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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송의 새벽 (1)
다음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나는 밤새 하르텐에게 시달리느라 지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비가 창문을 치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리자 마음이 절로 평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바람이 차네요.”
“그래도 열어줘.”
창문을 열다 말고 가넷이 걱정스레 돌아봤지만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눅눅한 비 냄새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따뜻한 차로 드릴까요?”
그러면 좋고.
창문가에 티 테이블을 두고 자리를 잡자 가넷이 다과와 찻잔을 내려둔다.
오전 식사는 늦잠 자느라 먹지 못했으니 이 다과들이 내 첫 끼니인 셈이었다.
“텐은 집사님께 들렀다가 온다더라고요.”
“그래?
집사가 무슨 일이지…….”
집사와 텐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며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집사가 내 클로버를 부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가넷도 그 이상은 모른다고만 했다.
“마지막 오전 티타임이 황실 파티 전이었던가?”
“음…,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가넷이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내 눈치를 살피는 가넷 덕에 깨달았다.
내 마지막 티타임에는 헤일로 카르트가 있었다.
“…그러네.
카르트 공자가 찾아왔었던 그날이 마지막이었어.”
“아가씨…….”
파티에서의 참상이 떠올랐는지 가넷이 울상을 지었다.
그날 나만큼이나 충격받았던 사람이 가넷이었다.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만큼 나는 가넷에게 내 마음을 전부 털어놨었다.
가넷은 나 다음으로 내 감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가씨는, 이제 괜찮으세요?
그, 그분을 떠올려도…….”
나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쉽게 사그라졌을 마음이면 파혼하자는 내 말에 매달리는 헤일로 카르트를 그 자리에서 쫓아냈었을 텐데.
찻잔으로 애써 시선을 돌리자 입가의 웃음이 버석하게 말랐다.
“…글쎄.”
가넷은 제가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 자책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애써 웃으며 비가 와서 그런가 보다, 하며 가넷을 물렸다.
혼자 남은 방 안에 쓸쓸한 적막이 흘렀다.
그때 하르텐의 방과 이어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사에게 갔다던 하르텐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침대 옆에 달려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하르텐의 방에 있는 종을 울리는 줄이었다.
하르텐이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왔어?
이쪽으로 올래?”
“네.”
낮의 하르텐은 이토록이나 고분고분히 나를 따르는데, 밤만 되면 어쩜 그리 성격이 변하는지 모르겠다.
부러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런 하르텐을 볼 때마다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찻잔을 들어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는 사이 하르텐이 내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는 내가 요구하지 않으면 함부로 시선을 맞추지도 않았다.
이렇게 같은 티 테이블에 앉아있음에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내 손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어.”
하르텐과 나는 주로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오후 티타임이 끝난 직후부터 저녁 먹기 전까지의 시간 동안 그와 나는 함께 책을 읽었다.
처음엔 첫날 밤, 불안한 얼굴로 내게 묻던 하르텐에게 미안해서 만들게 된 시간이었다.
어차피 나는 이 시간을 독서를 하며 보내곤 했었기 때문에 하르텐을 불러 대화를 나눈 뒤 남는 시간에 책을 읽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 둘은 여기 앉아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덕분에 하르텐과 나는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내 취미라든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 가끔 하르텐이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전 약혼자 이야기도 한두 가지 정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르텐도 내게 적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하르텐의 과거에 있었던 짤막한 일화라든가 베로에 대한 것, 혹은 주로 뭘 하고 지냈는지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은 둘만 같은 공간에 남겨져도 꽤 편안히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첫날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도 못 들고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
“좋은 소식이 있어서 불렀어.”
“좋은 소식…, 이요?”
하르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는 특유의 무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가끔 이렇게 보여주는 표정들이 기껍다.
“응, 토네이도에 얼마 전에 손님이 찾아왔다더라고.”
“손님……?”
바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하르텐은 그게 왜 좋은 소식인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 원작에서 하르텐이 엔데버 제국의 황자라는 떡밥을 흘렸던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이맘때는 하르텐이 데이지에게 구해져 퀴니 공작가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하르텐이 토네이도 바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엔데버 제국의 홀란 자작이었다.
그는 대대로 엔데버의 황제를 따르는 충신 가문의 가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명을 받아 몰래 우리 제국까지 잠입했으리라.
