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별의 밤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하르텐 엔데버가 성인이 되는 날이었다.
동시에 내가 합법적으로 그를 저택에 들일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일어난 아침에는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한 얼굴로 세안을 마쳤다.
요 며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 패턴을 몸에 익혀버린 탓에 오늘도 눈을 떴을 땐 벌써 10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미 아침 식사를 끝내고 각자 할 일을 하고 계실 터였다.
또 늦게 잤냐며 내게 잔소리를 투척하는 가넷의 말을 흘려들으며 식당에 도착하니 의외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안녕, 라미엘 오라버니.”
“우리 로지!
잘 지냈어?”
요 며칠 기사단의 일로 바빠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라미엘 오라버니였다.
나는 작은 손짓으로 라미엘의 인사를 받아주고 의자가 빼어져 있는 자리에 앉았다.
늘 먹던 걸로 달라고 해줘, 가넷에게 한마디를 꺼내자 그녀는 알겠다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라미엘이 울상 지으며 비어있는 제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로지, 여기 안 올 거야?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거길 왜 앉아?”
저번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라미엘 오라버니는 여전히 나를 열 살짜리 꼬꼬마로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 많은 자리를 두고 굳이 옆에 앉으라니.
아직 수저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아니고서는 그 옆에 앉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저러는 건지.
아니면 알기 때문에 나를 옆으로 부르는 건지.
어느 쪽이든 불만족스러운 답이라 표정이 절로 부루퉁해졌다.
“이런, 로지 삐졌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게 틀림없다.
흥, 하는 짧은 코웃음과 함께 나는 눈앞에 차려지는 음식에만 집중했다.
라미엘이 뭐라 떠들든 내게는 오늘의 최종 목표가 따로 있었다.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바에 간다면서?”
“……?
응, 맞아.”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별생각 없이 긍정했다.
케드릭과 라미엘 역시 내 나이쯤 클로버를 한 명씩 들였었다.
그때의 그들도 내게 클로버를 들였다는 걸 굳이 숨기지 않았다.
제국의 풍습으로는 클로버를 두는 게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귀족의 경우에는 일종의 의무로 보는 경향도 있었다.
내 대답에 라미엘이 활짝 미소 지었다.
나의 클로버 거부 선언을 가장 반대했었던 사람인 만큼 내 변화가 기꺼운 모양이었다.
“어쩐지 아버지가 집에 일찍 오라고 하시더니.”
“응?
그랬어?”
“응, 와서 너 좀 도와주라고 하시더라고.”
왜 오랜만에 집에 왔나 했더니, 아버지가 내 호위로 부르신 모양이었다.
나는 위험하다며 나를 말리시려던 아버지와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라미엘을 번갈아 떠올렸다.
바가 그렇게 위험한 곳인가?
소설 속 데이지 퀴니는 돈만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 하르텐 엔데버를 데리고 나왔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그 어디에도 바가 위험하다든가, 곤란에 처했다거나 하는 일말의 언급도 없었다.
때문에 그 소설을 읽었던 나에게 바의 위험성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내 전담 호위 다섯 명에, 오늘만 기사단의 세 명을 추가로 배정하셨다.
거기다가 황실 기사단에서 일하고 있어야 할 라미엘까지 불러오시다니, 내가 너무 얕보고 있었던 걸까.
…데이지 퀴니는 대체 그런 곳에서 어떻게 그렇게 멀쩡히 나올 수 있었던 거지?
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두고 고개를 들어 라미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오늘 내가 가는 곳에 같이 가줄 거야?”
“물론.
우리 로지가 가는 곳이면 같이 가야지.”
흔쾌히 대답하는 얼굴 어디에도 불편함이라든가 부끄러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어조만 들어본다면 모레 입을 드레스를 맞추러 가는 데 동행하는 사람 같았다.
…왜 이럴 때면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
접시에 코를 박으며 붉어지려는 얼굴을 수습하기 급급했다.
“로지, 정말 준비 다 됐어?”
“응, 난 다 된 것 같아.”
“그럼 출발할까.”
정원수 너머의 달을 흘긋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모든 인원이 좁은 공간에서 다 같이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이야기에 기사들은 두 개 조로 나누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색으로 중무장한 비밀 호위들이 네 명 있고, 평범하게 제복을 입은 밀착 호위 다섯 명이 있다.
밀착 호위에 포함된 라미엘은 나와 화장실까지 붙어있을 예정이었다.
…이건 좀 별론데.
그들을 한번 훑어본 뒤 미리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이미 마부에게 전달해 놨다.
전달하고 온 가넷의 말로는 왜 거리의 바가 아니라 그 외곽에 가냐는 말을 마부가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불쑥 내 처지에 대한 서글픔이 몰려오긴 했으나 나는 수고했어, 하며 가넷을 내보냈을 뿐이었다.
“로지, 네가 본 바는 어디에 있는 곳이야?”
“여기서 30분 정도 더 가야만 보일 거야.”
나야 하르텐 엔데버, 소설 속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람을 보러 가니 그렇다 치더라도, 라미엘은 왜 저렇게 긴장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창문 밖의 풍경에 계속 시선을 두고 있던 라미엘은 5분에 한 번씩 질문을 던지곤 했다.
“누가 보면 오라버니가 가자고 한 줄 알겠어.”
“음…, 우리 로지가 걱정되어서 그렇지……?”
…왜 끝이 의문문이야?
그러나 라미엘은 대답 없이 입을 다물고는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간의 침묵으로 어찌할 수 없이 가라앉아 버린 분위기에 나도 더 입을 열긴 애매해졌다.
아, 가넷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걸.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가넷은 저택에서 하르텐의 방을 치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가넷이 없는 지금 우리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에게 입을 열지 못했고, 불편한 침묵 속에서도 마차는 여전히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기 5분 전부터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하는 마차를 느끼고 대충 예상하던 바였다.
그러나 마부의 외침을 들은 라미엘의 표정은 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괴상해졌다.
