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서 볼넷 3개로 무사 만루 위기를 자초한 투수, 그 투수는 실점을 하지 않으려고 그 다음 3타자를 전력투구하며 모두 삼진을 잡아냈다. 마치 영호는 그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영호는 일단 스스로를 시험해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고작 3라운드에서 소극적인 행동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탈락하면... 말짱 꽝이잖아.”
“그건 그렇지. 내가 1번 부부와 3번 부부를 도와주긴 했는데... 그들이 날 돕는다는 보장은 없어. 대신에 1번 부부와 3번 부부가 끝까지 함께한다는 보장도 못하지.”
“무슨 말이야?”
효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영호에게 물었다. 영호는 효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실실 웃기조차 했다.
“왜 웃어?”
“음... 재밌거든. 1번 부부와 3번 부부... 함께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재밌으니까. 사실 그들을 도와 준 이유 중 하나가... 보는 것 자체가 재밌기 때문이야. 그래서 꼭 결과를 내 눈으로 보고 싶단 말이야.”
“좀 자세히 말해줘! 이해가 안 돼!”
“보통 우리가 내기를 하게 되면 상대방을 관찰한단 말이야. 나 역시 3라운드 게임이 시작되면서 모든 사람들을 지켜봤지. 이 자체가 재밌어.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으니... 내가 아까 영수라는 놈에게 한 말 기억 나?”
“무슨 말?”
“이곳에서 믿음은 비상식적인 단어라는 것... 그런데 1번 부부와 3번 부부가 서로 신뢰를 한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그래서 난 그 결과를 보고 싶을 뿐이야.”
“그러면 자기는 세 번째 게임에서 그들이 틀어진다는 말이야?”
영호의 말을 듣자면, 효진은 1번 부부와 3번 부부가 세 번째 게임에서 틀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틀어진다는 말은 고작 배신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모르지.”
“에이 뭐야...”
“모르니까 확인하고 싶다는 거야.”
1번 부부와 3번 부부의 믿음이 깨지면, 효진의 생각에 자신들은 반드시 4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호는 그에 대해 확답을 하지 않았다. 가능성만 있다는 말 뿐, 영호 역시 그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참... 나 자기에게 할 말 있는데...”
영호가 효진에게 말을 했다.
“응? 어떤 말?”
“나... 밤에 그 어린 수영이라는 여자애랑 섹스할 거야.”
“섹스?”
“응.”
영호의 말에 효진이 순간 당황을 했다. 사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호를 말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
“방법이야 있지.”
“꼭 해야 해?”
“그냥 하고 싶어. 왠지 그 애랑 섹스하면... 4라운드에 진출할 것 같아. 어린 여자는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잖아. 하하하.”
영호가 이유모를 표정과 함께 웃었다. 그리고 효진은 뾰로통한 얼굴로 그런 영호를 쏘아봤다.
“다시 말하지만 질투하면 안 돼! 4라운드에 진출해야 하니까.”
“알았어!”
***
두 번째 게임 투표가 끝나고 대형 스크린이 있는 로비에는 두 쌍의 부부만이 남았다. 영호 부부가 가장 먼저 자리를 떠났고, 그 다음에는 5번 부부가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한다며 자리를 벗어났다. 즉, 민혁과 서영, 명진과 수영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된 일이지?”
서영이 두 번째 게임의 피해자였던 수영에게 물었다.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은 수영 뿐이었다.
“그게 사실은...”
수영이 한참동안 영호와 나눴던 대화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영은 영수의 계획 그리고 갈등, 또한 서영이 영수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서 했던 행동들까지 영호는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알렸다. 수영의 말을 들으며 서영은 매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영의 말대로라면 정말로 영호가 자신을 두 번이나 살려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정말로 우리를 두 번... 이나 도와준 것이었어...”
수영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서영이 홀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민혁의 표정은 썩 좋지가 않았다. 민혁은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영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혀 자신들을 도와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믿기 힘든데.”
민혁이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수영이 대답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그 사람은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두 번이나 영수라는 사람의 위협에서 우리를 도왔어요.”
“그거야 나중에 끼워 맞춰서 설명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민혁이 여전히 의심스런 표정으로 수영에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굳이 두 번째 게임에서 영수 부부를 탈락 시킬 이유가 없죠. 자신의 표로 탈락시켰는데요.”
“그건... 수영이 말이 맞아.”
듣고 있던 서영이 수영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민혁도 이견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영호의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으니...
“그럼 세 번째 게임에서 우리는 영호 부부를 탈락시키면 되는 걸까?”
민혁이 세 사람을 향해 질문을 했다. 그리고 수영이 먼저 대답을 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왜 그럴 수 없나요?”
다시 민혁이 수영에게 반문을 했다.
“어찌 됐든... 도음을 받았잖아요.”
“그건 인정하지만... 과정을 보면 영호 부부도 믿을 수는 없죠. 결국에는 영수 부부를 배신한 사람이니... 한 번 배신한 사람이 두 번은 못할까요?”
민혁이 날카로운 질문을 수영에게 던졌다. 수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점이 나도 마음에 걸려.”