아무튼 그가 토네이도 바에 들러 하르텐이 황제의 자식이며 엔데버의 황위 계승자가 사라져 그가 필요하다는 폭탄을 하르텐의 어머니 레일라에게 던져놓고 간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데이지 퀴니는 클로버라는 신분보다는 황자라는 신분의 하르텐이 제게 더 가치 있다며 하르텐을 엔데버 제국으로 보내주고, 하르텐은 데이지를 위해 신분을 찾으려 노력한다는 게 하르텐의 주 스토리다.
지금 나는 그 이야기의 시작 부분인 홀란 자작의 방문에 대한 소식을 어제 전해 들었던 것이다.
“네가 엔데버 제국의 황자라면서 홀란 자작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었어.”
“…….”
가만히 듣고 있던 하르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내게 다급하게 물었다.
“누, 누구…, 혹시 어머니께 말씀드린 건…….”
“아, 아니, 손님 접대는 벨라에게 시켰어.”
원래대로라면 그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레일라였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일라 대신 벨라를 그 자리에 내보내고 레일라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손써뒀다.
원작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레일라가 마음의 병을 얻어 병상에 누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몸져누웠던 레일라가 결국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하르텐을 위해 작은 안배를 두었다.
“아…….”
하르텐은 조금 안심한 기색으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 손에 시선을 고정한 하르텐이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 수 없다.
원작의 하르텐은 자신의 원래 신분이 엔데버 제국의 황자라는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었는데…….
의외의 반응에 되레 당황스러운 것은 나였다.
“어…, 안 기뻐?”
“기쁘다뇨?”
내게 되묻는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왜 기뻐해야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되레 내가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버지를 찾았잖아!
게다가 옆 제국의 황자라면 클로버라는 신분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걸.”
이번에는 확실히 예상치 못했던 발언임이 틀림없었다.
찻잔을 잡은 하르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저를…, 버리실 건가요?”
“버리다니, 말을 왜 그렇게 해.
네가 있을 곳으로 보내주는 거잖아?”
그 자리는 하르텐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다.
또한 마땅히 찾아야 하는 것이었고.
그의 운명 일부는 내가 빼앗아 버렸지만 이것만큼은 돌려주고 싶었다.
하르텐이 내 복수에 휘말려 데이지 퀴니에게 구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그 대신 하르텐의 신분을 되찾는 데 최대한 돕겠다고 생각했다.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것을 알았어도 레일라를 살리고, 원작에서 하르텐이 어렵게 되찾아야만 했던 신분을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면 그걸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는 가고 싶지 않아요.”
“응?”
그렇지만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는 계속 여기 남아있고 싶어요.”
옆 제국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마차를 타고 두 달은 걸릴 거리였다.
일반인이라면 전혀 갈 일이 없는 곳.
하르텐에게 고향인 이곳을 떠나라는 말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데이지 퀴니가 가라고 했을 때 하르텐은 기쁘다는 듯 웃으며 옆 제국으로 떠났다.
그는 지금 겁을 먹었을 뿐이다.
결국 그곳으로 가고 싶을 거란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꽤 멀고, 낯선 곳이겠지.
그렇지만 텐, 황자라는 신분은 쉽게 볼 것이 아니야.”
“…….”
“네가 황자가 되면 나 같은 후작 영애는 언제든지 슥삭할 수 있는걸.”
조금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자 농담처럼 뱉었는데, 잠시 인상을 찌푸렸던 하르텐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응?
…갑자기 내 목에 관심이라도 생긴 거니……?
“큼큼, 아무튼 한 번밖에 없는 기회야.”
하르텐의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생각에 잠긴 하르텐을 두고 나는 접시에 올려진 마카롱을 하나 집어 들었다.
“엔데버 제국의 황자라면 공자보다 높은 신분인가요?”
“…응?
그, 그렇지.”
나는 오물오물 씹던 마카롱을 얼른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텐의 마음이 기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비교 대상이 공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
“가겠어요.”
좋아!
나는 잘 생각했다며 하르텐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러나 하르텐은 도리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축하해 줘도 왜 저런 표정이야?
“아가씨는, 제가 떠나는 게 아무렇지 않으세요?”
“응?
나?”
나를 가리키며 고개를 기울이자 하르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텐이 떠나면……?
“잘된 거잖아?
황자라는 신분에, 앞으로 내 시중 들 일 없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
“내가 도울 수 있어서 정말 기뻐.”
들었지? 내가 이렇게 너를 도우려고 노력 중이란다!
하는 어필을 열심히 하는데 하르텐의 얼굴은 점점 뭐 씹은 표정이 되어갔다.
…연기가 티 난 건가?