“…여기야, 로지?”
“응, 맞아.
여기인 것 같아.”
바 입구에 달려있는 까만 회오리 문양이라든가 한쪽 벽면에만 칠해져 있는 빨간색 페인트들이 내가 옳게 찾아왔다고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있으니 어쩐지 영화 촬영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들어가자.”
그러나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얼굴의 라미엘은 기지개를 켜는 척 비밀 호위들에게 가벼운 수신호 몇 가지를 보내더니 가지 말라는 듯 내 어깨를 꾸욱 붙잡았다.
…말은 가자면서 행동은 전혀 아니었다.
오늘따라 라미엘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차의 창문 바로 옆을 지키며 오는 내내 우리 둘을 지켜봤던 마이클 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아무리 봐도 도련님은 아가씨를 너무 어린애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조용히 해, 마이클.”
“……?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경?”
마이클 경은 어머니의 후배였던 기사이다.
황실 기사단에 갓 입단한 마이클 경을 어머니가 제자처럼 보살펴 주셔서 어머니를 따라 후작가의 기사단으로 적을 옮기기까지 했다.
그 뒤부터 마이클 경은 라미엘의 호위를 맡아왔기 때문에 나나 케드릭, 라미엘과 무척 스스럼없는 사이기도 했다.
“아니, 라미엘 도련님 표정이 꼭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얼굴이지 뭡니까!
하하하, 동기 녀석이 여동생 결혼식 날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더랬죠.
새삼 생각해 보니 동생이 너무 아깝다나 뭐라나.”
“조용히, 하지, 마이클 로드리게스.”
“뭐야, 그런 거였어, 라미엘 오라버니?”
마차 안에서의 그 심란한 표정은 내가 클로버를 들이는 것 때문이었어?
이제는 숫제 한 대 칠 것 같은 표정으로 마이클 경을 노려보는 라미엘은 마이클 경의 풀네임마저 불러가며 그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협박을 몇 년째 당해온 마이클 경은 능청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날 그 주책바가지 녀석은 신랑에게 대련까지 신청했지 뭡니까.
역시 여동생을 둔 오빠들의 마음은…….
억!”
“…내가 조용히 하랬잖아, 마이클.”
특유의 깐죽대는 표정으로 라미엘을 놀리던 마이클은 한 대 얻어맞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표정은 만족스러워 보이는 것이 충분히 놀려먹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맞는 순간 났던 퍽, 하는 소리와 라미엘이 이를 악물고 휘두른 주먹을 종합해 봤을 때 어지간한 사람이었으면 뼈에 금이라도 갔을 거다.
그러나 실실 웃으면서 다른 동료 기사들 사이에 숨는 마이클은 전혀 그런 기미가 없다.
…여러 의미로 대단한 콤비다.
휴우, 한숨을 쉬는 라미엘의 표정은 당했다, 하는 다른 의미의 심란함을 담고 있었다.
저택에서 출발한 직후부터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음에도 벌써 20년은 늙은 것 같았다.
“…들어가자.”
“좋아.”
딸랑, 종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토네이도 바입니다!
하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먼저 들어서는 라미엘의 뒤를 따라 나도 가게 안으로 첫발을 들였다.
“…하르텐…, 이라고요?”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죄송하지만 아가씨, …그런 이름의 클로버는 저희 가게에 없습니다.”
…뭐?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외곽에 위치한 토네이도 바.
그 겉모습이나 가게 내부 모습이 모두 책에 묘사된 바와 똑같았다.
그렇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르텐의 존재 유무였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걸까.
없다는 대답은 전혀 예상에 없었던지라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말을 잃었다.
“음, 로지, 그 클로버를 어디서 본 거야?”
“…그건.”
책 속이라고 말했다간 누구라도 나를 제정신으로 보지 않을 터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으려 입을 우물거렸으나 마찬가지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맹렬히 머리를 굴려 도움이 될 만한 모든 정보를 곱씹어 봤다.
“아니면, 그 생김새라도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아, 그런 방법이.
생각보다 너무 간단한 해결법에 내가 바보 같았음을 절감했다.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나는 하르텐의 생김새를 묘사했다.
머리색을 들은 순간부터 가게 주인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더니 눈 색을 듣고 나서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까지 했다.
하르텐, 그는 금발과 은안을 가지고 있었다.
흔하지 않은 색 조합인 만큼, 하르텐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사람이 있나?
하며 의아해할 조합이기도 했다.
라미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나는 가게 주인의 반응을 보고 다행이라고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반응이 마음에 걸리기야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하르텐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가씨, …그 클로버는 제가 보낼 수 없습니다.”
“왜지?”
가게 주인의 말에 바로 반응을 보인 것은 라미엘이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 라미엘은 무척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아니, 마이클 경에게 당한 걸 왜 애꿎은 바 주인에게 풀고 있어?
“그, 그 클로버는… 그러니까, 아,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뭐?
어이없는 말에 내가 되물었으나 주인은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라미엘이 은근슬쩍 뿌리고 있는 기세에 눌린 가게 주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잠깐만, 그만해 봐.
묻고 싶은 게 있어 라미엘을 말리는 사이 가게 한구석에서 술을 마시며 낄낄대던 무리가 하나둘씩 술잔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가게 안에 울렸다.
“언니가 말하는 그 오빠, 어제 성인이 되었어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클로버들의 공간인 2층에서 내려온 듯한 소녀는 티 없이 맑게 웃으며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 오빠는 여기서 얼른 나가고 싶댔어요.”
소녀가 막 말을 끝마쳤을 때, 주인이 쏜살같이 앞으로 뛰어나가더니 아이의 팔을 잡고 계단으로 확 밀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죽고 싶어?
어서 올라가지 못해?”
아직 어린 아이를 대하는 손속이 자비 없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보다 못한 라미엘이 벌써 한 걸음 내딛은 나를 막더니 마이클 경에게 눈짓했다.