이번에는 민혁의 의견을 돕는 서영이었다. 돕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분명 영호의 행동은 고마웠다. 그러나 영수 부부를 배신한 것도 영호였다. 그렇기 때문에 도음을 받았다고 해서 무작정 믿을 수도 없었다.
“결국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어느 팀을 탈락시켜야 하는데...”
민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영호 부부를 탈락시켰으면 하는데... 아무래도 못 믿겠어요. 기도만 하는 5번 부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딱히 우리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민혁이 먼저 탈락을 시켜야 할 팀을 언급했다. 그 말을 들은 수영이 뒤를 이었다.
“전... 5번 부부를 탈락시켜야 한다고 봐요.”
민혁과 수영의 의견이 엇갈린다. 그리고 말을 못하는 명진이 오른손을 들어 활짝 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을 세 사람에게 보여줬다. 명진도 5번 부부가 탈락해야 함을 말하고 있었다. 결국 수영 부부는 5번 부부를 탈락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고, 이제 남은 사람은 서영 뿐이었다.
“당신은 어때?”
민혁이 물었고, 곰곰이 생각하던 서영이 대답을 했다.
“우리는 반드시 4라운드에 진출해야 해... 그것도 함께... 영호 부부나 기도만 하는 부부...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우리가 몰라. 그리고 지금은 알 필요도 없고... 일단 우리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는 것만 생각하자. 그렇다면... 답이 나와.”
“그러니까 5번 부부야? 6번 부부야?”
“5번 부부를 탈락시켜야 해.”
서영이 수영 부부의 편을 들었다. 순간 기분이 나빠진 민혁이 따지듯이 서영에게 물었다.
“그 이유가 뭐지?”
“생각 해봐. 세 번째 게임은 투표권이 딱 3개야. 5번 부부가 끝까지 기권만 할 것이라면... 결국 남는 건 2표. 재수가 없으면 1표씩 받아서 두 팀이 탈락할 수도 있어. 그 탈락 팀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잖아. 더구나 우리들 중 피해자가 나온다면... 투표권이 없으면... 사실상 세 팀의 개인전이 되어버리잖아. 운이 좋아서 우리가 모두 투표권을 갖게 되면 5번 부부나 6번 부부 탈락시키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게 아니라면? 5번 부부를 탈락시키는 쪽으로 가야 해. 그래야 6번 부부인 영호 부부가 5번 부부에 투표를 하겠지? 그리고 또 영호 부부가 피해자 팀이 되어버리면... 기권 규정을 이용해서 그들을 탈락시킬 수 있겠지만... 문제는 5번 부부가 끝까지 기권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러면 당연히 우리는 5번 부부를 탈락시켜야 해. 반대로 5번 부부가 피해자 팀이 된다면, 영호 부부와 함께 기권 규정을 이용할 수도 있을 거야.”
서영이 아주 길게 민혁에게 세 번째 게임의 경우의 수를 설명했다. 민혁은 6번 부부인 영호 부부와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서영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5번 부부를 탈락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임한다면 4라운드 진출이 어렵지는 않았다.
“쩝... 그래 좋아. 5번 부부를 탈락시켜야겠네. 젠장.”
민혁은 입맛이 썼다. 민혁은 5번 부부가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부부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불쾌하게 행동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부부를 탈락시키려고 지금 협의를 하고 있었다.
“나도 좋은 기분은 아니야.”
민혁의 눈치를 본 서영이 말을 했다. 그리고 수영도 거들었다.
“저도 마음이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서로 의견이 엇갈리기는 했지만, 네 사람은 세 번째 게임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영이 말을 했다.
“규정을 이용하려면... 만약 우리들 중에 추행범이 나올 경우... 반드시 5번 부부나 6번 부부를 피해자로 만들어야 해. 그래야만 우리의 표가 2개로 보장이 되니까. 다들 알았지?”
“알았어.”
“네... 꼭 그럴게요.”
민혁과 수영이 서영의 말에 대답을 했다. 그리고 명진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우리는 이제 정말 하나의 팀이야. 꼭 4라운드에 함께 진출하자.”
서영이 마지막으로 의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믿었다. 3라운드 게임이 종료가 될 때, 네 사람 모두 웃을 수 있다고...
@ 42부에서 이어집니다.
통로의 좌측 3번방에 들어온 명진과 수영은 침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간은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짧겠지만, 정작 게임의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긴 하루였다.
“긴... 하루 같아.”
수영이 말을 했다. 그리고 수영의 말을 알아들은 명진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차마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명진은 수영이 두 번째 게임의 피해자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유린을 당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수영이 죄책감 가지게 될까봐 명진은 입을 아꼈다.
“... 괜찮아. 이겨냈으니까... 그리고 걱정하지 마.”
명진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수영은 명진의 고통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먼저 입을 열었다. 불편한 진실이었지만, 남편인 명진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수영의 말을 들은 명진이 수화를 통해서 그녀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그리고 수영은 자신을 걱정하는 명진에게 애써 밝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반지를 잠시 맡겼어... 그 남자에게...”
