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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일요일에 혜인이어머니가 혜인이랑 찾아왔다. 혜인이어머니는 지은이가 쓰던 방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지은이 사진이랑 그런 것들은 버리지 않고 따로 챙겼다. 그리고 방을 깨끗이 치우자 마자 곧, 혜인이가 앞으로 쓸 장롱이랑 침대 등이 배달되었다. 두 사람이 오면서 가구점에 먼저 들렀던 모양이었다. 

“ 저기, 진우씨… 침대는 어차피 둘이 같이 써야 될 것 같아 킹사이즈로 하나 보려다가 나중에… 그래도 돼죠? 그리고 이건 그냥 혜인이방에 하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나 샀어요. ”

혜인이어머니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남자, 여자가 같이 사는데 따로 각방 쓰는 것도 아니고 잠을 따로 잘 이유가 없었지만 혜인이가 자신의 딸이고 아직 여고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벌써 같이 잔 사이란 걸 아직도 모르는 혜인이어머니는 그렇게 말을 하며 혜인이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 오빠, 엄마는 내가 필요없대도 자꾸만…… ”
“ 네에, 잘하셨네요. ”
“ 몰라, 오빠… ”

내가 자신의 엄마 편을 들어주자 삐진 듯 혜인이의 작은 입술이 조금 튀어나왔다. 아마 그런 문제로 벌써 엄마랑 다투었나 보다. 그러나 혜인이는 금방 풀어졌다. 그것은 전에 없던 게 하나 생겼기 때문이었다. 작은 화장대였는데 타원형의 예쁜 거울이 달려 있었다. 그걸 보고 혜인이가 너무 좋아했다. 신이 나는지 귀엽고 자그마한 입에서 웃음이 떨어질 줄 몰랐다. 아마도 그것은 엄마가 이젠 혜인이를 성인으로 어엿한 인정해주는 의미가 있었다. 빨리 어른이 돼 봐야 좋은 게 하나도 없는데, 잘은 몰라도 그런 의미에서 혜인이가 신이 나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난 혜인의 마음이 풀어진 걸 보고 조용히 내방으로 불렀다. 

“ 혜인아, 우리가 매일 같이 자는 건 절대 안 된다. 알았지… ”
“ 네에? 그럼 우리 잠을 따로따로 자요? ”
“ 아니, 내 말은 잠은 같이 자도 되는데, 그건? ”
“ 아…! 네, 알겠어요. ”
“ 혜인이 넌 공부해야 하잖아… 그리고, 그러고 학교가면 다 표시가 날 텐데 친구들이라도 알아 봐? ”
“ 네에, 오빠… 그렇게 할게요. ”
“ 그건 토요일이나 일요일만 하는 거다. ”
“ 네에… ”

이제 이렇게 됐으니 아파트 주위의 이웃들은 아마 나와 혜인이를 보면 대충은 알 것이다. 얼마 전에 동생이 죽었는데 또 다른 동생은 아닐 테고, 그럼 우리 사이를 쉽게 눈치 챌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혜인이 학교에까지 소문이 나면 안 좋을 것 같았다. 알 땐 알더라도 일단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학교에서 모르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면 안될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혜인이 학교문제가 가장 큰 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다면, 그래도 혜인이가 학교에서 짤릴 일은 없겠지만 소문이라도 나면 안 좋을 것이고 더구나 여고생이 남자랑 동거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었다. 내가 혜인이랑 그런 얘기를 하는 동안 혜인이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방이랑 가구를 쓸고 닦으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 혜인아, 그리고 학교엔 절대 비밀로 하는 거다. 알지? ”
“ 네에… 그럼 친구들도 못 데려와요? ”
“ 아니, 혜인이가 믿는 친구들은 데려와도 되겠지… 입이 무거운 친구만… ”
“ 오빤… 그럼 이제 친구들 전부 입에 돌이라도 달아 놔야겠다. 무겁게… 호호호… ”
“ 핫핫하핫… 그리고 밥이나 집안 일은 오빠가 다할게… ”
“ 안돼요. 그런 건 제가 다 할 거예요. 오빠는 그냥 취직할 준비나 하세요. ”
“ 지금은 나도 놀고 그렇지만 나중에 바쁠 땐… 그럼 같이 하자… 그리고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기하고… ” 

이제 혜인이 짐만 챙겨서 들어 오면 되는 것이었다. 
다음날, 혜인이가 학교에 간 사이 혜인이의 물건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혜인이어머니가 왔다. 