“혹시 모르니까 함부로 움직이지 마.”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소곤거린 라미엘이 흘긋 가게 구석의 무리를 훑었다.
술잔을 놓고 무기를 챙겨 들기 시작한 무리는 우리를 노려보며 달려들 기세를 취하고 있었다.
남자와 아이를 말리러 가려면 무리에 가까워져야 한다는 점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기사들 사이에 얌전히 서있기로 했다.
“아이가 아직 어려 보이는데 팔은 좀 놓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소?”
“이 아이는 우리 바 소속의 클로버입니다!
제 소유물을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왜 끼어들고……!”
“소유물이라니, 말을 함부로 하는군.”
듣다 못한 라미엘이 한마디 보태자 주인은 아까의 공포가 떠올랐는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에 반비례하게 자신의 손에 잡힌 아이는 더더욱 험하게 다뤘다.
어서 올라가 버리라는 듯 당기는 손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거라곤 믿을 수 없었다.
아이가 균형을 잃든 말든 어깨를 그러쥐고 있던 손길은 또 다른 목소리에 의해 멈췄다.
“…그만두세요.”
“……!”
“너, 너는, 갑자기 왜……!”
하르텐……!
나는 헉 소리가 나오려는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하르텐 엔데버, 이 세계의 진남주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베로를 놔주세요.”
하르텐은 아이와 가까운 사이였던 듯 아이를 놓아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내가 나설 때가 됐음을 알았다.
“거기 당신, 이 가게는 얼마쯤 하지?”
“…네?”
뜬금없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내 시선은 이제 벌겋게 물들어 가는 아이의 어깨에 꽂혀있었다.
…내일이면 멍이 들 텐데.
아이는 처음의 그 발랄한 표정을 잃고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 가게가, 얼마쯤 하냐고 물었어.”
“가, 가게를 사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갑자기 사고 싶어졌어.”
“…이, 이 가게는…….”
철없는 발언에 기사들이 의아해하며 나를 돌아봤다.
평소 내 행동을 봐왔던 이들이라 그런지 갑자기 왜 이러시지?
하는 얼굴이었다.
그에 반해 가게 구석에서 이쪽을 주시하던 이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내 발언을 비웃고 있었다.
외곽이라 장사도 잘되지 않는 바를 사서 뭐 하겠냐는, 생각 없는 귀족 영애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하르텐과 친분이 있는 듯한 아이를 구해주는 것이었다.
조금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하르텐의 호감을 얻을 수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남자가 눈을 굴리는 모습이 나에게도 선명히 보였다.
어떻게든 돈을 더 받아보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인상 쓰지 않도록 노력하며 오만하게 그를 내려다봤다.
상인 수칙 세 번째, 거래에는 당당하게 임할 것.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읊어주신 내용이었다.
…이런 데서 써먹을 줄은 모르셨겠지만.
“이 가게는 2천 골드입니다!”
제가 불러놓고도 조금 아차 했는지 남자는 허둥거리는 어조로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다.
2천 골드?
라미엘이 옆에서 비웃는 소리가 났으나 남자는 내 냉담한 표정에 더욱 안달하며 제 가게의 장점들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가게에 속해있는 클로버 수, 가게의 위치, 이미 준비되어 있는 식재료 등등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매겨도 천 골드가 될까 말까 한 가게의 값어치를 두 배나 불리려 그는 아무 말이나 쏟아내고 있었다.
“그, 그, 예전에 아주 귀하신 귀족께서 자주 찾으시던 클로버가 있습니다.”
“…….”
“얼마 전에도 하, 한번 다녀가셨는데, 정말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하르텐에게 시선을 던지고 말았다.
조명에 음영 진 하르텐의 옆얼굴은 가게 주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 하르텐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 귀하신 신분의 귀족은 아마 하르텐의 아버지, 엔데버 제국의 황제겠지.
주인은 그의 정확한 신분까지는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그가 만만치 않은 신분임을 알아봤던 것 같다.
그러니 그를 언급하면서까지 제 가게의 가치를 올리려 하는 거겠지.
“…마이클 경.”
“네, 아가씨.”
“잠깐, 로지…….”
옆에서 라미엘이 나를 말리려는 게 느껴졌으나, 나는 들은 체도 않고 챙겨 온 금화 주머니를 열라고 지시했다.
하르텐을 데리고 오면서 옷이나 생필품들을 사주려고 돈을 챙겨 왔던 게 다행이었다.
나는 계약서나 쓰자며 가게 주인을 내 근처로 불렀다.
옷은 다음에 따로 사러 나오지 뭐.
“조, 좋은 선택이십니다!
이 가게는 분명…….”
“그런데, 그거 알아?”
열심히 계약서를 작성하는 그를 보며 살풋 웃었다.
상인 수칙 일곱 번째, 물건의 가격을 임의로 올리거나 내리지 않는다.
이 조항은 상인 수칙에 포함되어 있지만 제국에서 지정하고 있는 법을 기초로 한 수칙이었다.
그러니 만약 어긴다면.
“…내가 손해 본 금액의 다섯 배를 물어줘야 할 텐데.”
허억, 가게 주인이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두려움에 떨리는 손이 막 작성 중이던 계약서에 선을 하나 남겼다.
어쩔래?
하며 묻는 얼굴로 나는 고개를 기울여 그를 바라보았다.
“계, 계약서를, 다, 다시 작성하는 게…….”
* * *
“저는 그림을 정말 정말 좋아해요!”
“어머, 그렇구나.
언니도 그림은 잘 못 그리지만 보는 건 정말 좋아해.”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나는 아이, 베로와 함께 앉아있었다.
라미엘 오라버니는 다른 기사의 말을 빼앗아 마차를 벗어났고, 하르텐은 내 맞은편에 앉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와 베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나중에 저 찾으면 어쩌죠……?
저 없다고 다른 데로 가버리면…….”
조잘조잘 웃고 떠드는 아이는 중간중간 엄마가 저를 찾을까 걱정하는 말을 꺼냈다.