명진은 그때서야 수영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명진도 당황하며 빠른 손놀림으로 수영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 우리가 배신할까 봐... 못 믿겠대. 그래서 반지를 주래. 3라운드 게임이 종료가 되면... 돌려준다고 하니까... 걱정 마. 그건 나에게 가장 소중한 반지니까.”
명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시 두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수영이 그 모습을 보고 대답했다.
“나도 그 사람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아니... 싫다고 하는 게 맞을 거야. 아까 수영 언니 부부에게는 그 사람이 도와줬으니... 우리도 도와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반지 문제가 더 커... 돌려받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6번 부부와 함께 가야 해...”
명진은 수영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세 번째 게임만 잘 진행되면 반지를 돌려받을 수 있다지만, 명진에게 있어서는 반지를 돌려받고 못 받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명진의 몸을 감싸왔다.
“불안하다고?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수영이 명진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명진의 가슴은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명진이 쉴 새 없이 두 손을 교차시키며 수화를 하고 있었다.
“... 아니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서영 언니 부부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할 거야. 세 번째 게임은 별거 아닌 거 다 알잖아. 이미 서로 이야기를 끝내놨으니까... 그리고 나도 강해질 거야. 내일 우리 지혜 얼굴 봐야 하잖아. 나쁜 생각 하지 말자. 응... 다 잘 될 거야.”
명진은 딸인 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목숨과도 못 바꾸는 사랑하는 딸이었지만, 그만큼 불쌍한 딸이기도 했다. 나이라는 말도 우스울 정도의 어린 아기가 백혈병이라니...
“그래... 그러니까 자기도 자신감을 가져. 우리는 이겨낼 수 있어.”
마을 마친 수영이 명진을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그러자 명진은 조금씩 가슴이 진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내일 우리 반지를 되찾고... 오후에는 우리 예쁜 아기 보는 거야. 알았지?”
수영이 명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명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왜 그래?”
통로의 좌측 1번방에는 민혁과 서영이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비교적 서영은 차분한 느낌이었지만, 민혁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거든. 영호라는 놈이 왜 우리를 도왔는지...”
“그건 나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누구의 생각이 어떻든 현재는 우리가 유리한 상황이야.”
“그건 맞긴 한데... 난 그 의문이 풀리지 않으니까... 뭔가 자꾸 걱정이 돼.”
서영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민혁이 불안해하는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사람은 행동을 하면서 분명 인과관계라는 게 존재했다. 그런데 영호는 결과적으로 스스로 피해를 보면서 자신들을 두 번이나 도와줬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재밌으니까’라는 짧은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그 자식 또라이인가?”
“또라이?”
“그게 아니면 위기를 만들면서 우리를 도와 줄 이유가 없잖아. 더구나 뭐 재밌으니까?”
“나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이 상황에 재밌지는 않은데...”
민혁은 자신의 머릿속에 몇 가지 단서들이 있다고 판단했다. 진실을 알고 싶어서 단서들을 조합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사이즈가 다른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그 어색함이 불편했고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도대체 뭘까.
“그 애 말이 사실일까?”
“수영이?”
“응.”
“아휴... 아직까지 의심하는 거야?”
“의심이라기보다는... 상황이 그렇잖아. 그 애가 피해자였고, 영호라는 놈이 추행범이었는데... 우리에게 숨기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애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는 수영이에게 고마워해야 해. 내가 말은 안했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잖아?”
수영이를 의심하는 민혁에게 화가 난 서영이 톡 쏘며 말을 했다. 괜히 머쓱해진 민혁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했다.
“아... 아니... 내 말은... 조금... 아주 조금 이상하다 이거지. 그렇게 고통을 당했으면... 오히려 추행범이었던 영호를 세 번째 게임에서 탈락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5번 부부를 탈락시켜야 한다고 말했잖아.”
민혁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예를 들어, 강간당한 여자가 강간범을 옹호해주면 그것을 이상하게 쳐다볼 수 밖 에 없듯이, 피해자였던 수영이 추행범이었던 영호를 옹호한 것은 민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겠어. 이해가 안 될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수영이에게 더 고마워해야 해.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우리를 살려준 애야. 그리고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서 복수의 감정보다는 철저히 실리를 선택해준 아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5번 부부를 탈락자로 삼아야... 우리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으니까. 영호에게 적대감을 보이면... 괜히 1표씩 받아서 우리들 중 누군가는 탈락할 수도 있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
서영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민혁도 강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민혁이 말을 접지는 않았다.
“그... 그러니까... 다 알겠는데... 자기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수영이가 이런 표현을 했어. ‘도움을 받았잖아요’라는 말... 굳이 해야 했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민혁의 말에 서영이 잠시 뜸을 들였다. 기억을 되살려 보면, 수영이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내 생각은 당신 말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6번 부부와 함께 가야 한다라고 했다면... 이해가 되는데... 도움을 받았으니 도움을 줘야 한다라는 뉘앙스는... 뭔가 이상하다고...”
“그러니까 당신 말은 영호와 수영이가 손을 잡았다는 거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휴우... 자기는 지금 너무 민감해. 사실 처음부터 수영이를 믿을 생각도 안했지. 불쌍한 애야. 그리고 누구보다 착한 애야. 왜 같은 눈을 갖고 있으면서 그 아이의 착한 모습은 보지 못하는 거야.”
