가.....”
지하 구조의 형태가 남자의 성기를 본 딴 건지, 퍽 유라는 욕설을 본 딴 건지, 민혁과 서영이 알 길은 없었다. 또한 알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했다. 그만큼 험난한 게임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은...
***
점심 식사를 마치고 6팀의 부부들은 각자 로비의 쇼파에 자리를 잡아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대화를 할 의지는 없는 듯, 마냥 눈으로만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먼저 움직인 쪽은 참가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명진과 수영이었다.
“힘들어도... 참아야 해. 알았지?”
수영이 명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릿하지만 또박또박 발음하며 말을 했다. 그리고 명진은 수영의 입술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명진은 말을 하지 못했다. 또한 듣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난 수 년 간의 노력 끝에 사람 입술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상대가 누구든지 말을 하면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래... 두 번? 아니, 이번 라운드만 버티면... 운이 좋으면 다음 라운드에서 게임을 포기할 수도 있어... 그러면... 우리 아기는 살릴 수 있을 거야. 알았지?”
다시 한 번 명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명진에게 수영이 활짝 웃어 보이며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수영이 명진을 어디론가 이끌기 시작했다. 수영이 명진을 데려간 곳은 영수와 은희가 앉아서 쉬고 있는 쇼파였다.
“안녕하세요.”
수영이 고개를 숙이며 영수와 은희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뒤를 따라 명진도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러나 뜻밖의 인사를 받아서였을까? 영수와 은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영수는 인사는커녕 대꾸도 하지 않고 손으로 저리가라며 휘저었다.
영수와 은희의 반응에 수영이 명진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은희가 중얼거렸다.
“남자가 병신인가 봐. 아까부터 봤는데... 말을 못해.”
“누가 알아? 연기라도 하는 것일지... 저렇게 어린 새끼들이 더 지독하거든...”
명진은 듣지 못했지만, 수영은 확실히 두 귀로 자신들을 욕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영은 어떤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표정이 변하면 명진이 그것을 읽어낼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수영과 명진이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들은 영호와 효진이었다. 수영과 명진이 인사를 다니는 모습을 봤던 영호와 효진은 영수와 은희와는 다르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영호와 효진의 반응에 수영이 살짝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분위기가 생각보다 화기애애함을 느낀 명진도 기분이 풀어지고 있었다.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