나는 그때마다 상처만 치료하고 얼른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하르텐이 한 번쯤은 나서주지 않을까 했으나 그는 내가 함께 저택으로 가자고 한 말에 알겠다는 대답을 한 이후로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언니는 몇 살이에요?
아저씨가 우리 가게는 어른들만 올 수 있는 곳이랬는데…….”
내가 성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려 보인다는 칭찬은 언제 들어도 좋은 것이라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해 줬다.
“언니는, 어른이 된 지 1년이 넘었어.”
“우와, 정말요?
텐 오빠보다 한 살이나 더 많네!”
“텐……?”
내 의아해하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이가 신이 나서 대답해 줬다.
“텐 오빠는 스무 살이에요.
어제 어른이 됐다고 레일라 이모가 말씀해 주셨어요!”
“…베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
레일라, 소설 속에서 묘사된 하르텐의 어머니 이름이다.
베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경고를 준 하르텐은 여전히 경계심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와 하르텐이 입을 열지 않자 마차는 금세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눈싸움이 길어지려는 찰나, 베로가 내 옷을 살짝 당기더니 다시 그림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는 나도 베로가 일부러 밝게 얘기를 꺼낸다는 걸 눈치채서 ‘그래, 그래’
하며 맞장구쳐 주기만 했다.
“아가씨, 다녀오셨군요!
옆방 청소는 아까 끝내뒀어요.”
“응, 고마워.”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가넷이 상기된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작년에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어머니는 그때껏 비워놓았던 옆방을 아예 새로 꾸미셨었다.
그러나 한창 헤일로 카르트에게 빠져있던 나는 마치 그를 두고 외도하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진저리를 치며 거부했다.
하도 내가 그 방에 민감해했기 때문에 그 방 청소도 내가 없을 때만 겨우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 하르텐을 데려오면서 당연스럽게 옆방을 새 단장해야 했고, 그 모든 일을 나는 가넷에게 위임하고 저택을 떠났던 거였다.
뒤따라 들어오는 하르텐을 보고 잠시 멍한 얼굴을 했던 가넷은 아이가 다쳤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베로를 데리고 주치의를 찾아가는 가넷의 얼굴은 그 가게 주인을 만났다면 구두로라도 한 대 팼을 만큼 살벌했지만, 나는 걱정 않고 베로를 맡겼다.
가넷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약했기 때문에 아이를 볼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상냥한 표정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라미엘도 먼저 방에 돌아가 버리자 현관에는 나와 하르텐만이 남아있었다.
평소라면 내 옆을 지켰을 집사도 일부러인지 라미엘을 따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는 어색한 미소로 그를 돌아보며 방으로 가는 길을 설명해 주겠다고 했다.
“내 방은 3층이고, 내 방 바로 옆이 너의 방이 될 거야.”
“…그렇군요.”
원래 표정이 그런 건지 아니면 경계를 풀지 않아서인지, 하르텐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소설 속의 하르텐은 데이지 퀴니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했다.
“바로 옆의 이 갈색 문이 내 방이고, 여기 이 베이지색 문이 네 방이야.”
“네.”
“그리고 방 안도 연결되어 있는데, 일단 들어…가자.”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될 일인가 모르겠다.
가족 외의 남자의 방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나는 잠시 힐긋 그의 얼굴을 살폈다가 문을 열었다.
…저 잘생긴 얼굴 탓인지도 몰라.
꽤 설득력 있는 생각이었다.
“…….”
“…취향이…….”
하르텐의 말이 이어지기 전 나는 있는 힘껏 문을 닫아버렸다.
쾅!
복도를 울리는 소리에 지나가던 시중인 몇의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고자 닫힌 문에 이마를 대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뭐야?
게다가, 뭐?
취향?
“저거 내 취향 아니거든!”
욱해서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내게 내려앉았다.
내내 무심한 표정에 경계심 어린 눈을 하고 있던 얼굴에선 또 다른 감정이 엿보였다.
분명… 기쁜 일…, 인데 그 눈이 나를 변태를 보는 듯한 눈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클로버는 주인의 취향을…….”
“취향 아니라고!”
가넷, 도대체 방에다가 무슨 짓을 해놓은 거야…….
저만 믿으라며 자신만만해하던 가넷의 얼굴에 방금 전 광경이 겹쳐졌다.
…침대 기둥마다 수갑은 왜 달아놓은 거야……?
탁자 위에는 왜 그, 그런 기구만 올려놓은 거고……!
무엇보다, 피임용 차가 한 컵도 아니고 한 통도 아니고 한 상자였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세상에, 아가씨.
베로의 귀여움은 이 세상의 귀여움이 아니에요……!”
벌써 20분째 내 주변을 맴도는 가넷은 베로의 귀여움에 대한 연설 중이었다.
…같은 말도 한두 번이지, 나는 귀를 막는 대신 이불 속에 숨었다.
“앗, 아가씨, 벌써 주무시게요?
오늘 클로버가 온 첫날인데요?”
“무, 무슨 소리야!”
자동적으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버럭하고 말았다.
옆방에 있을 하르텐을 떠올리자마자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 방을 꾸민 건 가넷인데 왜 내가 수치스러운 거야?
“가넷, 그, 그 방…, 도대체…….”
“앗, 마음에 드셨어요?
요즘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제품만 모아둔 건데!
마님께 예산을 청구하러 갔더니 두 배로 챙겨주시길래 인기 제품은 다 쓸어왔어요!”
요즘 영애들은 묶이는 게 취향인가?
아니, 뭐 그런, 바람직한…….
“흐억!”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기겁하고 있으니 가넷이 나를 보며 깔깔 웃었다.
성에 무지한 나를 놀려먹는 게 퍽 재밌는 모양이었다.
하긴 제국에서 이 나이 먹도록 이러고 있는 건 내가 유일할 거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아이 참,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아가씨!
원래 다들 이렇게 시작해서 배우는 거예요.”