민혁의 의심이 계속되자 서영은 너무나 서운했다. 화도 나긴 했지만, 그보다 수영이를 믿는 자신의 믿음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남편인 민혁이 야속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수영이를 믿어.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하는 거야. 그렇게 알아!”
서영이 침대에 누운 채 몸을 돌렸다. 민혁은 서영이 화가 난 것을 알기에 굳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리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이 불안함이... 아무것도 아니어야 할 텐데...’
***
밤 10시가 조금 못 된 시간에 수영은 3번방을 나왔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은 로비의 좌측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각 방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생리현상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로비로 나와야만 했다.
“아이... 불편해.”
확실히 화장실이 외부에 있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생리현상을 참을 수가 없기에 수영은 화장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입구에서 한 남자와 마주쳤다. 영호였다.
“왔네?”
마치 수영과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영호가 말을 했다. 수영은 뜻밖의 장소에서 영호와 마주치자 매우 당황을 했다.
“당황하지 마. 하하.”
영호가 수영을 보며 웃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욱 수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황... 하지 않아요.”
“뭐... 간단히 말할게. 내 두 번째 조건 들어야지?”
영호의 말에 수영이 그때서야 조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직 영호의 조건을 하나 더 들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무엇이죠.”
“2시간 후면 12시... 즉, 자정이지. 이곳으로 와. 몰래... 혼자만... 알겠어?”
수영은 영호가 왜 자신을 그 늦은 시간에 불러내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왜요?”
“이유가 알고 싶어? 이유는 이미 알고 있잖아. 넌 내 조건을 들어줘야 하니까.”
반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영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수영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았어. 그리고 하나 더 말해주지. 내가 왜 이곳... 화장실 앞에서 수영이를 기다렸을까?”
수영은 영호의 질문 의도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훗. 간단하잖아. 너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화장실에 다 한 번씩 다녀갔는데... 넌 본적이 없었거든... 그것도 하루 종일... 그래서 자기 전에 올 것 같았지. 하하하. 급할 텐데... 들어가 봐. 그리고 조금 후에 보자고...”
말을 마친 영호가 수영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수영은 영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영은 영호가 아주 치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참여자들이 화장실까지 가는 것을 지켜보는 남자가 있다니... 이런 영호가 수영은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수영은 볼일을 보는 것도 잊은 채, 꽤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어야 했다.
***
영호는 자신의 뒤통수에서 따가움을 느껴야 했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수영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훗... 까라면 까야지. 지가 별 수 있겠어?’
영호는 2시간 후에 수영과 섹스를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묵직해짐을 느껴야 했다. 섹스도 섹스였지만 무엇보다 어린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은 영호의 자신감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사회에서도 게임 전에 어린 여자와 신체 접촉이 있으면, 반드시 일이 잘 풀렸으니...
‘그건 그렇고... 1번 부부나 한 번 가지고 놀아볼까... 민혁이라는 놈이 나오겠지? 후후. 그 놈은 조금 생각이 다른 것 같던데...’
영호는 치밀하게 참여자들을 관찰한 결과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1번 부부인 민혁과 서영의 관계가 생각보다 좋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몇 시간 전에는 다투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영호의 생각으로는 한 번쯤 장난을 쳐 볼 필요가 있었다.
‘서영이라는 여자는 수영을 믿는 건 같지만... 남편인 민혁이라는 남자는 꼭 그런 거 같지 않으니...’
통로 입구에 들어선 영호는 좌측 1번방으로 다가갔다. 문에 귀를 대고 있으니,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있음이 느껴진 영호는 오른손으로 문을 두들이며 노크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혁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렇지... 보통 이런 경우는 남자가 먼저 나오지.’
영호의 예상은 적중했다. 갑자기 나타난 영호의 모습에 민혁이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곧 차분히 영호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무슨 일입니까?”
민혁은 영호가 왜 자신의 부부를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말을 안 하시죠?”
영호는 민혁이 이해하기 힘들 행동을 했다. 찾아와서 노크를 하고서는 민혁을 바라보며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손을 민혁의 눈앞에 펼치며 이해못할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무... 무슨 짓입니까?”
민혁이 물었지만, 영호는 대답대신 자신의 손을 이용해서 처음에는 세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그리도 다섯 손가락을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여섯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그리고 민혁을 향해 씨익 웃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당한 민혁이 말을 잊은 채로, 멀어지는 영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야? 자기야?”
뒤늦게 서영이 민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서영도 영호가 왔다갔음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 왜 왔어?”
“나도 몰라. 그냥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갔어.”
“아무 말 없이?”
민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영은 민혁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영호의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진짜 또라이 아냐?”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
“응... 그냥 웃고 가던데...”
민혁은 서영에게 영호가 한 행동을 말해주지 않았다.
‘3번... 5번.... 6번인데.... 그것을 뜻한 것 같았는데... 우리를 탈락시킨다는 뜻인가?’
영호의 행동에 대한 민혁의 추측은 계속 되었지만, 완벽한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자신들 모르게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만 자자...”