“…가면, 저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내가 기억하기로 원작의 하르텐은 소설이 끝나갈 무렵에야 겨우 얼굴을 비췄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됐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을 뒤지며 하르텐의 마지막을 떠올리려고 노력 중인데 표정을 확 굳힌 하르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응?
어…, 으응.”
깜짝 놀라 하르텐을 쳐다봤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차 없이 고개를 돌린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이 하르텐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나는 잠시 놀랐지만 심란해서 그런가 보다 하며 넘겼다.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는데 그럴 수도 있지.
절로 수긍되는 이유였다.
* * *
“그걸 구하셨다고요?”
“그래, 조금 고생하긴 했다만 우리 딸 부탁인데 안 들어줄 수 없지.”
너털웃음을 터트린 아버지가 눈을 찡긋거리셨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아버지를 와락 껴안았다.
“고마워요, 아빠!”
며칠 전부터 아버지라는 호칭에 틈틈이 불만을 제기하셨던 게 기억나 아빠라고 불러드리자 마주 보는 얼굴이 금세 활짝 폈다.
“로지, 이 오빠도 고생 좀 했는데…….”
옆에 서있던 케드릭이 은근슬쩍 나서며 아빠와 나를 떼어놓았다.
굳이 오빠라고 칭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나는 선심 쓰듯 케드릭도 껴안아 주었다.
“오빠도 고마워.”
원래라면 각 지부로 물건을 운반하는 상단이 물건을 구해 돌아오기까지 두 달여의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물론 당장은 급한 대로 쓰고 있는 다른 게 있었으니 그 정도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케드릭이 나섰다.
그 근처로 기사단이 파견 나갈 일이 있다며 오는 길에 그 물건을 사 올 수 있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정보를 토대로 케드릭이 움직였고 한 달 만에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런데 로지, 칼라일의 목걸이는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 거니?”
내가 구해달라고 한 물건의 이름은 칼라일의 목걸이였다.
칼라일은 지금으로부터 두 세기 전에 존재했던 대마법사의 이름이다.
목걸이는 그가 죽기 직전에 만든 마도구로, 착용하고 있는 사람이 위험할 때 실드를 씌워주는 기능이 있었다.
이 목걸이는 당연하게도 데이지 퀴니가 마법사를 보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착용하는 목걸이는 신전에서 축복을 받은 성물 중 하나였는데,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칼라일의 목걸이를 구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두 세기 전 마탑의 마법사들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는 칼라일이라는 대마법사의 출현으로 마법사들이 칼라일을 따르는 이와 마탑주를 따르는 이, 두 무리로 나누어졌기 때문이었다.
마탑주 역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간 최초로 대마법사의 칭호를 단 칼라일은 마탑주보다 더 뛰어난 마법을 선보였다.
그러나 칼라일의 신분이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로들이 그를 마탑주로 받아들이지 않자 마법사들 사이에 파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정작 두 수장인 칼라일과 마탑주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음에도 서로의 무리를 견제하던 마법사들은 대륙에 혼돈을 몰고 올 마법 전쟁을 선포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마법들이 난사되며 땅은 황폐해져만 갔다.
아무런 능력 없는 이들이 많이도 죽은 시기였다.
이 시기를 역사책은 혼돈의 시대라고 칭한다.
그 전쟁으로 대부분의 마탑 마법사들은 처단당했고 지금은 마탑의 언급을 오히려 금기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칼라일의 목걸이를 구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었다.
마법 전쟁의 원인이 된 칼라일은 모든 역사책으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했기 때문이었다.
칼라일의 목걸이가 저주의 목걸이라는 이름으로 경매장을 헤매게 된 것도 그 탓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해서 구해야만 했고.
“…칼라일의 목걸이는 모든 마법사의 공격을 막아준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의아해하는 케드릭과 달리 아빠는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 순간 그 눈매를 보며 하르텐을 떠올려 내고 말았다.
내가 관계 중에 딴생각을 할 때면 하르텐이 그런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는데…….
“로지?”
“헉, 아, 아니, 그…….”
스스로의 생각에 놀라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데 케드릭이 진정하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겨우 하르텐의 잔상을 지워냈다.
“혹시 위험할 일이 있을까 해서요…….”
“…너를 위협하는 마법사가 있니?”
지금 공식적으로 제국에 존재하는 마법사는 단 두 명뿐이었다.
데이지 퀴니에게 빠져있는 마탑주는 데이지 퀴니만 알고 있기 때문에 제외.
그 두 명은 황실에 근무하는 황실 마법사들이다.
마탑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면서 평민들은 마나가 불길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때문에 마법사의 기질을 보이는 아이들은 길거리에 버려지는 시대였다.