뼛속까지 이 세계 사람인 가넷이 호언장담했다.
사실 그 말이 맞았다.
로즈 나이트의 순결은 헤일로 카르트를 위해서였지 순결 그 자체에 의미를 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의 반을 차지한 로즈 나이트도 하르텐에게 가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분명했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보수적인 유교 사회의 영향을 받은 나였다.
이런 노골적인 이야기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배워왔던 나.
“아가씨 또래에서 클로버를 들이지 않은 영애는 없을 거예요!
당연한 건데 왜 부끄러워하세요?”
의아한 듯 묻는 가넷은 진심으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성욕은 당연한 거라는 말이 전혀 다른 세계의 말인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물론 여기가 다른 세계인 건 맞지만, 아무튼.
“게다가 이렇게 부끄러워하실 거면 클로버를 들인 의미가 없는걸요.”
“의미……?”
“나이트 저택에 일하지 않으며 놀고먹는 존재는 있을 수 없어요!”
물론 클로버의 역할이 섹스만은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그와 밤을 보내지 않더라도 하르텐을 저택에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그 발언은 내가 부끄러움을 핑계로 도망 다닐까 봐 가넷이 둔 무리수였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 말에 수긍하며 휩쓸리고 말았다.
하르텐이 저택에 들어온 첫날 한밤중에 나와 하르텐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정확히는 그에게 먼저 제안을 한 거지만.
“…제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알겠어요.”
“응?
정말?”
의외로 순순한 대답에 깜짝 놀라 되물으니 여전히 담담한 표정의 하르텐이 시선을 마주해 왔다.
“그러니 그 기구들은 아가씨의 취향이 맞다는…….”
“악!
아니라고!
내 취향 아냐!”
뭔가 했더니 또 그놈의 취향 타령이다.
정말 그것들을 사 오라고 부탁한 적조차 없고,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데.
억울함에 손까지 저어가며 부인했지만, 그럴수록 하르텐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수긍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걸 사용해서…, 아가씨의 시중을 드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건…, 맞아.”
그 기구…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것들은 아직도 하르텐의 방에 보관되어 있다.
내가 버리지 말라고 가넷에게 부탁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가넷이 음흉한 표정으로 그럴 줄 알았다며 가버리는 바람에 내 속이 또 한 번 뒤집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걸 써야 할 이유가 있으니 아쉬운 내가 참을 수밖에.
하르텐 엔데버는 소설 속에서 연하남이라는 설정 때문인지 순정남 포지션을 담당했었다.
클로버인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말투와 다른 남주들에 비해 왜소한 덩치 탓에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눈에 띄지 않았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고?
소설 속, 순정남 하르텐 엔데버가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것이 서질 않는다는 폭탄 발언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르텐 엔데버에게 제안했다.
그렇다면 가넷이 챙겨뒀을 그…것들만 사용해서 밤을 보내는 것은 어떻겠냐고.
…내가 들어도 저 기구들을 좋아하나?
싶은 발언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 제안을 하르텐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 생각하고 보면 이건 내가 아니라 하르텐을 위한 배려니까, 중간에 하르텐으로부터 변태라는 낙인이 찍힌 것 같긴 하지만.
“우리 아가씨가 벌써 클로버를 들여 밤을 보내시다니.
아가씨가 아장아장 걸으시던 게 어제만 같은데…….”
“…유모, 내 나이가 스물하나야.
아장아장 걷던 때라니, 도대체 몇 년 전 이야기를…….”
“그렇지만 아가씨, 제 눈에도 아직 사탕 달라고 떼쓰는 아가씨가 보이는걸요.
물론 그제는 다른 걸 달라고 떼쓰셨지만…….”
내가 언제!
나는 가넷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고 홍당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떼쓰지도 않았다고!
내가 가넷의 입을 막으려 아등바등하자 옆에서 감격에 차있던 유모가 나섰다.
“아가씨, 팩 하실 땐 가만히 계셔야지요.
그리고 가넷, 너도 조용히 하고.”
“…응.”
“…네.”
어릴 때부터 유모에게 혼나며 커온 나와 가넷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에이나는 나의 유모이자 가넷의 어머니이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이 사고를 치면 늘 에이나에게 혼나곤 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다 크고 나서도 가넷과 나는 에이나의 호통을 무서워했다.
“아가씨에게는 역시 흰색이 잘 어울리네요.”
“어머, 그러게요.
정말 예뻐요, 아가씨!”
내 목욕 시중에 옷 시중까지 다 들고 난 두 사람은 내 모습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꾸며도 정작 이 모습을 볼 당사자는 이런 데 전혀 관심 없을 텐데.
나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그 상황을 넘겼다.
마침내 결심을 하고 똑똑 노크하는 데까지 정확히 35분 걸렸다.
혹시 그사이에 하르텐이 자리를 비웠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기다리는데 대답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오세요.”
“…응.”
하르텐은 평온한 표정으로 나를 침대로 안내했다.
“일단 저번에 구해다 주신 걸 다 꺼내긴 했는데…….”
답지 않게 말을 흐린 하르텐의 시선이 침대 옆 탁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식어서 더 이상 김이 나지 않는 차 한 잔과 가넷이 쓸어왔다던 온갖 기구들이 보였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
하르텐은 조금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묶이실래요?”
“뭐?”
순식간에 눈이 침대 기둥으로 향했다.
침대 기둥마다 달려있는 새까만 가죽 수갑들은 왜 이제껏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었다.
“…그, 그건 됐어, 텐.
그보다 이쪽으로 오는 건 어때?”
텐, 그는 토네이도 바에서 하르텐이라는 본명 대신 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베로는 물론이고 이름의 주인인 그마저도 자신의 이름이 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모양새라 나 역시도 그를 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네.”
내 요구에 의외로 순순히 응한 그는 내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달빛에 음영이 드리운 그의 얼굴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명령을 내리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얌전했다.
“…차는 알아서 처리해.”
“네.”