서영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고, 민혁은 저 멀리서 6번방의 문을 열고 있는 영호를 쳐다보았다. 그때 영호가 고개를 돌려 민혁을 쳐다 본 후, 자신의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6번방으로 영호가 들어갔다.
“저... 새끼가... 씨발.”
영호의 도발을 본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서영은 듣지 못했다.
@ 43부에서 이어집니다.
자정이 되었고, 이제는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자정이라는 시간에는 잠에 빠져 있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섹스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바뀐 잠자리가 문제일 수도 있었고, 아침에 진행 될 3라운드 세 번째 게임이 신경이 쓰여 잠을 못 이룰 수도 있었다.
물론, 또 다른 이유로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영과 영호가 그러했다.
수영은 영호의 두 번째 조건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명진이 잠들기를 기다려 조심스레 방을 나와 영호가 지시한대로 자정이 약간 넘은 시간에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도착한 수영은 영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늦었네?”
“그게... 어쩔 수 없었어요.”
“몰래 나왔나 보지?”
수영을 본 영호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이죽이죽 웃고 있었다.
“남편이 깨기 전에... 일찍 가봐야 해요.”
수영은 1초라도 영호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야. 내가 왜 불렀을 것 같아?”
수영이 영호의 질문에 대답대신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물론, 수영 역시 영호가 무엇을 요구할지 짐작은 했지만, 굳이 입으로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알잖아? 얼굴에 다 쓰였네. 가볍게 섹스나 하고 가자. 알았지?”
영호는 돌려서 말하지 않았다. 수영을 보고 아주 쉽게 관계를 맺자고 했다. 수영은 막상 영호 입에서 ‘섹스’라는 말이 나오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늦은 시간에 남편 몰래 화장실에서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꼭 그래야 해요?”
“응. 꼭 그래야 해.”
수영은 영호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반지를 포기하면 그만이었지만, 명진이 준 결혼반지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사실 수영이 너랑 섹스를 하고 싶은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거든. 내가 원래 나보다 어린 여자와 섹스를 하게 되면... 일이 잘 풀려. 더구나 자정이 넘었으니... 세 번째 게임 당일이 되었단 말이야. 수영이 너랑 섹스를 해야만 운도 따르고 좋은 기운도 받을 것 같은데? 후훗.”
수영이 듣기에는 영호의 말은 비상식적이었다. 과격하게 표현을 하자면 그저 ‘미친 소리’일 뿐이었다.
“두 번째 조건이... 그거인가요?”
“그렇지.”
수영은 영호의 제안에서 벗어날 방법을 궁리했다. 그리고 금방 머릿속으로 영호보다 유리한 점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역시 서영 부부와 연합을 맺고 있다는 것이었다.
“꼭 해야 하나요? 취소 해주면... 저도 그에 대한 보답을 할게요.”
“보답?”
“네. 영호님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유리해요. 영호님은 탈락할 수도 있지요. 제가 서영 언니 부부를 설득해서 세 번째 게임에서는 영호님 부부를 꼭 4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영호와의 섹스를 피하기 위해서 수영이 제안을 했다. 그런 수영을 바라보며 영호는 재밌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왜 웃어요?”
“재밌으니까. 뭐... 내가 1번 부부와 직접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수영이 네 제안은 참 그렇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미 5번 부부를 탈락시켜야 한다라고 합의한 거 아니야?”
영호의 말에 순간 수영이 뜨끔했다.
“나 예리하지? 하하하. 물론, 너희들이 작정하고 나를 죽이려면 못할 것도 없겠지. 그런데 전제 조건은 투표권이 2개가 있을 때나 가능하지. 안 그래?”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부인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하나만 알아 둬. 수영이 부부나 1번 부부나 반드시 이 둘 중에서 피해자가 나올 거야. 결국 투표권은 하나지. 그 상황에서 나를 죽일 수 있을까? 하하하.”
수영이 보기에 영호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서영 언니 부부와 자신의 부부 중 피해자가 나온다고 장담을 하는 것일까. 수영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피해자가 반드시 나온다... 그걸 어떻게 알죠?”
“훗. 내가 알려줄 이유는 없는데...”
“속임수를 썼나요?”
수영은 영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수영은 영호가 무슨 속임수라도 써서 투표를 조작한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마술이지... 후훗.”
“설마?”
수영은 영호가 추행범을 결정하는 뽑기를 할 때, 뽑기 순서를 바꾸자며 치킨 박에게 요구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 서영이 반대 했었고, 수영은 이유는 몰랐지만, 서영의 의견에 따라 역시 반대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설마가 맞겠지.”
“솔직히 정확한 방법은 몰라요. 하지만... 저희가 막겠어요!”
“어떤 방법으로? 내가 무슨 방법을 쓰는지도 모르면서... 하하하.”
“알아 낼 거예요!”
수영이 비장한 각오로 말을 했다. 제법 심각한 분위기였지만, 영호는 수영과 달리 이 분위기가 너무나 유쾌했다. 재미를 떠나서 묘한 쾌감까지 느낄 정도로 즐거웠다. 아니, 행복했다. 무언가 죽어있던 자신이 살아나는 기분이랄까.