그러나 귀족으로 태어나는 경우 그들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가 생긴다.
황실 마법사들에게 제자로 보내며 그들과 연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황실 마법사들을 여럿 두지 않으니 운이 좋아야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런 마법사들이 나이트 가문의 영애인 나를 위협한다고?
절대 불가능할 일이었다.
“아뇨, 제가 마법사를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데이지 퀴니만 아니면 말이죠.
나는 뒷말을 삼킨 채 그저 웃었다.
다행히 단순한 케드릭은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물론 아빠는 아예 시선도 주지 않았다.
분명 눈을 마주했다면 모든 속내를 알아차릴 분이시니까.
나는 겨우 상황을 수습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방으로 향하는데 저 멀리 하르텐이 코너를 꺾어서 오는 것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기뻐 인사하러 다가가는데, 하르텐이 걸음을 돌려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
그 순간 나는 요 며칠의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고 말았다.
하르텐은, 나를 피하고 있었다.
왜 날 피하지?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하르텐이 나를 피하게 된 연유가 전혀 짐작 가지 않았다.
* * *
“아가씨, 파티 초대장이 왔어요!”
“…나한테?”
헤일로 카르트에게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받은 후 나는 하르텐을 데리러 간 일 말고는 저택을 나서지 않았다.
그날 파티에서의 수군거림은 분명 다음 날 일면식도 없는 모든 귀족에게까지 퍼졌을 터였다.
게다가 며칠 안 되어 파혼까지 했으니 얼마나 씹기 좋은 주제인지.
안 봐도 사교계의 입소문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대외적인 행사도 나서지 않았고, 쏟아지던 초대장 세례도 멎어 이제는 어떤 파티에서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초반에야 소문의 주인공을 모셔다 씹기 좋은 이야깃거리를 줍고자 하는 의도였겠으나 지금의 나는 그저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후작 영애에 불과하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헤일로 카르트와 데이지 퀴니가 본격적으로 스캔들을 일으키기 전이라서 원작만큼 파장이 엄청 크지는 않았다는 정도일까.
“네!
여기, 파라한 백작 부인께서 보내셨다고 써있어요.”
파라한 백작 부인은 어머니의 오랜 친우분이셨다.
이번 일로 저택에 틀어박힌 날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가 청하신 것일지도.
나는 조금 편안한 기분이 되어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그러네, 사흘 뒤의 파티에 초대하시겠다고 하...
“아가씨, 꼭 참석하실 거죠?
그죠?”
벌써부터 날 꾸밀 생각에 신이 난 가넷의 얼굴을 보니 절로 웃음이 흘렀다.
파라한 백작 부인이라면 어릴 때부터 종종 뵈었으니 괜찮겠지.
나는 가넷의 말에 긍정했다.
“너무 잘됐어요!
안 그래도 아가씨께 잘 어울릴 것 같은 드레스를 발견했거든요!”
가넷이 틈틈이 들여다보던 카탈로그를 가져왔다.
내가 자주 가는 의상실에서 보내온 이번 달 신상 카탈로그였다.
내가 더 이상 밖을 나갈 생각도 않는데 이건 왜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가넷과 조잘조잘 드레스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이번 유행은 긴 리본을 허리에 묶어 포인트를 주는 것 같아요.”
“그러게, 리본이 정말 많이 보여.”
머리를 맞대고 카탈로그를 넘기는 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더 이상 헤일로 카르트와 데이지 퀴니를 떠올리며 마음 졸이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행복한가.
가넷과 밤이 늦도록 드레스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잠에 들었다.
그날 밤 꿈에는 헤일로 카르트가 나왔다.
헤일로 카르트가 나를 원망하며 돌아서는 악몽이었다.
“아가씨, 파라한 백작 부인으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응?
어제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나?”
“제가 집사님께 말씀드렸으니 분명 보내셨을 거예요.”
시종이 실수해 초대장을 두 통 보낸 게 아니라면, 오늘은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며 페이퍼 나이프를 들었다.
사각사각, 익숙한 소리가 나며 편지 봉투가 벌어졌다.
편지는, 당연하게도, 어제 받았던 초대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 의외의 소식을 담고 있었다.
“…클로버와 동반 참석?”
“네?
정말요?
그럼 파티가 아니라 샴록이겠군요!”
샴록은 클로버와 함께하는 파티였다.
가끔 색다른 파티를 즐기고 싶을 때 여는 사교 행사의 일종이었다.
샴록을 여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어제까지는 평범한 파티였던 것이 오늘 갑자기 바뀐 것은 조금 의아스러웠다.
