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배신의 낮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는 19금 야소설 『은방울꽃의 비밀스러운 고민』 밖의 사람이라고 해야겠지.
수능이 끝난 고3의 신분으로 침대에 눌러앉은 지 62일 차.
하고 싶은 게임, 보고 싶던 웹툰, 쌓여있는 소설.
전부 다 끝내고 나니 62일째 아침부터는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아침밥만 먹고 잠들었던 것 같다.
아마도 대충 24시간 정도?
그런데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소설 『은방울꽃의 비밀스러운 고민』 속 엑스트라, 로즈 나이트가 되어서.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소설을 여러 번 읽다 보니 이런 상황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알 수 있었다.
‘빙의’.
그래,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빙의물이라고 얘기했다.
나는 수능을 막 끝낸 대한민국의 고3이었고, 로즈 나이트는 내가 읽던 소설 속의 인물이었으니 그보다 더 정확하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빙의든 뭐든 내 정신을 날아가게 하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엑스트라 ‘로즈 나이트’는 새드 엔딩도 아니고 배드 엔딩으로 소설 속에서 퇴장했다는 점이다.
제 외모를 십분 활용하여 열연을 펼친 여자 주인공에게 넘어간 남자 주인공들 중에는 로즈 나이트의 약혼자, 헤일로 카르트 공자가 있었다.
때문에 데이지 퀴니와 헤일로 카르트, 두 사람의 스캔들이 터지자 모든 귀족들은 로즈 나이트를 웃음거리 삼아 입을 놀렸다.
그녀의 명예와 사교계 평판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일주일 걸렸다던가.
장담하건대, 로즈 나이트라는 이름이 그 지경이 되도록 씹어댄 이들 중 대다수가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원래도 유약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그 일로 크게 상처 입고 제대로 된 항변 한번 하지 못한 채 사교계에서 얼굴을 감췄다.
그 사태에서 그녀의 잘못을 굳이 꼽는다면 헤일로 카르트를 사랑한 죄밖에 더 없을 텐데도 그녀는 그 모든 여파를 받아내야만 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인물인지.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데이지 퀴니, 여자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로즈 나이트를 곱게 보내주지 않았던 것이다.
저에게 빠져 반쯤 미쳐있던 마법사에게 로즈 나이트의 얼굴을 망가뜨리면 함께 밤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내걸어 로즈 나이트의 퇴장을 다시없는 지옥길로 안배했다.
로즈 나이트.
나이트 가문의 2남 1녀 중 막내.
위의 오빠들과 각각 다섯 살, 일곱 살의 터울이 있는 그녀는 사랑받는 막내딸이었다.
보는 순간 누구라도 그녀의 이름을 알아차릴 정도로 장미를 형상화한 듯 붉은 머리카락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화려한 미녀.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 역시도 장미를 닮은 그녀를 더더욱 부각시켰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첫인상이 ‘도도한 후작 영애’라는 이미지.
그러나 의외로 실제 성격은 낯을 많이 가리고 수줍음이 많다.
그 외모와 신분 때문에라도 그녀에게 접근할 영식은 많았을 테지만, 늘 옆을 지키는 두 오빠들이 로즈를 걱정해 싸고돌다 보니 결국 로즈는 단 한 번도 또래의 영식들과 둘만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집안에서 맺어준 혼약자, 헤일로 카르트가 그녀 인생에서 거의 유일한 남자였다.
그러니 로즈 나이트가 헤일로 카르트를 남몰래 좋아하기 시작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거란 이야기다.
다만 그게 로즈 나이트의 불행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 문제였을 뿐.
내가 읽었던 『은방울꽃의 비밀스러운 고민』은 요즘 대세인 역하렘 키워드에 여러 남주들의 (몸으로 하는) 고백과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한) 스토리로 이루어진 그런 소설이다.
예쁘고 마음씨 착한 (척하는) 여자 주인공에게 빠진 남자 주인공들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몸으로 하는) 구애를 하는 그런 소설 말이다.
19금답게 소설의 주배경이 되는 제국부터가 이미 성적으로 개방과 문란 사이를 넘나드는 곳이었다.
제국은 노예제가 폐지되어 더 이상 노예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그 대우는 노예보다 조금 더 나아진, ‘클로버’라고 불리는 이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제국의 모든 귀족은 성교육을 목적으로 결혼 전까지 최소 한 명의 클로버를 두고 성(性)에 대해 배웠으며, 결혼 전에 순결을 유지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굳이 표현하자면 함께 밤을 보낼 이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던가?
그런 세계에서 로즈 나이트는 드물게 순결을 지켜왔다.
가문 간의 약속으로 맺어진 약혼이었음에도, 헤일로 카르트가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다정한 말을 건네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약혼자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클로버마저도 두지 않고 헤일로 카르트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헤일로가 그런 그녀에게 돌려준 것은 약혼자 간수도 못 하는 영애라는 명예와, 집안 간의 계약(약혼)마저도 지킬 능력이 없는 가문이라는 위신, 마지막으로 그때껏 순결을 지켰을 정도로 매력 없는 영애라는 비하였다.
그 모든 소문에 시달렸을 로즈 나이트가 그 이후로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살아갔단 것도 이해가 된다.
유약한 내면 탓에 안 그래도 인간관계가 좁은 로즈 나이트가 가족 다음으로 믿었던 존재인 약혼자 때문에 그 모든 일을 겪게 되다니, 배신도 그런 배신이 없었다.
‘화병으로 드러눕지 않고 어떻게 버텨?’
그러나 로즈 나이트의 끝은 거기서 맺어지지 않았다.
미친 마법사가 로즈 나이트에게 정확히 어떤 짓을 했는지는 서술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곱게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얼굴을 망쳐달라는 부탁을 왜 굳이 마법사에게 했을까?
절대 로즈 나이트를 편하게 보내주지 않겠다는 심보였겠지.
로즈 나이트가 마법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과연 데이지 퀴니가 전혀 하지 않았을까?