“무섭네. 하하. 좋아. 사실 내가 지금까지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어. 예정에도 없던 말까지 하다니... 나답지는 않아. 난 그저 섹스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이 상황이 너무나 재미있다 보니까... 입이 가벼워졌네,”
“.......”
“제안을 하지. 나랑 섹스를 하지 않아도 좋아. 그런데 말이야. 대신 가볍게 두 가지는 내 소원을 들어줘야겠어.”
수영은 대체 영호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 상황이 즐겁다는 영호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호가 어떤 제안을 할지 모르지만, 섹스를 피할 수 있다면 수영은 충분히 받아들일 각오가 있었다.
“그것이 뭐죠?”
“섹스는 안하는 대신... 첫째, 나에게 아름다운 키스를 해줄 걸. 이때 입을 떼고 나에게 기분 좋은 말을 해줘야 해. 쉽지?”
“키... 키스요?”
“왜 그렇게 놀라? 섹스보다 낫지 않아? 어찌 됐든, 난 수영이 너랑 신체 접촉은 해야 해. 행운을 가져가야 하니까. 하하하.”
수영은 잠시 고민을 했지만, 키스가 섹스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알았어요.”
“다시 말하지만, 입을 떼면 내가 기분 좋은 말을 해줘야 해.”
“무슨....”
“사랑해요. 좋아해요. 믿어요. 행운을 빌어요 등등. 많은 말들이 있잖아.”
수영은 진심 영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됐든, 영호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알겠어요. 두 번째는 무엇이죠?”
“두 번째는... 사실 이게 중요해. 내가 입방정을 떨어서 그런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거든. 나름 A 플랜이 있었는데, 수영이 너 때문인지 그게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슨 말인지 모르지? 그냥 들어. 훗. 내 두 번째 소원은.... 만약 수영이 네가.. 아니 너희 부부가 세 번째 게임에서 추행범이 된다면... 피해자를 1번 부부로 선택해 줘. 쉽지?”
말을 마친 영호가 수영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수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서영 언니가... 우리 쪽이 추행범이 되면 반드시 5번 부부나 6번 부부를 피해자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래야 우리가 표가 2개가 생긴다고...’
수영은 영호의 두 번째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영의 언질 때문이었다.
“그... 그건...”
“왜? 쉬운 결정 아닌가? 난 모든 것을 양보했는데? 예를 들어 수영이 네가 추행범이 되었고, 피해자를 1번 부부로 한다고 하더라도 수영이 너와 내가 5번 부부를 탈락시키면 되잖아? 안 그래?”
영호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지만, 수영은 내심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추행범으로 결정이 되면, 투표권을 2개 확보할 수 있어서 반드시 서영 부부와 함께 4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영호의 제안은 그 100% 확률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불리하잖아. 약간은 살길이 필요하지... 수영이 너라면 안 그럴 것 같아? 그리고 말이야. 꼭 너희 부부가 추행범으로 결정된다는 보장이 없잖아.”
영호의 말을 듣고서는 수영이 한참이나 고민을 했다. 그리고 결국 결정을 내렸다.
“조... 좋아요.”
“나도 약속하지. 수영이 네가 내 제안을 잘 따르면... 난 반지를 돌려 줄 거야.”
사실 영호 입장에서는 반지를 미끼로 반드시 5번 부부를 탈락시켜라는 제안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호는 그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스릴을 즐기고 싶었고, 무엇보다 3라운드의 결과가 궁금했다. 결과가 예정된 게임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었으니...
“그럼 빨리 키스나 하고 사라질까? 멘트는 준비 했어?”
영호가 수영을 바라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 영호를 바라보며 수영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질끈 눈을 감고 얼굴을 점점 앞으로 내밀었다.
쪽.
그리고 키스 같지 않은 입술과 입술이 만남이 이뤄졌다. 입술끼리의 만남이었지만, 오히려 뽀뽀라고 말해도 무방할 만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당신을 믿어요.”
약속대로 수영이 키스가 끝난 후 영호에게 말을 했다. 그리고 영호가 수영의 말에 답변했다.
“나도 수영이 너를 믿어.”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서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나눈 수영과 영호였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수영이었다.
“이... 이만 가볼게요.”
“좋아. 우리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거야. 그렇지?”
“지... 지킬게요.”
말을 마친 수영이 영호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멀어지는 수영을 바라보며 영호가 중얼거렸다.
“이거 복권이라도 사야 하나. 왜 이렇게 딱딱 들어맞지. 정말... 하하하.”
***
민혁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여러 의문들이 자신의 머리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한 번도 대화를 나누지 않은 영호가 자신을 농락하기까지 했다.
‘3번, 5번, 6번... 이게 무엇을 뜻하지?’
민혁은 영호가 자신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펼쳤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 말 없이 영호는 민혁에게 자신의 손으로 세 손가락, 다섯 손가락, 여섯 손가락을 보여주며 떠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를 탈락시키고... 그 세 팀이 4라운드에 진출한다는 것인데...’
민혁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결국 3번 부부인 수영 부부가 배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2라운드에서 한 번 배신을 당했던 경험에 의하면, 수영 부부를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수영 부부가 배신을 한다면... 굳이 영호라는 놈이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는데...’