나는 다시금 편지를 이리저리 뒤집어 봤다.
아무리 봐도 어제 받았던 편지지와 재질도 같고, 봉투에 새겨진 인장도 파라한가의 것이 맞았다.
파라한 백작 부인이 변덕을 부리신 건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금 참석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내라고 하려다 멈칫하고 말았다.
…하르텐이 나와 같이 가려고 할까?
나는 하르텐의 방문에 시선을 뒀다.
하르텐이 나를 피한 뒤로 단 한 번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아빠한테 토네이도 바에 대한 은밀한 뒷조사를 부탁드렸더니 도와달라는 핑계로 하르텐을 데려가 버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오늘은 하르텐이 새벽부터 나갔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나는 아빠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잘한 일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토네이도의 뒷조사는 전적으로 하르텐을 위한 것이었다.
원작에서 엔데버의 고위 귀족들이 대부분 그를 의심해 황자로 인정하는 것을 반대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엔데버에 간 뒤 황족 모독죄부터 시작해서 온갖 고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황제는 하르텐이 탐탁지 않았는지 그를 돕지도, 방해하지도 않았고.
결국 하르텐은 스스로의 힘으로 혈통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토네이도 바부터 시작해서 엔데버 제국에 대한 정보까지 긁어모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도록 준비해야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엔데버의 귀족들이 사사건건 방해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쉽지 않은 길이 가시밭길이 되었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토네이도 바에 대해 미리 조사를 부탁해 둠으로써 하르텐의 앞길을 조금 더 닦아주려 했다.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의 뒤에는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내가 원한다고 말했던 것을 대부분 이뤄주셨다.
시작은 파혼이었고 그다음은 칼라일의 목걸이, 마지막으로 토네이도 바까지.
아버지는 내가 토네이도에 과한 관심을 쏟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내가 맡기엔 위험하고 (정신적으로) 좋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때문에 나는 아버지에게 토네이도를 아예 맡겨버렸다.
토네이도를 헐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까지만 아버지가 관리해 주시기로 하신 것이다.
하여 나는 간간히 아버지에게 바의 소식을 전해 듣고 조그만 사항들에만 말을 보태는 정도로만 바의 경영에 참여해 왔다.
그래서 홀란 자작이 하르텐이 황자임을 흘렸던 것은 나보다 아버지의 귀에 더 빨리 들어갔다.
아마 나에게 이야기가 전해지기까지 걸린 시간 동안 아버지도 깊게 생각해 보셨을 것이다.
그 결과가 하르텐을 엔데버로 보내고 싶다는 내 의견에 대한 동의였다.
하르텐에게 꽃길을 깔아주려는 내 안배에 대해서는 조금 의아해하긴 하셨지만.
어쨌거나 하르텐이 내 클로버로 있었다는 것은 우리 가문에게나 하르텐에게나 들켜서 좋지 않을 일이라며 하르텐과 거리를 두라고 하셨던 게 이틀 전이었다.
나는 샴록 초대장을 내려다보며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가넷, 텐을 불러와 줘.
얘기를 해봐야겠어.”
가넷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르텐을 찾아 방을 나섰다.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가씨.”
“으으응…….”
“일어나세요, 아가씨.”
나직한 저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가넷 목소리가 이렇게 낮았던가?
비몽사몽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무너진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듯 허리와 어깨에 손이 닿아왔다.
불쑥 가까워진 몸에서 익숙한 향이 났다.
“아가씨.”
“…텐?”
정신을 차리고 나니 하르텐이 한쪽 무릎을 소파에 댄 채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남아있던 잠이 훌쩍 달아났다.
불에 덴 것마냥 내가 놀라자 하르텐이 몸을 일으켜 세 발자국 멀리 떨어졌다.
“저를, 부르셨다고 하셔서…….”
“앗, 맞다.
잠깐 잠들었네.
거, 거기 앉을래?”
허둥지둥 머리를 다듬고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자 비어있던 찻잔에 차를 따라 내 앞에 둔 하르텐이 자리에 앉았다.
“내, 내가 부른 건, 그게…, 파라한 백작 부인께서 파티 초대장을 주셨는데, 파티가…….”
“…샴록 말씀이시군요.”
하르텐이 망설이는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가넷이 말한 건가?
눈이 무의식중에 가넷을 찾아 방 이곳저곳을 훑었으나 가넷은 방 안에 없었다.
하르텐과 나, 두 사람뿐인 티타임이었다.
“맞아.
…샴록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너는 어때?”
“…네?”