어차피 몸을 섞지 않을 테니 부러 마실 필요 없는 차였다.
나는 순종적으로 대답하는 그의 목 뒤에 손을 둘러 그를 살짝 일으켰다.
그다지 강한 힘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순순히 몸을 일으켜 내가 원하는 대로 자세를 옮겼다.
부끄러움을 참고 하르텐의 손을 어깨에 올려놓으니 하르텐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리본으로 된 어깨끈을 풀었다.
천끼리 스치는 소리가 나며 상체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그리고 그 위를 하르텐의 손이 덮었다.
“…아프시면, 말씀해 주세요.”
나를 침대에 눕힌 하르텐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 위에 살짝 얹어진 손바닥이 뜨거웠다.
접촉에 자동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자 하르텐이 쉬, 하며 달래듯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사이 왼쪽 가슴 위에 놓인 손가락은 유두를 느릿하게 굴리고 있었다.
어깨를 쓰다듬던 손을 뗀 하르텐은 대신 얼굴을 내려 어깨와 목이 이어지는 지점에 이를 세웠다.
“앗.”
이가 닿아오는 느낌에 놀라 짧게 소리를 내자 하르텐이 달래주듯 이로 물었던 부분을 혀로 핥아주었다.
수동적인 나와 달리 하르텐은 정해진 수순을 밟듯 자연스럽게 가슴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응……?”
아까부터 계속 간질거리던 왼쪽 가슴 대신 오른쪽 가슴에 혀가 닿아왔다.
혀로 느릿하게 유륜과 그 근처를 핥는 감각이 간질거리던 배꼽 근처에 확 불을 댕겼다.
혀를 세워 유두에 문지르다가 입을 벌려 가슴을 크게 한입 문다.
고개만 살짝 내리면 보이는 광경에 배가 아니라 온몸이 간지러운 것도 같다.
“다리, 벌려주세요.”
낮은 목소리가 노골적인 말을 내뱉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릿속에선 다리와 벌려, 두 단어가 함께 돌고 있었다.
“어서요.”
소곤소곤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았다.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몸 아래에 깔린 시트를 부여잡던 나는 시트로 아예 얼굴을 가려버리면서 다리에 줬던 힘을 풀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짧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굴을 가리던 시트가 치워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하르텐의 얼굴이 들어섰다.
한 뼘도 되지 않을 거리에서 마주 보는 하르텐은 누구라도 홀릴 만한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하르텐의 손가락이 은밀한 곳 근처에 와 닿았을 때에야 정신을 차렸다.
허벅지와 엉덩이를 느긋하게 쓰다듬으며 다리에 힘을 풀어내는 손이 다정했다.
“긴장하지 마세요.”
나긋하게 속삭인 하르텐은 엄지손가락으로 음핵을 문질렀다.
처음에는 가볍게 마찰할 정도로만 좌우로 쓸던 손가락은 내 반응을 한번 살피더니 강도를 점점 키워가기 시작했다.
“으응…….”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는데 계속 문질러질수록 아까 가슴에서 느꼈던 간질간질함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자 하르텐은 기다렸다는 듯이 탁자에서 통 하나를 꺼냈다.
“처음엔 조금 차가우실 거예요.”
“뭐, 뭐야……?”
“젤이에요.”
무서운 거 아니에요.
겁먹은 나를 달래는 목소리가 처음과 달리 꽤 누그러져 있었다.
젤 용기를 닫아 탁자에 올려둔 하르텐은 한 손으로는 아래를 벌리고 젤을 바른 다른 한 손으로는 음핵부터 아래의 질구까지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하르텐이 경고했던 대로 젤은 차갑고 미끌미끌한 느낌이 났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으나 하르텐이 더 빨랐다.
질구에 검지가 문질러졌다.
“…좁네요.”
…19금 소설 단골 멘트였다.
이 말을 하르텐의 목소리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때 하르텐이 허벅지 안쪽을 이로 살짝 물었다.
아직 여유가 있으신가 보네요, 하는 꽤 무서운 말과 함께.
내가 잠시 다른 곳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양쪽 허벅지를 물고 핥고를 반복하던 하르텐이 엉덩이를 들어 올려 자세를 조금 바꿔주는가 싶더니 손가락 하나를 더 들이밀었다.
아까보다 속도가 느려진 왕복 운동 대신 음핵을 누르는 손가락이 성감을 일으켰다.
입술을 물면서까지 소리를 삼키려는 내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르텐은 태연하게 새로운 도구를 꺼내 들었다.
흔히 에그, 혹은 로터라고 부르던 그것이었다.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하는 그것은 퍽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묘한 기대감이 들기 시작하는 것은.
“아, 앗…….”
음핵에 문질러질수록 의도치 않은 신음이 울렸다.
내가 점점 붕 뜨고 있는 기분이었다.
로터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본능적으로 허리가 튀어 올랐다.
“아, 아아, 으으응…….”
“…….”
싫은가?
아냐, 좋은 것 같기도…….
스스로도 헷갈려하며 마구잡이로 내뱉는데 하르텐은 묵묵부답이었다.
허리가 활처럼 휘고 신음 소리도 높아질 때, 딱 거기에서 하르텐이 갑자기 로터를 치웠다.
“…으응……?”
갑작스럽게 사라진 자극에 붕 뜬 허리가 침대로 툭 내려앉았다.
조금만 더 올랐으면 끝을 봤을 것 같은데, 아쉬움이 남았다.
나는 조금 원망하는 것 같은 눈으로 하르텐을 올려다봤다.
“아직은 안 돼요.
오늘은 이것도 써봐야 하거든요.”
숨을 헐떡이는 나와 달리 여전히 차분함을 유지하던 하르텐이 꺼낸 것은 남자의 성기를 본떠 만든 딜도였다.
“으읏, 그건 조금 무서운데…….”
불알의 모양까지 재현해 놓은 딜도는 내 눈에 퍽 위협적이었다.
하르텐은 제 손과 딜도의 크기를 비교해 주며 나를 안심시켰다.