눈을 뜬 직후부터 그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문도 걸어 잠그고, 아침, 점심, 저녁 식사마저 거부하면서.
침대 옆에 놓여있던 물 주전자 하나로 하루를 버티면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나마 로즈 나이트의 기억이 드문드문 남아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정말로 뭘 해야 할지 막막했을 테니까.
고픈 배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에 지쳐 쓰러지듯 잠들었다 일어나니 복잡하던 머리가 조금은 편해졌다.
나고 자란 이래로 늘 그랬듯 평화로운 주변 풍경이 주는 안정감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게 실감이 난 탓일 수도 있고.
비교적 가벼워진 마음으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헤일로 카르트와의 약혼을 파기하는 것.
그리고 데이지 퀴니와 최소한의 관계를 유지할 것.
쉽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그보다 확실한 방법도 없다.
어차피 데이지 퀴니는 이미 헤일로 카르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을 거다.
헤일로 카르트와 데이지 퀴니의 접점이 2주 뒤에 있을 황실 연회라는 것, 그날 데이지 퀴니의 드레스 코드가 헤일로 카르트를 겨냥했다는 것만 떠올려 봐도 확실했다.
데이지 퀴니가 나를 방해물로 인식하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 첫발은 헤일로 카르트와 약혼을 파기하는 것일 테고, 그 뒤부터는 데이지 퀴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겠지.
하필 내 취향이 속 시원한 사이다 물이다 보니 하나같이 로즈 나이트 같은 고전적인 여주인공보다는 쟁취적이고 욕심 많은 데이지 퀴니 같은 여주인공들 위주의 소설이었다.
그중에서도 최애캐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데이지 퀴니였는데, 유일하게 여주인공에게 몰입 못 했던 부분이 로즈 나이트를 끝까지 쫓아가 괴롭히는 장면이었다.
정확히는 ‘굳이 왜?’하는 느낌이었지.
내가 이렇게 빙의할 줄 알았으면 성녀처럼 착한 여주인공들이 나오는 것만 봤을 텐데.
왜 내 취향은 그 모양이었을까.
그러나 후회는 늦었다.
데이지 퀴니의 가문이든, 데이지 퀴니 근처를 맴돌던 남주들 신분이든 하나같이 후작가 뺨쳤다.
공작, 황실 기사단장, 마탑주, 심지어 옆 나라 황자까지, 후작가는 그 사이에 껴봤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었을 터다.
정면으로 싸우든 기습을 하든 결국 싸움이 일어나면 나와 내 가문만 손해를 볼 게 틀림없다는 거다.
그러니 일단은 약혼부터 파기해야지.
조금 초조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으려니 시녀 가넷이 내 앞자리에 과일차를 놓았다.
“아가씨는 그분을 뵐 때마다 늘 긴장하시네요.”
첫사랑에 빠진 동생을 보는 듯한 눈이 나를 향했다.
…그런 거 아닌데.
긴장한 것은 맞지만, 그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직전의 그 몽글몽글함 따위랑은 비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지금.
“아가씨의 마음을 그분도 아셔야 할 텐데.”
“…모르진 않을걸……?”
로즈 나이트는 모를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물론 헤일로 카르트와 데이지 퀴니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짙은 느낌이었을 뿐, 확실하게 언급한 적은 없다.
그러니 모르고 있었을 거다, 쪽이 더 마음 편하겠지……?
“어머, 벌써 마차가 정문을 통과한 것 같아요.
오늘도 마중을 나가실 건가요, 아가씨?”
가넷의 마지막 말은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내 대답을 들은 것처럼 양산을 챙기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아연하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로즈 나이트, 너 정말 참사랑이었구나.
양산까지 쓰고 현관 밖에서 마중하다니, 얼마나 대단한 정성인지.
“아니, 오늘은 안 가.”
“…네에?정말, 정말요, 아가씨?”
양산을 든 채 굳어버린 가넷은 끼기긱 소리가 날 것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진심이세요, 아가씨?
하며 눈으로 한 번 더 물은 가넷이 내 단호한 끄덕임에 양산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나 방금 제 눈으로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다시금 내게 물었다.
정말 안 나가실 거예요?
“안 나가, 정말로.집사가 여기로 안내하겠지.”
“물론, 그렇겠지만…….”
가넷은 여전히 내 변화가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로즈 나이트의 짝사랑을 3년째 지켜봐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 다른 차가 마시고 싶어.”
“앗, 네네, 무슨 차로 드릴까요?”
허브티 종류로 아무거나.
긴장으로 굳어진 손가락을 애써 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느낌이 들어 손으로 살짝 문질러 봤지만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명랑히 대꾸한 가넷이 자리를 비웠다.
헤일로 카르트는 어디쯤 왔을까.
현관에는 도착했겠지?
집사가 잘 안내하고 있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 순간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헤일로 카르트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집사의 목소리였다.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턴 실전이었다.
나는 이렇게나 심란한데, 그 모든 원인인 헤일로 카르트 공자는 내가 그 앞에 앉아 무슨 표정을 짓고 있든 전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차만 홀짝이고 있었다.
“…….”
“…….”
우리 둘 사이를 감싼 침묵이 10분 동안 이어졌을 때, 가넷이 입에 대어보진 않았지만 식었을 게 분명한 차를 다시 우려내기 위해 다가왔다.
차분한 손놀림으로 차를 새 잔에 따라놓고 총총 자리를 옮긴 가넷은 내 맞은편, 응접실 문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제발 뭐든 해보세요, 아가씨.’
하는 얼굴이 계속 내 시선을 잡았다.
그렇지만 이건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내’기억이 설마 그를 보자마자 전부 떠오를 줄이야.
머릿속이 두 사람분의 기억을 정리하려 노력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었다.
하아, 인생 한번 어렵네, 정말.
분명 어제까지, 아니 당장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빙의자’라는 가정에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었다.
‘로즈 나이트’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사고 방식 대부분은 현대 세계의 그것과 닮아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헤일로 카르트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몸이 반사적으로 긴장하며 얼굴에 열이 올랐다.