무릇 배신이라는 뒤통수를 치는 행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3번 부부와 6번 부부가 손을 잡았다면, 굳이 6번 부부가 그 사실을 알릴 이유는 없었다. 그 점 때문에 민혁의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수영 부부도 믿을 수 없지만... 영호라는 놈도 믿을 수 없으니...’
민혁은 서영과 이 부분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열기가 쉽지가 않았다. 어차피 무조건 수영이를 믿으라고 할 것이었으니...
‘그렇게 당하고도.. 왜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무작정 믿는 거야.’
민혁은 서영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수영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사람을 믿는다니... 더구나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컴퍼니가 주관한 섹스게임이라는 곳에서... 사람을 믿는다? 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잠을 들 수도 없고... 미치겠네...’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던 민혁은 결국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씨발. 걸으면서 생각 좀 정리해야겠어.”
지하의 공간은 매우 넓은 편이었다. 민혁은 벽에 붙은 채로, 통로를 왔다갔다 걸어 다니며 수영과 영호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민혁의 발걸음은 로비로 향했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시계 방향으로 걸었던 민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을 지나 화장실을 지나게 되었다.
“오줌이나 쌀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이, 화장실에 오니 괜히 소변이 마려운 민혁이었다. 그래서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고, 이 순간 민혁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봤다.
‘뭐... 뭐야...’
황급히 민혁은 몸을 숨겼다. 그리고 벽에 기대서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영호와... 수영이... 키스하고 있었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민혁은 확실히 두 눈으로 영호와 수영이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민혁은 영호와 수영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뒤로 자빠질 뻔 할 정도로 매우 놀랐다.
- 당신을 믿어요.
- 나도 수영이 너를 믿어.
영호와 수영이 서로를 믿는다는 대화를 들은 민혁은 지금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엄연히 현실이었다.
‘그... 그래... 씨발... 처음부터 그랬던 거야’
민혁은 황급히 화장실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서영이 홀로 자고 있는 통로 좌측 1번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민혁은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호와 수영이 키스하며 대화를 나눈 것을 목격한 시점에서 민혁은 자신의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머릿속의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한 민혁이 방에 들어가기 전에 중얼거렸다.
“내가 이번에도 당할 것 같아? 씨발년...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영악한 년이었어. 씨발 좆같은 년. 내가 죽여 버릴 거야.”
@ 44부에서 이어집니다.
- 하하하. 이제 3라운드 마지막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아침이 밝았고, 치킨 박이 예정한대로 오전 8시에 3라운드 세 번째 게임이 진행되려고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게임 참여자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또한 아침 식사도 걸렸다. 유일하게 영호와 효진 부부만이 편안한 잠과 맛있는 식사를 하였을 뿐이었다.
- 간밤에 재밌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하하.
치킨 박의 말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민혁과 수영이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민혁은 서영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수영을 간간이 쏘아보았다.
‘참 뻔뻔한 얼굴이야... 아직도 언니 언니 그러고 있으니...’
민혁은 게임 시작 전, 수영이 자신의 아내인 서영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아침 인사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민혁은 그런 수영이 너무나 가증스러웠다. 지난 밤, 영호와 밀담을 하던 것을 확인하고서는 당장이라도 수영에게 달려가 그 점에 대해서 따지고 싶었다.
‘젠장...’
민혁은 아내인 서영에게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라고 보는 것이 마땅했다. 수영이 영호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서영이 믿어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민혁은 밤새 잠을 못 자고 세 번째 게임에 대한 고민을 했다. 4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 번째 게임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으로 불리하다... 불리한 것을 떠나서 위기 상황이야... 수영이 그 쌍년이 영호라는 놈과 손을 잡았으니...’
현재 민혁은 자신이 탈락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위기를 헤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음에는 영호와 수영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혁은 게임이 시작되기 전까지 참여자들을 관찰하고 또 고민했다. 그나마 민혁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5번 부부인 민석과 지민이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저들 부부는... 여전히 기도중이고... 기권을 할 가능성이 있지만... 마지막 게임에도 또 기권을 할 것 같지는 않고...’
민혁이 혼자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다른 부부들의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편이 되어야 할 서영과는 수영 부부에 대한 문제로 서먹했다. 물론, 탈락 위기 상황이 닥치면 결국 함께 해야 하는 부부였지만, 문제는 위기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기 힘들었다.
- 하하하. 세 번째 게임도 기막힌 결과가 있기를 바라며... 시작해 볼까요?
치킨 박이 자신의 앞에 있는 검은 상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공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빨간 공이었다.
- 마지막에는... 여자 분들이 추행범이 되는군요. 하하하.
앞서 두 번의 게임과는 다르게 마지막 게임에서는 여자가 추행범, 남자가 피해자가 되었다. 치킨 박의 뽑기에 의해서 여자가 추행범으로 결정이 되자,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영호가 희미한 미소를 내비쳤다.
‘확률적으로 세 번 연속 파란공이 나오기는 쉽지 않았겠지...’