“ 혜인이는요? ”
“ 응, 학교에 나중에 이리로 올 거야… ”
“ 네에…… ”
“ 진우씨, 이제 우리혜인이 잘 부탁해… ”
“ 네…! ”

그녀는 혜인이의 방을 더욱 아담하게 꾸며 놓았다. 이제 혜인이는 학교갔다가 여기로 오면 되는 거였다. 이렇게 해서 나와 여고생인 혜인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좀 걱정이 되었다. 아직 난 직장도 없고 생활비는 도움을 받았지만, 난 조금 더 있다가 취직이라도 하고 혜인이와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혜인이어머니와의 관계를 좀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 

저녁에 혜인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고 그리고 혜인이아버지도 퇴근하고 여기로 왔다. 물론 저녁준비는 혜인이어머니가 다했다. 혜인이는 옆에서 엄마가 하는 것을 도와주며, 그리고 이젠 하나라도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일 당장부터는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밥 같은 건 해야만 하기에 조금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혜인이의 방에 둘러앉아 커피를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혜인아, 너 이제 하고 싶은데로 다 됐으니… 말 안 듣고 말썽 부리면 절대 안 된다… ”
“ 네에… ”

아무래도 혜인이아버지는 어린 혜인이가 걱정인 모양이었다. 

“ 걱정마세요. 제가 많이 도와 줄게요. ”
“ 그래 이젠 난 자네만 믿네… ”

그 때 거실에서 전화가 벨이 울렸다. 

“ 엉? 누구지? ”

난 밖으로 나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여보세요? 응, 나야 김 진우씨… ”
“ 아, 이 과장님… 안녕하시죠? ”

그는 전에 다니던 회사의 과장이다. 전에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나올 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나와버렸기에 더욱 반가웠다. 

“ 나 출장간 새에 그랬더군… ”
“ 네에 사정이 있어서요. ”
“ 그래, 요즘은 뭐하고 지내? ”
“ 그냥… ”
“ 그럼, 나 좀 도와주라… 나 요즘 미치겠어. 자네가 나가 버리고 나서 어렵게 공사 하나 땄는데… 어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 야지… 젠장… ”
“ 네에? 사람 많잖아요? ”
“ 사람이 많으면 뭐해 전부다 그 쪽 전공도 아니고 중요한 실무경험도 전무한데… 그 때문에 아주 죽겠어… 뭐가 통해야 말이지… 못해 먹겠어. ”
“ 뭔데요? ”
“ 응, 호텔 쪽…… ”
“ 그 쪽은 손 잘 안대잖아요? ”

“ 요즘 경기가 안 좋잖아… 그래서 처음으로 시작한 건데… 이번 프로젝트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람은 많이 끌어 모아 났는데, 일이 순서가 있어 야지… 우리 일을 중구난방 한다고 되나… ”
“ 네에, 그렇쵸. ”
“ 그래도 자네 같은 사람이 있어야 모두 제 위치에서 신나게 돌아가는데… ”
“ 네에… ”
“ 그래서 말인데 자네 다른 일 없으면 나 좀 도와줘… 자네가 와서 공사현장 관리 좀 해줘. ”
“ 그러죠, 뭐… ”
“ 대우는 전에 그대로 해줄게. 아니 이젠 더 올려 줘야지… ”
“ 저야 할 일도 없는데요, 뭐… 그렇게 할게요. ”
“ 그럼 내일부터라도 나와 줄 수 있어? ”
“ 네에, 내일 당장이요? ”
“ 응, 난 한 시가 급해. 공사완공 날짜는 다가오지, 일은 진척이 안되고 위에선 뭐하냐고 난리고… ”
“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
“ 그럼, 내일 봐. ”
“ 네, 들어가세요. ”


말하는 게 요즘 회사 사정이 영 안 좋은 가 보다. 그리고 많이 바쁘고, 전화를 끊고 나자 혜인이가 가만히 옆에 앉아 얘기를 듣고 있다가 궁금한 듯 물었다. 