마치 헤일로 카르트를 짝사랑하던 ‘나’처럼.
‘……!’
머릿속으로 ‘로즈 나이트’, 이제는 나의 기억이 또 한 번 물밀듯이 흘러나왔다.
막아뒀던 댐을 열어젖힌 듯, 심란한 머릿속을 뒤집는다.
기억의 홍수에서 나는 그 모든 기억의 공통점으로 익숙한 얼굴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로즈 나이트’가 바라보던 헤일로 카르트였다.
하나를 떠올리기 시작하니 점점 더 많은 기억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그것도 헤일로 카르트, 그와 관련된 기억들 위주로만.
어느 파티를 가도 나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곁을 비우지 않았던 오라버니들.
그 때문에 가족들에게 말고는 춤 신청 한 번 받지 못한 나였다.
그 시절에는 내가 매력이 없는 탓이라고 믿으며 주눅 들어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사람이 그였다.
함께 춤춰 주시겠습니까?
하며 예의 있게 물어오던 목소리.
다정하진 않았지만, 배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많지 않아도 심성은 따뜻한 사람일 거라고 믿으며 마음에 품었던 사람.
그래서 ‘나’는 헤일로 카르트를 사랑했다.
“아…….”
아연한 기분에 짧게 신음을 흘리자 딱딱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모르던 가넷도, 차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헤일로 카르트 공자도 내게 시선을 돌렸다.
마치 내가 이 침묵을 깨뜨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시선이 마주치자 무심결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슴 어딘가에서 두근대는 고동이 느껴진 탓이었다.
애써 부정하고 있던 감정을 다시금 인식시키려는 듯이 격렬하게.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로즈 나이트가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저절로 나를 짝사랑 중인 수줍은 영애로 변화시켰다.
아까 전부터 식을 줄 모르는 볼과, 멈추지 않는 심장 소리가 그 증거였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저 무심한 시선마저도 나를 향한 걱정을 담고 있는 것만 같으니, 로즈 나이트는 정말 참사랑에 빠져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로즈 나이트가 이제는 나다, 하하.
이 갈대 같은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 모르겠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전투력 넘치게 ‘할 수 있다!해야 한다!’를 외치고 있었는데, 왜 지금은 내 마음속은 ‘할 수 없다!못 하겠어!’인 걸까.
울고 싶은 기분에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힘든 하루였어, 정말로…….”
오늘 한 일이라곤 헤일로 카르트를 만나는 것뿐이었지만, 그 1시간의 티타임이 내게는 다시없을 가시방석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아가씨는 최고예요!’
하며 추켜 세워주던 가넷마저도 마지막 즈음에는 ‘이게 아닌데…….’
하는 얼굴을 했으니 분명하다.
오늘의 만남은 어떤 말로도 포장할 수 없는 환장의 티타임이었다.
그 와중에도 목적을 달성하고자 소심한 한마디를 꺼내긴 했으니… 그나마 다행일까.
아니, 관심 한번 받아보려 애쓰는 것처럼 비쳐졌을 수도 있겠다.
내 얼굴 근육이 그렇게 자유분방한지 오늘 처음 알았지 뭐야…….
분명 사랑에 빠진 표정이 여과 없이 드러났을 터다.
…어찌 됐든 오늘의 만남이 내 무덤을 반쯤 팠다는 건 부정할 수 없군.
하하, 묏자리가 참 아늑하겠는걸?
“아가씨…….”
내 잠자리를 봐주던 가넷이 내 중얼거림을 듣고 아련한 얼굴을 했다.
가넷마저도 내 묏자리가 얼마나 포근한지 알아버린 눈치였다.
뭐라 위로를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던 가넷이 어색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괜찮을 거예요, 아가씨.”
“정말?”
“…아마……?”
…어째서 바로 의문형인 거야?
되묻자마자 흐린 얼굴을 하던 가넷은 결국 나를 외면하고 말았다.
물론 내가 생각해도 정말, 정말정말 아니긴 했지만!
…정말정말정말, 아니었지마안…….
“…나, 어때 보였어?”
이제는 아예 입을 열지 않는다.
예의 그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어.’
하는 미소로 대답을 얼버무린 그녀는 짧은 밤 인사만을 남긴 채 후다닥 자리를 떴다.
나에게 남은 것은 내 묏자리만큼이나 폭신할 침구였다.
가넷이 정리해 준 침구에 몸을 누이니 낮의 그 상황이 머릿속에 계속 반복됐다.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나, 식을 줄 모르던 얼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대던 심장.
…어떻게 떠올려 봐도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
평소의 로즈 나이트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오늘 일로 확실히 알았는데, 나는 연애 고자인 것 같아.
이제라도 알아서 참 다행이지 뭐야, 아하하, 하하.
생전 처음 겪어보는 감정에 폭주한 머릿속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결국 저것이다.
가넷마저도 포용해 주지 못하는 흑역사가 탄생해 버린 순간이었다.
그것도 헤일로 카르트, 짝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으으으.
신음처럼 비명을 지르며 발에 차이는 이불을 발로 퍽퍽 밟았다.
그 와중에도 침구가 고급이면 발이 하나도 안 쓸린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나에게 위로를…….
* * *
어제는 흑역사를 곱씹느라 정신 못 차리고 해롱해롱댔지만 다음 날인 오늘부터는 다시 계획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흑역사를 생성했든 말든 이번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 달성 여부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해도, 그가 다른 선약 때문에 자리를 떠나기 직전에 파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슬쩍 돌려 물은 게 다긴 했지만.
어쨌든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라고!
별다른 사심 없이 묻는 척했지만 내가 명백히 파혼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물었다는 걸 그 눈치에 모를 리 없을 테니까.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대충 전달됐을 거란 의미다.
의외인 것은 그 발언에 대해 그가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내 예상 속의 그는 나의 발언에 대해 별달리 깊게 생각하지 않고 상투적인 말을 던질 터였다.
예를 들면, ‘가문 간의 위신이 걸린 문제라 쉽게 대답하기 어렵군요.’