영호는 모든 경우를 생각하며, 그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지난밤부터 기가 막힐 정도로 영호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수영을 화장실에 불러낸 것은 분명 섹스를 하고 싶은 영호의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어린 여자와의 신체접촉이 그동안 영호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일종의 징크스였기에 분명 이것도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영호는 하나의 생각을 더 했다.
‘낯선 공간에서 거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게임... 누가 편히 잘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잠자리까지 바뀌었으니... 누군가는 화장실을 찾을 수도 있겠지. 그 누가 보더라도 흔들릴 거야... 오해를 할 테니... 그러면 판은 뒤집어지고... 결과는 알 수 없겠지... 그러면 재밌잖아. 후훗.’
애초에 수영과의 섹스 시간을 1시간 정도로 생각했던 영호였지만,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낯선 움직임을 눈치 챘기에 수영과의 섹스를 과감히 포기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영호는 자신의 머리를 스쳐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수영에게 섹스를 포기하는 대신 또 다른 두 가지의 조건을 제안했던 것이었다.
‘내가 치킨 박이라면... 두 번은 허락하지는 않겠지. 한 번 정도야 게임 룰 허점을 이용해도 눈감아 주겠지만...’
영호는 모든 상황을 가정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비를 했다. 물론, 게임의 진행이 영호가 생각한대로 꼭 흘러갈 이유는 없었지만, 영호는 일종의 ‘촉’을 느꼈다. 무언가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지만, 마냥 생각한대로 현실이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실제로 현재까지도 영호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야구에서도 그러잖아. A 투수에게 상대 타율이 5할인 B 타자가 있지만, 감독은 가끔 B 타자를 제외하고 상대 타율 1 할인 C 타자를 대타로 선택하지. 그리고 그 C 타자는 A 투수에게 홈런을 쳐내고... 확률을 무시한 일종의 감이랄까’
영호는 추행범이 여자가 될 수 있다고 예상했고, 또한 그것이 세 번째 게임에서 현실이 되었다.
- 마지막 게임의 추행범 뽑기를 하겠습니다. 여자분들 모두 나와 주시고... 뭐, 뽑는 순서에 불만이 있으신 분 있습니까?
“제가... 먼저 뽑으면 안 될까요?”
치킨 박의 말에 영호의 아내인 효진이 손을 들었다. 효진은 영호와 마찬가지로 쪽지를 바꿔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영호로부터 수 십 번 반복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다.
- 다른 분들 반대 없습니까?
세 번째 게임의 추행범 뽑기를 또 다시 6번부터 시작한다고 했지만, 서영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반대는 없었다. 서영은 어차피 자신과 수영 부부가 한 팀이기에 누가 먼저 추행범 뽑기를 하든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 하하하. 반대가 없으니... 효진님부터 하시면 됩니다. 대신 이 점은 말씀 드리고 싶군요. 하하하. 세 번째 게임의 추행범 뽑기의 쪽지는 앞서 두 게임과 다릅니다. 하하하. 누가 장난을 하는 것 같아서... 종이를 좀 바꿔 보았습니다.
치킨 박의 말과 동시에 효진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지만, 영호가 그녀를 안심시키는 듯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효진을 바라보며 웃으며 조용히 말을 했다.
“그냥 뽑아.”
효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컴퍼니 직원이 들고 있는 검은 상자로 다가갔다. 영호는 쪽지의 종이를 바꿨다는 치킨 박의 말에 약간의 쓴 웃음 지으며 다음 상황을 가정하기 시작했다.
‘설마 했지만... 역시 치킨 박... 나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그건 그렇고 수영이라는 애가 추행범이 된다면, 내가 제안한 대로 1번 부부인 민혁을 피해자로 만들어야겠지... 과연 그대로 될 수 있을까. 물론, 내 아내가 추행범이 되면 고민할 가치도 없지만...’
지난 밤 수영에게 반지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영호가 제안한 내용이었다. 물론, 수영이 추행범이 되지 않으면 말짱 황이 되는 것이었지만, 만약 정말로 수영이 추행범이 된다면 영호의 제안은 대마를 잡는 신의 한 수가 될 것이었다.
- 다음은 지민님.... 이번에는 수영님.... 네... 마지막으로 서영님... 하하하. 자, 모든 여자 분들이 뽑기를 마치셨습니다.
채 1분도 되지 않아 네 사람의 여자들이 추행범 뽑기를 마쳤고, 이제는 참여자들 모두가 각자의 방에 들어가 대기해야 했다. 여자들은 자신이 뽑은 쪽지를 확인하면 될 것이었고, 남자들은 나체의 상태로 침대에 묶여 있어야 했다. 물론, 눈도 가려져야 할 것이었다.
- 이번에는 남자 분들이 고생을 하겠군요. 하하하. 자, 각자의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여자 분들은 쪽지를 확인하시고 추행범으로 결정 된 여자 분은 피해자를 선정하여 1시간동안 추행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하하하.
치킨 박의 말이 끝나고 각 참여자가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중에 추행범으로 결정이 될 수 있는 모든 여자들은 쪽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가했다. 아무래도 마지막 게임이라 긴장이 되는 듯 했다.
“걱정 마.”
“언니도요. 잘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