“ 오빠, 누구 전화야? ”
“ 으응, 전에 다니던 회사인데 나보고 다시 나오라네… ”
“ 와! 정말? ”
“ 응… ”
“ 정말 잘됐다. 그럼, 오빠 이제 취직된 거네. ”

그러자 혜인이어머니, 그녀가 먼저 나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 축하해요. 진우씨 실력 대단한가 봐? ”
“ 오빠, 축하해요. ”
“ 하하하하. 혜인이가 자네에겐 복 덩어리인가 봐. 혜인이가 오자마자 자네에게 제일 좋은 일도 생기고… ”
“ 네에, 정말 그런 것 같아요. ”

난 멋쩍게 웃으며 혜인이를 더욱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혜인이 아버지의 전화였다. 

“ 어머? 이번엔 아빠…? ”

그러자 혜인이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 받아 봐요. 당신도 좋은 일인지 모르잖아요. ”

그런데 그는 전화받는 표정이 조금 심각했다. 아마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나더니 우리를 보며 혜인이어머니에게 말했다. 

“ 여보 나 또 구미공장 내려 가 봐야 겠어… ”
“ 네? 또요? ”
“ 응, 라인에 또 문제가 있나 봐. ”
“ 언제 갈 건데요? ”
“ 응, 지금 당장에 가야하는데… 어쩌지… ”

그러면서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와 혜인이는 괜찮다면서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 저희는 괜찮아요.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
“ 며칠 걸리실 거죠? ”
“ 응, 늘 그렇잖아… ”

아마도 혜인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자주 그런 일이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잠시 후, 혜인이 아버지랑 그녀가 같이 방에서 나가더니 둘이서 잠깐 얘기를 했다. 그리고 혜인이아버지는 바로 구미로 출발하려는 것 같았다. 

“ 그럼 그렇게 할게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
“ 다녀오세요. ”

우리도 밖으로 나와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혜인이의 방으로 들어왔다. 

“ 많이 바쁘신가 봐요? ”
“ 저이는 늘 그래요. 톡 하면 출장 이죠, 뭐… 진우씨… ”
“ 근데 엄마는… 아직도 우리 오빠에게 진우씨야… 장래 사윗감한테… ”

혜인이가 이상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이 말했다. 

“ 그럼 뭐라고 불러? ”
“ 있잖아, 김 서방… ”
“ 얘가? 정말 징그럽게 김 서방이 뭐니? 젊은 엄마 보고… ”
“ 엄마, 한번만 불러 보세요. 제발… ”

혜인이의 재촉에 그녀가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 얘도 참? 그래 아무튼, 김 서방! 축하하네… 이젠 됐니? ”
“ 호호호… ”

그러자 혜인이는 됐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고마워요, 장… 장모님… ”

나도 재밌어 하며 그녀에게 장모라 불러 보았다. 나도 아직 어리고 그녀도 아직 그런 말 듣긴 너무 젊었다. 이제 겨우 사십 초반인데 장모라니 어색하기만 했다. 우리가 갑자기 그렇게 말을 더듬거리자 혜인이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 뭐야? 이거 두 사람 왜 그래… 너무 어색해… 그만해요. ”
“ 지가 먼저 시작해 놓고… 그렇쵸? 장모님… 우리 기분도 좋은 데 가볍게 한잔 어때요? ”
“ 나야 좋지. 이 보게 사위 그럼 우리 한잔 할까… 호호호호… ”
“ 핫핫하핫… ”

난 그녀에게 애교를 떨었다. 그녀도 가볍게 맞받아 치고, 그러자 혜인이는 자기만 왕따시킨다고 난리였다. 

“ 뭐야, 정말… 나만 웬 왕따? ”
“ 그러길래 왜 가만있는 엄말, 왜 건드리니… ”
“ 핫핫하핫… 그럼, 혜인이도 같이 한 잔 할래? ”
“ 이씨! 열받아… 나도 줘요, 나도 마실 거야… ”
“ 하하하, 제가 나가 사 올게요. ”
“ 그래요. 그럼… ”

난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 상가에 있는 수퍼로 향했다. 장모와 사위, 살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젠 우리가 더 이상 그러면 절대 안 되는 관계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녀에게 장모라고 하니까 더욱 기분이 야릇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