이게 제일 작은 사이즈예요.
“입문용으로 제작됐거든요.”
…딜도에도 입문용이 있어?
알면 알수록 놀라운 문화였다.
그 놀라운 문화를 나는 지금 온몸으로 체험하는 중이었지만.
딜도를 다시 내려놓은 하르텐은 한껏 예민해진 음핵을 한번 툭 건드렸다.
그 짧은 자극만으로도 내 신경이 하르텐의 손으로 쏠렸다.
긴장하던 허벅지 근육이 꽉 조여들었다.
잠시 시들었던 감각을 다시 깨우려는 것처럼 하르텐은 질구에 손가락을 문지르며 가슴에 입술을 댔다.
“앗, 으응…….”
이제 세 개째예요.
조용히 속삭인 하르텐이 아까보단 압박감이 덜한 아래에 약지를 밀어 넣었다.
안이 벌어지며 미약한 통증이 뒤따랐다.
“아, 아파…….”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벌어진 아래는 미미한 통증이 이어졌고, 아까부터 하르텐이 물고 핥은 유두도 조금 따가운 것 같았다.
계속되는 통증에 칭얼거리자 아래에 밀어 넣었던 손가락을 뺀 하르텐이 대신 귓바퀴를 핥아 올렸다.
아래의 손이 물러가니 통증이 조금 잦아들었다.
들어온 이래로 내 옷만 벗겼던 하르텐은 처음의 그 흰 셔츠와 까만 바지 차림 그대로였다.
살짝 벌어진 흰 셔츠 사이로 드러난 몸이 단단해 보였다.
하르텐이 딜도에 젤을 문질러 바르는 사이 나는 하르텐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시 내게 몸을 돌린 하르텐은 나를 들어 제 허벅지에 앉게 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몸을 움직이니 그의 가슴에 등을 댄 채 반쯤 누운 자세가 되었다.
살짝만 고개를 내려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내 아래를 볼 수 있는 자세였다.
등에 비벼지는 근육들의 움직임이 맨살에 닿아 느껴졌다.
귓가에 닿는 숨소리도, 나긋하게 어깨를 쓸어내리는 손도 모두 다 유혹적이었다.
“다리 벌리세요.”
양손으로 내 허벅지를 들어 올리던 하르텐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제 손으로 하면 될 텐데 굳이 시키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양옆으로 밀어젖혔다.
“잘하셨어요.”
귓가에 닿는 숨이 한층 농염해졌다.
숨소리를 의식하는 나를 알고 있는 듯 하르텐은 잔뜩 긴장한 내 귀에 후, 숨을 불어넣었다.
“흡!”
“긴장 푸세요.”
허벅지에서 슬금슬금 올라온 손은 어느새 꽃잎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는 질 근처를 맴도는 손가락들에 겁먹어 언제라도 닫힐 준비 중이었다.
하르텐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질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안쪽에서 한 바퀴 돌렸다.
아까 바른 젤들이 남아있는 입구는 개폐 운동을 반복할 때마다 미끈미끈거리는 느낌이 났다.
손가락 하나는 부족하다는 듯 옴죽거리는 아래가 부끄러웠다.
내가 느낄 정도니 손가락을 넣고 있는 하르텐도 분명 느끼고 있을 터였다.
손가락을 아래에서 빼낸 하르텐이 음핵을 문지르며 조용히 속삭였다.
“잘 봐두세요.”
음핵을 문지르며 아까의 딜도를 꺼내 든다.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두께를 가진 딜도가 여전히 개폐 운동을 반복 중인 아래에 닿았다.
나는 눈을 돌릴 생각도 못 하고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 아으, 응…….”
“힘 풀지 않으면 더 아플 거예요.”
부피감이 엄청났다.
입구에 겨우 살짝 걸쳤을 뿐인데 손가락 두세 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벌려진 입구가 통증을 주장하는데 하르텐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파아…, 텐…….”
“조금만 더 참으면 아까처럼 기분 좋게 해드릴게요.”
하르텐이 두 손가락으로 잡은 음핵을 살짝 비틀자 그 와중에도 느낀 몸이 짧게 경련했다.
입술로 목을 지분거리던 하르텐이 이를 세워 물었다.
동시에 쥐고 있던 딜도를 전진시켰다.
“후으, 응…….”
조금만 더, 하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다급하다.
내가 계속 아프다고 칭얼거리니 하르텐도 조금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어내고 하르텐의 팔뚝에 두 손을 올렸다.
몸 안쪽이 계속 열리며 딜도를 받아들였다.
“다, 들어갔어요.”
“아…….”
무시할 수 없는 부피감이 아래에서 느껴졌다.
…정말 그 큰 게 다 들어왔단 말이야?
신기한 마음에 아랫배에 손을 올려보니 등 뒤에서 웃는 듯 진동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안 느껴지실 거예요.”
“으응, …앗, 버, 벌써 움직이게?”
“이대로 계속 계실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이제 겨우 고통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엄습할 고통이 두려웠다.
내가 조금 겁먹은 듯하자 하르텐은 어깨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더니 옆에 치워뒀던 로터를 꺼내 들었다.
“…응, 으응…, 흐앙……!”
볼록 솟아있는 음핵에 로터를 가져다 대자 식지 않은 몸이 금세 달아올랐다.
아까의 그 붕 뜨는 기분이 다시 찾아오고 벌려진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힐끗 올려다본 하르텐은 집중한 표정으로 로터를 여기저기에 문질러 보고 있었다.
딜도 주변을 한 바퀴 움직였던 로터는 다시 음핵에 돌아왔다.
나는 하르텐의 팔뚝에 올려진 손가락에 힘을 주며 허리를 뒤틀었다.
하르텐은 로터를 든 손을 고정하더니 딜도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으응… 응, 으읏……!”
딜도와 로터가 동시에 움직이며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든다.