같은 일말의 여지도 없지만 충분히 예의를 차린 모법 답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는 답을 남기곤 자리를 떠났다.
물론 이야기가 그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은 예상과 똑같은 반응이었지만, 나는 그가 내게 일말의 의문을 가졌다는 게 신기했다.
음, 헤일로 카르트도 인간인데 그런 게 가끔 궁금할 수도 있지,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건가?
아, 아니면 저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훤히 보이는 수를 쓰지, 하는 생각으로 물었을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내 안의 헤일로 카르트의 이미지가 그닥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 앞에만 서면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굴면서, 조금 떨어졌다고 이렇게 이성적으로 보고 있는 나도 이상하지만.
“카모마일차예요, 아가씨.”
이제 막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터라 내 앞 테이블에는 입가심을 위한 허브차가 놓였다.
늘 그렇듯 내 옆을 지키는 시녀 가넷이 우려낸 차였다.
어젯밤에 그렇게 도망친 게 마음에 걸렸는지 가넷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것저것 챙겨주려 애쓰고 있었다.
어제 일이 떠오르지 않도록 내 정신을 계속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모양새였다.
그럼 뭐 해, 정작 내가 어제 일을 곱씹어 보려고 노력 중인데.
나는 찻잔으로 손을 뻗으며 이 찻잔을 마지막으로 들어 올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가씨!이건, 주방장님의 특제!초코!마카롱이에요!”
평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가 또다시 상념을 방해했다.
내가 ‘차향이 무척 좋네요.’라는 문장을 말하려다가 다섯 번째로 말을 더듬었을 때였다.
“…나이스 샷이야, 가넷.”
…나이스 샷이 뭔가요?
어리둥절해하는 가넷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고 마카롱을 들어 올렸다.
쫀득쫀득한 마카롱은 예나 지금이나 내 최애 디저트였다.
맛있지만 그 가격 때문에 늘 아껴 먹어야 했는데 이곳에 온 뒤부터는 아낄 필요가 없어져 쉴 새 없이 흡입 중이었다.
아, 귀족 라이프, 정말 좋다!
내가 이 계획을 성공시켜야 할 이유가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의도치 않게 동기 부여를 하고 흑역사 복기를 시작하려는 그 순간.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응?손님이라니, 오늘 약속이 잡혀있었던가?”
혹시나 해서 가넷을 쳐다봤지만 나와 별다를 것 없는 얼굴이 나를 향했다.
그렇다면 우리 둘 다 모르는 약속이라는 건데, 전혀 짚이는 데가 없었다.
도대체 누구지?
“약속은 따로 잡지 않으셨지만…….”
흠, 그러니까 불청객이라는 거네?
그럼 더 볼 것도 없이 거절을…….
“헤일로 카르트 공자님의 방문이시라 아가씨께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할 수가… 없네?
오늘도 그와 나는 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어제 그 환장의 티타임을 겪고도 내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다니, 대단한 멘탈이다.
아니, 본인은 잃은 게 전혀 없으니 가능한 건가……?
생각해 보니 여기서 고개 못 들 사람은 나뿐인 것 같기도 하고…….
“어제 하신 말씀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어떤……?”
실수한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짚어야 할지 모르겠는걸?
그러나 그는 가타부타 없이 곧바로 본론을 밝혔다.
“파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렇지, 속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말을 꺼내긴 했다.
나이트 가문과 카르트 가문의 결합은 누가 봐도 나이트 가문이 더 이득 볼 여지가 많은 혼약이었다.
그것은 비단 후작가와 공작가라는 신분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카르트가의 능력 때문이었다.
카르트가는 대대로 재상의 자리를 이어오는 가문인지라 정계에서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자연스럽게 다음 대 재상으로 칭해지는 헤일로 카르트인 만큼 다른 귀족들의 시선에선 이 혼약을 유지시키고자 애를 써야 할 쪽은 나이트 가문과 나였다.
어제처럼 먼저 파혼에 대해 넌지시 떠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 걸린 게 내 목숨만 아니었다면 나도 딱히 거부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조금 주춤했지만, 헤일로 카르트를 사랑한다는 마음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일에 한해서는 나도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상대와의 혼약을 내 손으로 깨고 말겠다는 결심을 세웠을 정도로.
사실 이보다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더 없을 거다.
이혼도 아니고 파혼 정도야 성격이 안 맞아서, 혹은 다른 영식을 마음에 두게 돼서, 라는 말로 충분히 얼버무릴 수 있는 정도니까.
반대로 내가 아무리 그를 좋아하고, 그와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더라도 이 혼약의 갑에 서있는 헤일로 카르트가 약혼을 파기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이야기는 더 쉬워진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미래의 재상이다.
이미 그 또래에서는 천재로 이름 날리며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그의 앞길이 탄탄대로라는 것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쉽게 예상하고 있으리라.
그런 입장의 그이니 파혼에 별다른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해했을 테지.
그가 데이지 퀴니와 스캔들을 일으키기 전에 파혼을 먼저 청했었다면 로즈 나이트가 사교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 없이 정리됐을 일이라는 거다.
“사죄의 의미로 장미 꽃다발을 준비해 왔습니다.받아주신다면 기쁘겠군요.”
“아…, 네.가넷, 꽃병을 가져와.”
갓 딴 듯 싱그러움을 유지 중인 장미는 가넷의 손에 깔끔히 정리되어 꽃병에 꽂혔다.
갑자기 웬 꽃 선물일까.
나는 그 무표정 뒤의 의중이 몹시 궁금했다.
“그 파혼… 이야기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란 건……?”
“일단은 어제 하신 말씀의 정확한 저의를 여쭈고 싶었습니다.”
그거 하나 물으려고 생전 안 챙기던 꽃까지 들고 왔다니.
심지어 내가 부르지 않았음에도 저택에 찾아왔다.
이때까진 늘 내가 먼저 편지를 보내 들러달라고 해야만 마지못해 오는 식이었는데.