“혹시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는 의미에서…….”
소소한 사교 행사에 하르텐이 굳이 얼굴을 팔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황자라는 신분을 되찾을 생각이라면 오히려 이건 독이 되는 제안이 아닌가.
혹시라도 클로버와 동반 참석 불가능한 경우를 생각해 파티에 불러둘 클로버들 중 한 명을 선택해도 된다.
오히려 그런 것을 샴록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영애들도 많으니 흉이 될 일도 아니었고.
“…제가 안 가면 아가씨는 누구와 파트너를 하실 건가요?”
“파라한 백작 부인께서 부른 클로버들 중 아무나와 있으면 돼.
원래 다들 그러는걸.”
심지어 그들은 서로의 클로버들을 하룻밤만 바꾸는 유흥도 즐기곤 했다.
그 뒤의 일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어쨌거나 심야에 열리는 파티란 원래 그런 거니까.
나는 거기까진 의욕이 없으니 1부만 즐기다 적당히 자리를 비워야지, 하며 생각했다.
어차피 1부가 지나면 대부분 인사불성에 방을 찾아 나서기 바쁘니 나 하나 연회장에 없다고 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었다.
“…….”
내 대답을 들은 하르텐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갈게요.”
“응?
진짜?”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다시 되물었지만, 하르텐은 단호했다.
정말로 가야겠냐는 내 물음에 되레 이럴 거면 왜 물어봤냐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래도, 지금 내 클로버는 너니까…, 일단 물어는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렇군요.”
무뚝뚝하게 그 말만을 남긴 하르텐은 또 말이 없었다.
…요즘 하르텐이 변한 것 같아.
나는 침잠한 분위기에 조금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침묵이 한참 흐른 뒤의 우리 둘은 무척 불편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침묵을 먼저 끊어낸 것은 하르텐이었다.
“아가씨.”
“응?”
“만약 제가, 없더라도…….”
그 순간, 입을 여는 하르텐의 표정이 퍽 비장해 보인다.
나는 가만히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하르텐이 없을 때라면 그가 엔데버로 떠난 뒤의 이야기인가?
“저는… 아니에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뱉어낼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면서도 하르텐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하르텐은 언제나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게 내뱉지 않았다.
그것이 하르텐 나름대로의 배려인지, 혹은 아직 남아있던 경계심의 발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삼킨 감정이 미미하게 남아있는 눈은 언제나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그가 삼킨 모든 말을 표현하려는 듯이.
나는 가만히 하르텐의 시선을 좇았다.
그의 시선의 끝에는 늘 내 손이 있었다.
나는 하르텐을 따라 특별할 것 없는 손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가넷이 주기적으로 관리해 주는 손톱, 상처 하나 없는 손등, 그리고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보였다.
반지, 새삼스러운 기분에 반지를 빤히 들여다봤다.
헤일로 카르트와 약혼하며 나눠 꼈던 반지였다.
…이제는 별 의미도 없어져 버린.
생각난 김에 뺄까, 하는 순간 하르텐이 내 손을 잡아왔다.
“약혼…, 반지인가요?”
“응.”
숨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나에게 직접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던 하르텐이니, 이제 더 이상 저 반지에 별 의미가 없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붙잡힌 손을 샅샅이 훑어보는 그를 관찰했다.
늘 그렇듯이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얼굴이 내 손에 집중한다.
손가락 사이를 느릿하게 문지르는 손길.
…나도 이제 미친 걸까.
이런 단순한 접촉에 야한 생각이 들다니.
아니면, 상대가 하르텐이라서?
“제 연회복은, 아가씨와 같이 맞추나요?”
“…으응?
그렇지.
파트너니까.”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자 하르텐은 웃는 것처럼 눈매를 휘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하르텐도 입을 건데 너무 나한테만 맞추나?
갑작스레 드는 생각에 나는 가넷과 들여다보던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어젯밤 머리를 맞대며 고른 드레스 몇을 짚어주며 어떤 색이 괜찮냐고 물었더니, “뭐든, 다 잘 어울리실 거예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표정으로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거라곤 전혀 예상도 못 해서 순간 당황한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고 말았다.
…아니, 그거 말고, 너랑 어울릴 색을 물어본 거야.
겨우 표정을 수습하고 대화를 잇자 아까보다 확연히 관심이 사라진 얼굴이 나를 향했다.
왜 본인 옷에 더 관심이 없는 건지.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카탈로그를 다시 펼쳤다.
“가면…을, 쓰겠다고요?”
“네.”