로터만으로도 감각이 역치를 넘어서는데 딜도까지 합세하자 모든 감각들이 날뛰는 것처럼 무서울 정도였다.
등 뒤에 하르텐이 버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딜도와 로터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손을 계속 휘둘렀다.
하르텐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다음부터는 아가씨 취향대로 묶고 하는 게 어떨까요.”
“…흐으, 그, 그으, 거 내, 하응, 내 취향, 아니야아.”
…물론 묶여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왜 자꾸 도망가려고 하세요.”
기어이 시트를 발로 차며 하르텐에게서 반쯤 벗어났던 나는 딜도를 쿡 박아 넣는 손짓에 다시 무너져 하르텐의 품으로 질질 끌려왔다.
“하으으…….”
“좋아요, 아가씨?”
“흐앙, 앙, 아아…….”
조, 좋아아…….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다.
음핵을 흔드는 로터의 자극이 너무 강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쾌감은 뇌를 녹진하게 만들었다.
“잘하고 있어요.”
딜도를 크게 한번 뺐다가 끝까지 푸욱 박아 넣는 손짓이 무자비하다.
그 한 번에 허리가 크게 꺾였다.
“…뭐가, 이렇게…….
후.”
감각은 자꾸 나를 하늘 위로 붕 띄우는데 하르텐은 나를 쉽게 보내주지 않으려는 듯 중간중간 로터를 떼며 내 절정을 방해했다.
직전에 멈춰진 몸이 고통과 쾌감을 주장해 왔지만 내 반항을 원천 차단한 하르텐 탓에 쏟아지는 자극에만 몸이 계속 달아올랐다.
“후, …예쁘네요.”
다시금 목에 입술을 묻은 하르텐이 웅얼거렸으나 나는 벌써 세 번째로 절정의 문턱에서 현실로 돌려보내지는 중이라 전혀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로터 대신 음핵을 문지르는 손가락도 꼭 오르가슴 직전까지만 나를 괴롭히다가 사라졌다.
“하, 하으으…….”
왕복 운동을 하다 내가 가장 예민하게 느꼈던 부분을 하르텐은 집요하게 딜도로 문질러 왔다.
앞뒤로 빠르게 치고 빠지는 탓에 쾌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허벅지 근육에 힘이 한껏 모였다.
그 와중에도 하르텐의 손은 멈추지 않고 감각을 고조시켰다.
마침내 하르텐이 딜도를 짧게 뺐다가 한 점을 꾸욱 밀어 올리는 순간 온몸의 근육들이 수축하며 절정이 찾아왔다.
“…으으으…….”
“괜찮으세요?”
내가 눈을 감았다는 걸 눈을 뜨고서야 알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이자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하르텐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왔다.
“…나, 얼마나 잤어?”
“한 시간 정도밖에 안 지났어요.”
신음을 내질렀던 목이 꺼끌꺼끌했다.
한번 헛기침하며 몸을 일으키자 내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하르텐도 일어났다.
시트가 미끄러지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하르텐의 상체가 드러났다.
“너, 옷은……?”
“아가씨께 드렸어요.
슬립이 찢어진 거 같아서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게 셔츠가 입혀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위를 조금 둘러보니 슬립의 잔해가 소파에 걸쳐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르텐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 천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아가씨.”
“…으응?”
내가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도 못 들고 있는데 가라앉은 목소리의 하르텐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손에 파묻었던 얼굴을 살짝 드니 착잡한 표정을 한 하르텐이 보였다.
“왜?”
“토네이도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토네이도면… 네가 있던 바?”
끄덕여지는 고개가 무겁다.
내내 고수하고 있던 무표정이 거둬진 하르텐은 조금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배려가 부족했음을 알았다.
토네이도 바는 하르텐이 평생을 살아온 공간이었다.
게다가 그곳엔 하르텐의 어머니가 아직 남아계시지 않은가.
조금 충혈된 눈에서 하르텐이 얼마나 고민했는지 흔적이 엿보였다.
전 주인이 좋은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나타나 거길 차지한 귀족 영애가 더 나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날 이후로 하르텐과 나는 별달리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토네이도에 대한 얘기는 오늘 처음 나누는 것이었다.
“아…….”
“…….”
그때 당시에는 베로를 구해 하르텐의 호감을 얻을 생각으로 했던 행동인데, 지금 돌아보니 그저 철없는 귀족 영애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내 복수를 위해 그의 미래도 완전히 바뀌지 않았는가.
그 순간 나는 그에게 몹시도 미안해지고 말았다.
마음을 바쳐 사랑할 사람에게 구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내 하찮은 복수로 그의 운명이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데이지 퀴니에게 엿 먹이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이 복수에 휘말린 그의 운명에 대한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나는 토네이도 바를 없앨 생각이야.”
“바를 없앤다고요……?”
“응, 그 자리에 다른 건물을 세울 거야.”
하르텐은 몹시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표정 대신 다채로운 표정들이 생긴 하르텐은 그제야 내 또래처럼 보였다.
예전부터 막연히 생각 중이던 일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토네이도 바에 직접 찾아가게 되면서 그 위치가 그 일에 매우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생각 중인 일이 시작되면 토네이도 바에 있던 사람들을 고용하려고 해.
내가 일자리를 빼앗아 버렸으니 다시 돌려줘야겠지.”
“그럼 바를 목적으로 오신 게 아니…셨다고요?”
이 질문에는 확실하게 답할 수 있었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내 목적은 너를 찾는 거였어.
바는… 우연히 사게 된 거고.”
“그럼 저를 어떻게 알고 찾으신 거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이 막혔다.
하르텐을 어떻게 알았냐니, 쉽게 대답하기 힘든 문제였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충 말을 풀어냈다.
“나는 사실 약혼자가 있었어.”
“……!”
“그런데 약혼자가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났거든.”
하르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
개인적인 이야기에 조금 당황한 것도 같았다.
“나는 그 두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어.”
“제가…, 어떻게?”
“그 여자가 너처럼 생긴 사람이 취향이라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