파혼 얘기가 뭐라고 그 무심하던 헤일로 카르트를 움직였단 말인가.
그렇게 의외였나?
그 뒤로 이어진 질문은 단순했다.
왜 갑자기 파혼 얘기를 꺼내셨나, 혹시 진심으로 파혼을 염두에 두시는지, 종래에는 마음에 드는 영식이라도 생겼나 물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 모든 말을 끝마치는 와중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서 ‘나를 좋아하나?’
싶은 질문의 향연이었음에도 ‘그건 아닌 것 같다’로 귀결되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당황스러운 점은 또 하나 있었으니, 올해 그가 내게 건넸던 말보다 오늘 하루 만에 한 말이 훨씬 많을 것 같다는 점이다.
아니, 올해가 뭐야, 지난 3년을 합쳐도 비교가 될까 말까인데.
늘 관심 없는 듯한 눈으로 관찰하기만 하던 그가 이렇게 오래 대화에 참여하다니.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지 꼭 확인해야지.
“…제가, 영애께 실수한 점이 있습니까?”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잠시 딴생각 중에 들려온 질문이 가관이었다.
아까부터 콩깍지 때문인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파혼은 하지 말자, 고 해석되는 건 내 착각인가?
방금 발언 잘못 해석하면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할게, 로 들린다고.
…참, 별생각을 다 하게 되네.
오히려 이 상황이면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파혼하려 하냐?
며 따지고 들어도 할 말 없을 텐데.
그는 내게 다정하지도, 나를 사랑하지도 않았지만 이 약혼을 깰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그는 정말 별다른 일이 없다면 로즈 나이트와 결혼까지 했을 터였다.
그 별다른 일이 생겨서 문제였지만.
그 누가 예상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청순하고 유약한 데이지 퀴니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목석 헤일로 카르트와 스캔들을 일으킬 거라고.
물론 독자인 나야 데이지 퀴니가 타고난 남자 사냥꾼이라는 것도, 겉보기처럼 착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데이지 퀴니의 겉모습과 내숭에 속았던 사교계는 한동안 그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었다.
여담이지만 그 사건으로 데이지 퀴니에게 반해있었던 황실 기사단장과 마탑주가 눈이 살짝 돌아서 데이지 퀴니와 뜨거운 밤을…….
큼큼.
어쨌든 그에게 데이지 퀴니의 존재는 전혀 예상 범주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원래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사람이 유혹에 더욱 취약한 법이라잖은가.
게다가 데이지 퀴니는 헤일로 카르트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른 난다 긴다 하는 남주들도 벗어나지 못한 데이지 퀴니의 어장을, 헤일로 카르트 역시 거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미래의 일이지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곧 일어날 일을 안다는 것은 빙의자로서의 메리트일 뿐이니, 헤일로 카르트의 입장에서는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한다.
아니, 평범한 영식이었다면 갑작스럽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억울하다며 항변할 수도 있을 일이었다.
“…아뇨, 공자께서 무슨 잘못을 하셨겠어요.”
내가 불러야만 오는 주제에, 실수할 여지라도 있었니.
하는 생각을 하며 살포시 웃었다.
그러나 내 미소 속에 담긴 진심을 알아챈 것처럼, 헤일로 카르트는 생전 하지 않던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제가 영애께 소홀했던 점에 섭섭하셨군요.”
차마 이 말에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말이 더없는 진실이기도 했거니와, 그 사실을 알아챌 머리도 있으면서 그랬냐는 무언의 반항이었다.
전혀 모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걸 자신의 잘못이라며 언급한다는 것은 저가 심하게 소홀했다는 것을 그 본인도 인정한다는 거잖은가.
그게 너무 괘씸해서 예의상의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매일, 이렇게 티타임을 가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앞으로, 매일이요?”
내 침묵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듯, 헤일로 카르트가 유려한 말솜씨로 읊었다.
약혼자로서의 의무니 뭐니, 어떻게 들어도 저의 실책이니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 거였다.
앞으로 매일 얼굴을 맞댄다니…, 겨우 진정시켰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니, 너무 알기 쉬운 거 아니냐고, 나.
밀당이란 게 전혀 없잖아!
헤일로 카르트가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하는 로즈 나이트의 몸과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더 짜증 나는 건 그 모든 걸 겪고 있음에도 마땅찮은 반항 한번 못 하는 나다.
정말, 돌아버리겠다.
오늘의 티타임은 어제보다 나았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다.
하루 종일 그에게 휘둘리느라 흑역사를 생성시킬 틈도 없었으니까.
물론 그 ‘헤일로 카르트’가 내게 티타임 약속을 잡아두고 떠났다는 것은 가히 절망적이나 내가 파혼 의사를 밝혔다는 것만은 알아채서 다행인가.
정말 의외인 점은 헤일로 카르트라면 약혼이든 파혼이든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았는데 파혼을 반기는 느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니, 나한테 별 사감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파혼은 안 한다는 거야?
떠올려 본 기억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약혼에 대해 퍽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셨다.
애당초 먼저 약혼을 제시한 것도 카르트가였고, 아직 어린 아이들이니 우리 둘이 다 크고 나서의 의사에 맡기고자 하는 느낌이셨달까.
성적으로 개방적인 제국이니 헤일로 카르트가 첫 상대로 별로 나쁘지 않다는 것도 그 결정에 한몫하셨을 거고.
그래서 나는 나만 파혼 의사를 밝히면 문제없이 파혼될 줄 알았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것도 헤일로 카르트, 더 좋은 기회를 가질 것도 헤일로 카르트니까.
나야 그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계속 그를 잡아두라 외쳤지만, 그마저도 목숨의 위협 앞에서는 조금 무뎌졌다.
앞으로 또 다른 사랑을 찾으면 된다는 혼신의 마인드 컨트롤이 빛을 발한 것일 수도 있고.
그러나 헤일로 카르트가 나를 잡으려는 기미를 보이자 겨우 억눌러 놓았던 감정이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헤일로 카르트를 사랑한다고,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온갖 감정들이 다시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도 나를 사랑할지도 모른다며,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이 나를 괴롭힌다.