옆에서 내가 가면은 아빠가 보냈다며 한마디 거들었다.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가넷은 가리는 게 아쉽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가면을 들고 망설였지만, 하르텐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가면을 건네주게 됐다.
물론 나는 옆에서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치장에 있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 못 하는 가넷에게 가면이라니, 아빠가 아니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다.
내 치장을 마치고 하르텐의 복장을 돌아봤다.
내 금빛 드레스와 맞추기 위해 하르텐은 검은색을 바탕으로 하고 금색 자수가 들어간 정장을 입었다.
오늘을 위해 나와 함께 가넷의 팩 세례를 받은 하르텐은 얼굴에서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곧 가면에 가려진다는 게 순간적으로 아쉬워질 만큼.
하르텐은 가넷이 내민 가면을 받자마자 바로 착용했다.
파티에 가는 것이 하르텐의 선택이었음을 아는데도 가면 쓴 모습을 보고 있으니 걱정스러웠다.
가면무도회에 여러 번 참여해 봤던 나로서는 가면들이 생각보다 편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내가 가면을 보며 안절부절못하자 하르텐이 나를 에스코트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파티에 참석하기로 결정한 날부터 집사에게 가서 배워온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주 손을 내밀었다.
“…불편하면 언제든지 말해야 해.
테라스에라도 가서 쉬면되니까.”
“네.”
마차에 탑승해서 파라한 백작저로 가는 내내 나는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읊었다.
나중에는 잔소리로 변질된 그 많은 말들을 하르텐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가끔 가면 사이로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웃음기가 서린 눈이었던 것 같지만, 다시 쳐다보면 그런 기색은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가까운 거리라 10분 만에 마차가 멈춰 섰다.
먼저 내린 하르텐이 다시 한번 손을 내민다.
하르텐에게 반쯤 가려진 집사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저 손님이 잘 내리는지 확인차 바라본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는데도 자꾸만 집사가 소문의 영애를 확인하려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내 앞뒤의 귀족들이 쏟아내는 날 선 시선들 때문일 수도 있고.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소문 따위에 휘둘리지만은 않겠다, 는 나름대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여전히 많은 시선들이 나를 찔러왔지만, 맞잡은 손에 은근하게 가해지는 압박이 하르텐의 위로인 것만 같아 마음이 조금 풀렸다.
마주 쥔 손이 따뜻했다.
어머니와 영애 시절부터 친우였다는 파라한 백작 부인은 어릴 때부터 나와 종종 교류가 있었다.
파티장으로 향하는 동안 어머니의 손을 잡고 파라한 백작저로 티타임을 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이트 영애,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백작 부인.
오랜만에 뵈어요.”
내가 헤일로 카르트에게 반한 뒤로 내 모든 사교계 일정은 헤일로 카르트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므로, 파라한 백작 부인의 파티에도 무척 오랜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영애는 커갈수록 달리아와 닮아가는군요.
피부도 어쩜 이리 고운지.”
“칭찬 감사해요, 부인.
…아참, 이쪽은 제 클로버 텐이에요.”
나는 수줍게 웃으며 우리 둘의 대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르텐을 주제로 끌어왔다.
가면 쓴 얼굴에도 그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백작 부인은 나와 조금 더 담소를 나눈 뒤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파티장 반대편으로 사라지셨다.
나는 하르텐과 가넷에게 배시시 웃어 보였다.
“우리도 이제 파티를 즐기러 가보자.”
“아가씨, 그전에 화장 한 번만 고치러 가시면 안 될까요?”
어느 순간부터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가넷이 냉큼 끼어들었다.
나는 가넷의 시선이 내 왼쪽 볼에 고정된 것을 보며 가넷의 레이더가 가동을 시작했구나 싶어 고개만 끄덕였다.
금세 얼굴이 핀 가넷이 나를 휴게실로 이끌었다.
하르텐도 묵묵히 내 뒤를 따랐다.
“…….”
“…….”
지금 나와 하르텐은 휴게실 소파에 마주 보며 앉아있었다.
화장을 고쳐주겠다며 나를 여기까지 이끈 가넷이 가장 필요한 도구가 없다며 마차로 찾으러 갔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우리 두 사람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소파에 멀뚱히 앉아 가넷을 기다리기만 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하르텐과 나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르텐은 휴게실에 들어와서 소파에 앉은 그 뒤부터 단 한 번의 미동조차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나는 괜한 답답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섰다.
시원한 공기라도 마시며 이 어색하기만 한 기류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이었다.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서자 밤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그 광경을 관찰하고 있으니 등 뒤에서 하르텐이 뚜벅뚜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가씨.”