여전히 그의 앞에 있으면 심장이 뛰고 어찌할 바 모르며 수줍어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를 보지 않는 순간뿐이지, 오늘도 나는 사랑에 빠져있었다.
그런 와중에 들리는 그런 말들은 애써 버티는 나를 흔들고 말았다.
이때껏 아니라고 부정하며 애써 세워오던 벽에 금이 간 기분이었다.
비록 두 사람분의 기억이 혼재되어 있더라도 결국은 둘 다 나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헤일로 카르트를 사랑하는 그 마음 역시 내 것이라는 뜻이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침구에 몸을 뉘었다.
밤은 계속 깊어가는데도 잠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헤일로 카르트와 티타임을 가진 지 사흘째.
나는 여전히 그가 바라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흘 사이의 진전이라고는 그의 차 취향이라든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등등의 짤막한 이야기를 나눈 게 다였다.
나야 안 된다고 외치는 이성과 된다고 외치는 감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느라 절로 말을 잃었지만, 그 역시도 애당초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둘의 티타임 대부분은 차를 홀짝이는 소리나 새소리로 채워졌다.
가끔 둘 중 한 명이 겨우 침묵을 깨더라도 잠시뿐, 우리 둘 사이에는 금세 적막이 내려앉고는 했다.
오늘의 약속은 오후 3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전 티타임을 함께 나누었던 요 사흘에 비하면 조금 늦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평소보다 더 긴장하며 방 안을 서성이고 있는 중이었다.
1분 1초 흐를수록 점점 더 초조해지는 마음이 나를 가만있지 못하게 했다.
오늘은 그와 나의 첫 데이트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얼굴만 보는 자리가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도 그런 위기감을 느낀 건지 오늘은 장미 공원에 나가보자며 먼저 제안해 왔던 것이다.
안 그래도 매 티타임마다 장미를 색깔별로 사 와서 가넷이 흐뭇한 얼굴을 했는데 데이트 신청을 받은 어제는 헤일로 카르트가 가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얼굴 팩이다 뭐다 온갖 치장을 해주었다.
나보다 더 신난 것 같은 얼굴로 피부에 좋다는 온갖 약재를 꺼내오는 가넷을 나는 차마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지 않았다는 게 정확하겠지.
헤일로 카르트가 무슨 의중인지를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머리가 아팠으므로.
그는 불쑥 찾아왔던 첫 티타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꾸준히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취미부터 성격까지 정반대인 우리 둘이었기 때문에 대화의 끝은 늘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의 교환이었다.
그게 계속 이어지니 종래에는 별 영양가 없는 정보의 나열을 대화랍시고 나누고 있었을 정도였다.
만약 이게 선 자리였으면 어쩜 저렇게 나랑 안 맞을까, 하며 일어나고 말았겠지만 상대는 헤일로 카르트, 내 약혼자였고 이미 그에게로 기울기 시작한 마음은 그런 그마저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난 사흘 동안의 티타임은 나의 파혼 계획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후로 파혼에 대한 얘기를 꺼낼라 치면 짧은 단답으로 대화를 잠시 단절시켰다가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던 것이었다.
마치 파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게다가 그 직후의 그는 어조부터 무척 부드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했다.
…나는 그에게 너무 무른 것 같아, 하는 생각만 벌써 스무 번이 넘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 앞에 서면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으니 더 답답한 거지만.
덕분에 애꿎은 이불만 내 분노를 받아주느라 고생이었다.
“아가씨, 헤일로 카르트 공자님이 도착하신 것 같아요!”
언제쯤 올까 고개를 내밀고 창문 밖을 기웃거리던 가넷이 신나서 외쳤다.
아무리 봐도 데이트를 나가는 건 내가 아니라 가넷인 것 같다.
내 얼굴은 점점 흙빛이 되어가는데 나를 돌아보는 가넷은 얼굴에서 빛이 났다.
“잠시만요, 아가씨!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점검해 드릴게요.”
오늘 아침부터 내 몸 구석구석 단 하나의 흠조차 보이지 않도록 꾸미겠다 외치던 가넷은 나가는 직전까지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가넷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옷자락을 훑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 점점 더 그와의 데이트가 실감 나서 긴장됐다.
얹힌 것처럼 가슴께가 불편했다.
“…그냥 가자.”
옷자락이 안 예쁘게 접혔다느니, 리본이 구겨졌다느니 한참 호들갑 떠는 가넷에게 지쳐 손을 살랑살랑 저으니 가넷이 아쉬운 얼굴을 하며 문을 열어줬다.
가넷을 저택에 두고 가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데리고 나가야 했다면 30분에 한 번씩 화장실로 끌려가서 재단장을 했어야 할 터였다.
“아가씨, 양산은 마부에게 맡겨놓을 테니 꼭 쓰고 다니셔야 해요.
꼭이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것저것 당부하는 가넷의 말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니 가넷이 만족한 듯 짧게 웃었다.
…역시 이건 가넷의 데이트가 아닐까?
마지막까지 그 의혹을 떨쳐낼 수 없었다.
헤일로 카르트는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새로 현관에 서있었다.
내가 조금 늦었나 싶어 빠른 걸음으로 그 앞에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는 정석적인 예법이었다.
그러자 맞은편의 그 역시 마주 인사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처음 받아보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특히 더 정중한 것 같다고 느낀다면 이것도 콩깍지 탓인 걸까.
나는 조금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그의 손을 잡고 마차로 다가갔다.
그래, 데이트 그까짓 거, 별거 아냐.
괜찮을 거야.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아름다우십니다.”
“…네?”
“평소에도 아름다우셨지만, 오늘은…….”
더 아름다우신 것 같습니다.
속삭이듯 흘러나온 말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내 볼은 붉은 정도가 아니라 새빨갛게 익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 심장에 폭탄을 터트린 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 모든 반응을 관찰하는 것처럼.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 때문에 나는 더더욱 주체할 수 없었다.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겨우 입을 열어 마주 칭찬을 건넸다.
그는 익숙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무감하게 감사합니다, 한마디만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는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알아챘다.
이 침묵은 평소의 침묵과는 달랐다.
그는 나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는 것처럼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면 언제나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답지 않은 변화였다.
나는 입술 안쪽을 짓씹으며 또다시 착각하기 시작하는 머릿속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저 시선에 나를 향한 애정은 한 톨만큼도 없다고, 정신 차려!
…착각도 병이라고 한다면 나는 중환자임에 틀림없다.
“장미가 무척 예쁘네요.”
“…영애를 닮은 붉은색이로군요.”
“…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에서 자동적으로 반문이 튀어나갔다.
조금만 더 늦게 정신을 차렸으면 제정신이세요?
하는 말을 붙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간발의 차로 멈춰 세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와 반대로 머릿속은 광란의 파티가 한창이었다.
파혼이고 뭐고, 이대로 그에게 청혼할 기세였다.
“영애는 장미를 닮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붉은 장미가, 영애와 가장 닮았군요.”
그런데 더 문제는 겨우 이성의 벽을 세우고자 버티던 나마저도 이제는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거였다.
장미 한 송이를 톡 꺾은 그가 가시를 일일이 제거하는 모습을 아연하게 바라보며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두근두근두근,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던 고동 소리가 다시금 힘차게 귓가를 울린다.
떨림이 들킬까 맞잡고 있던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도저히 멈출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사이 가시를 다 제거한 그가 새빨간 장미를 내게 내밀었다.
“혹시 손을 다치실까 해서요.”
흔들리고 있을 게 분명한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가 예의 그 무표정으로 시선을 마주 대왔다.
왜일까, 요 며칠 계속 봐오던 표정임에도 이 순간의 그가 그렇게 낯설어 보일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귀에 선연했다.
더는 감정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 * *
“오늘의 초대장은 이게 다예요.
요 며칠 계속 거절의 답신만 보내서 그런지 생각보다 수가 적네요.”
“그거라도 고마워.
거기 두고 나가줘.”
“네, 아가씨.
또 시키실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
활기찬 어조로 대답한 가넷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방음이 잘되는 덕에 가넷이 방 앞에 서있는지 다른 일을 하러 갔는지 알 순 없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 모든 신경은 가넷이 두고 간 편지 뭉치에 가있었다.
편지에 뿌려둔 향수들이 뒤섞여 머리 아픈 냄새가 났다.
한숨을 내쉬며 분류 작업을 위해 손을 움직였다.
가넷은 생각보다 수가 적다고 했지만 내 목적을 달성할 정도는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편지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했으니까.
“카플란 자작가, 도르헨 남작가…….
아, 이것도 제외네.”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 내가 만나야 할 상대에게 맞추려면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까다로운지 어지간한 가문의 주최자가 여는 모임이 아니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탓이었다.
분류 작업은 의외로 간단하게 끝났다.
그녀가 내걸고 있는 조건이 퍽 까다로운 탓에 부합하는 초대장은 단 두 장으로 좁혀졌다.
후작가 이상의 가문이고, 주최자가 사교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남자 주인공들과 연관 있는 가문이어야 한다는 것.
사실 마지막 조건이 가장 중요한데, 그 외모를 활용하여 연약하고 청순한 영애를 연기하는 만큼 평상시 사교 모임에 얼굴을 내비치는 횟수도 현저히 적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위 귀족의 모임에만 얼굴을 비춰도 뒷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만큼 남자 주인공들과의 접점을 만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런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만들어 내야만 했다.
그 모든 조건을 다시금 곱씹으며 나는 내 눈앞에 놓인 두 통의 편지를 바라봤다.
고민하는 척하곤 있지만 이미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애써 무시하고 있을 뿐, 내 목적에 완벽히 부합하는 모임이 하나 있었다.
둘 중 왼쪽의 연보랏빛 봉투는 케를란 공작가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케를란 공작 영애가 주최하는 티 파티 초대장이었다.
케를란 공작가는 황실 근위단장인 벨로프 케를란의 가문이기 때문에 평소라면 데이지 퀴니가 무조건 참석했을 만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도르륵 눈을 오른쪽으로 굴리자 다홍색의 봉투가 보였다.
눈에 그 색이 비치자 귓가로 ‘영애를 닮은 붉은색이로군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지.
이런 초대장은 집사의 관할이다.
그가 직접 편지 봉투를 골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니, 망상이 지나쳤다.
게다가 그는 이번 티 파티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그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쪽이 훨씬 가능성 있었다.
나는 덜컹 떨어졌던 심장을 추스르며 애써 생각을 돌렸다.
어쨌거나 카르트 공작 부인께서도 마침 티 파티를 여시려는 모양이었다.
사교계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아는 것이 많아야 하는 법이니까 영애들과 담소라도 나누어 보시려는 생각이시겠지.
그리고 이 기회를 데이지 퀴니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 황실 연회에서의 목표가 헤일로 카르트인 만큼 카르트 공작저에서의 티 파티는 그녀만을 위한 안배라고 해도 좋을 터였다.
물론 헤일로 카르트는 개인적인 용무로 저택을 비울 예정이라 그와의 첫 대면은 황실 연회 때가 될 테지만, 이 티 파티에서 그녀는 카르트 공작 부인의 환심을 사 앞길을 탄탄히 했다.
헤일로 카르트 공략의 절대적인 아군을 얻은 셈이었다.
다홍색 편지를 들어 가슴에 품고는 소파에 벌렁 누워버렸다.
드레스가 구겨졌다며 울상 지을 가넷이 잠깐 떠올랐지만 편지의 감촉이 느껴지자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으로 무시했다.
데이지 퀴니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더없이 확실한 방법이란 것을 안다.
그녀에게 ‘만나고 싶다’는 티를 내지 않고 자연스레 마주할 수 있는 기회잖은가.
그럼에도 망설여지는 까닭은 내 마음의 문제였다.
첫 데이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자각한 지도 이틀째라는 말이었다.
내 기억은 여전히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지만, 감정까지 둘로 나눌 수는 없었다.
결국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에게 물들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나고, 로즈 나이트는 로즈 나이트라고.
기억이 두 갈래로 나뉘었지만 서로 잘 공존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기억이 점점 섞이는 게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그렇지만 헤일로 카르트를 향한 감정만큼은 쉽지 않았다.
내가 죽기 싫은 것보다 로즈 나이트의 감정이 더 절박했던 걸까, 아니면 파혼이 힘들 것 같으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을까, 하며 여지를 남겼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그 짧은 망설임 사이에 나는 헤일로 카르트를 향한 감정을 완전히 자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카르트 공작가의 티 파티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파혼을 하든 하지 않든 헤일로 카르트와 데이지 퀴니는 예정된 미래를 그대로 밟아 결국 사랑에 빠질, 그런 운명이니까.
이번 티 파티만 해도 성격 탓에 별다른 말도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로즈 나이트보다, 데이지 퀴니를 더 예뻐하는 카르트 공작 부인의 이야기가 스토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제 외모를 십분 활용하여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꾸며낸 데이지 퀴니가 입 안의 혀처럼 구는데 어느 누가 싫어할까.
그렇다고 내가 몇십 년 동안 사교계를 주름잡아 온 부인 앞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성격을 흉내 냈다간 더 마이너스를 찍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이번 티 파티는 결국 소설대로 흘러가고 말 것이다.
무력감에 몸에 늘어졌다.
품에 안은 편지가 돌덩어리마냥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가넷을 불러 티 파티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카르트 공작저로 전달했다.
가넷은 티 파티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드레스를 찾아봐야겠다고 방방 뛰더니 그 장소가 카르트 공작저라는 소리를 듣고는 아예 드레스를 새로 맞추자며 성화였다.
황실 연회 때 입을 드레스를 주문한 영애들과 부인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티 파티용 드레스라니, 무리였다.
게다가 드레스를 맞추러 간다고 해도 가넷에게 최소한 세 시간을 시달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단호하게 드레스를 맞출 수 없으니 있는 거나 수선해 달라며 가넷을 쫓아냈다.
그러나 가넷은 뭐든 좋다는 얼굴로 저에게 맡겨달라 호언장담을 하며 사라졌다.
가넷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데이지 퀴니라는 걸림돌만 없었다면 당사자인 내가 더 신나서 함께하고 있었을 터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를 뵙는 자리인데 누구라도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을 쏟았을 것이다.
…비록 나는 그 누구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 * *
“아가씨…….”
치장을 하다 말고 가넷이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뭐, 왜.
무슨 일이야.
치장 중에 가넷이 이렇게 우는소리를 하면 두 가지 경우뿐이다.
너무 안 어울리거나.
“너무 예쁘셔서 반해버릴 것 같아요…….”
너무 예쁘거나.
다행히도 이번에는 후자인 모양이었다.
오히려 제 노력의 결과를 바라보는 눈에서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묻어났다.
“…그러게.”
그 낯부끄러운 말에도 별다른 부정을 못 했던 것은 오늘의 나는 정말로 예뻤기 때문이었다.
카르트 공작가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밤을 새워가며 드레스 룸을 한번 뒤엎은 가넷은 올해 초에 맞췄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지 않고 보관해 뒀던 드레스 하나를 꺼내 혼신의 힘을 다해 수선해 왔다.
“황실 연회가 기대될 정도예요.
그때는 드레스부터 비교가 되지 않으니까요.
분명 그날의 주인공은 아가씨이실 거예요!”
가넷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꺼낸 말에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미안해, 가넷.
아마 그날의 주인공은 내가 아닐 거야…….
현실을 알고 있는 나는 가넷의 신난 얼굴에 되레 입이 썼다.
그날의 주인공은 분명 데이지 퀴니일 것이다.
그 아름다움으로 모든 남자들을 홀려놓겠지.
그 장면에서 나의 역할이란 그녀를 시기하는 엑스트라 1 정도 되지 않을까.
“마부에게 마차를 준비하라고 전해줘.”
“네, 아가씨!
천천히 내려오세요!”
가넷이 마차를 준비시키러 간 사이 나는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봤다.
엑스트라 1로 남기엔 안타까운 외모다.
데이지 퀴니만 아니었으면 나도 편하게 살았을 텐데.
공작저에 도착하자 저택의 집사가 티 파티 장소로 나를 안내했다.
카르트 공작저에는 방문한 기억이 있지만 오늘 티 파티가 열리는 하늘 정원은 나조차도 처음 발을 들여놓는 곳이었다.
공작 부인이 무척 아끼는 곳이라 평소에는 전혀 개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피어있는 색색의 꽃들도 이렇게 예쁜데 과연 정원은 어떨까.
나는 내심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겉으론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5분 정도 걸었을 즈음에야 귀부인들과 영애들의 대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크기의 정원이면 정원사를 적어도 다섯 명 정도 고용해야만 유지될 것 같다.
그 크기와 아름다움은 분명 감탄스러운 것이었으나 티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온갖 치장을 다 해야만 했던 나에게는 눈 호강, 몸 고생 거리일 뿐이었다.
아, 뒤꿈치 쓰려…….
집사가 여기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해서 멈춰 선 참이었다.
드레스 자락에 숨겨 잠시 구두를 벗을까 하며 눈치 보고 있으려니 몇 발자국 앞에 카르트 공작 부인이 보였다.
공작 부인은 막 로파 백작 부인을 맞이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공작 부인이 집사에게 짧게 눈짓하자 집사가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왼쪽 발을 구두에서 해방시켰다.
“티 파티에 참석해 줘서 고마워요, 나이트 영애.”
기다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뒤에 서서 기다리는 나를 의식한 듯 두 부인은 금세 대화를 마쳤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공작 부인의 입가에 띄워져 있던 미소는 나를 보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공작 부인을 마주칠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그 표정 변화만으로도 기분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에요,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