평소와 같은 호칭으로,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짓고 나를 부르는 하르텐이 그 순간에는 왜 그리도 낯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늘 내 시선을 붙잡아 두는 눈동자에 잠시 홀렸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이 휴게실에 들어온 뒤로 하르텐과 시선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달빛으로 밝혀진 그의 얼굴은 미미한 붉은 기가 맴돌고 있었다.
하르텐이 한 발 더 다가오며 고개를 내 어깨에 파묻었다.
어쩐지 응석 부리는 어린아이 같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이 손안에서 흩어졌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하르텐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금 시선을 마주해 왔다.
심해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집요하게 내 시선을 옭아맨다.
나는 어쩐지, 하르텐이 내게 키스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만약 그 직후 내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다면.
“데이지.”
“어때요, 헤일로?”
데이지 퀴니와 헤일로 카르트의 목소리였다.
위층인 것 같은데…….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방금까지 내 주변을 맴돌던 미묘한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데이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기쁩니다.”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내가 알아채지 못한 사이 자라 오른 질투가 머릿속을 좀먹었다.
“가면을 잘 고른 것 같아요.
아무도 의심하지 않겠는걸요?”
“…그렇군요.”
“이제 그만 입장해요.
파라한 백작 부인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에스코트하겠습니다.”
기쁘다는 듯 꺄르르 웃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이를 악물어 겨우 감정을 삼켜냈다.
하르텐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한다.
“아가씨의…….”
“전 약혼자지.
이제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딱 잘라 말하자 하르텐이 묵묵히 나를 끌어 제 품에 안았다.
“그 옆엔 데이지 퀴니인 것 같아.”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이자 네 운명이지.
차마 뱉지 못할 말을 홀로 되새겼다.
여태껏 단단했던 하르텐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인상을 일그러트린 채 그들이 있었던 테라스를 빤히 노려본다.
그 순간 선득한 기운이 심장을 스쳐 지나갔다.
꽁꽁 언 손이 심장을 한번 쥐었다가 놓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오늘의 샴록은 남자 귀족들을 초대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요?”
누구든 걸리면 물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하르텐이 으르렁대며 물었다.
나는 겨우 초대장을 떠올려 냈다.
“그랬…던 것 같아.”
“그렇다면 백작 부인께 알려요.”
하르텐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조금 망설였다.
내가 지금 파라한 백작 부인에게 말해서 이 사실이 밝혀지면 데이지 퀴니든 헤일로 카르트든 둘 다든, 분명 크게 망신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원작에 전혀 나오지 않았던 일이었다.
내가 섣불리 나섰다가 데이지 퀴니가 제 사교계 평판을 이용한다면 내가 되레 당할 수도 있다.
심지어 상대는 얼마 전 스캔들이 난 커플이고, 나는 그 커플을 방해할 악역 포지션의 전 약혼녀잖은가.
내가 망설이기만 하자 하르텐이 내 손을 단단하게 붙잡아 왔다.
실수인 건지 고의인 건지 하르텐의 손에 힘이 들어가 손가락 사이에 반지가 눌려 아팠다.
“텐……?”
“…뭘 망설이시는 거예요?”
분노한 얼굴이 생생하다.
하르텐이 화를 내는 건 처음 봐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전 약혼자가 걱정되어서 그래요?”
손가락 사이에 반지가 눌리며 고통스러웠다.
어째서 하르텐과 있을 때마다 반지 때문에 아픈 걸까.
하르텐이 고의로 누르는 게 아니라면 놀라운 우연이었다.
“…그건 상관없어.”
“그럼 왜 알리지 않아요?”
조금 누그러든 어조로 하르텐이 물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이 다정하다.
나는 차분히 말을 골랐다.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그러나 하르텐은 표정으로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음을 드러냈다.
“아가…….”
“아가씨!”
하르텐이 막 입을 연 순간 문을 열어젖히며 가넷이 등장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하르텐을 밀어내고 허둥지둥하며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가넷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가 챙겨온 도구들을 늘어놓는 사이에 뒤돌아본 하르텐은 굳은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어머, 나이트 영애, 오랜만이세요!”
“…그렇군요, 칼튼 영애.”
내 떨떠름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건지 칼튼 백작 영애는 내 곁에 붙어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그녀는 일방적인 친밀감을 형성하며 내게 예의를 지키지 않았지만, 오늘은 정도가 더 심했다.
게다가 입을 열자마자 흘러나오는 다른 귀족들의 뒷담화는 벌써부터 나를 지치게 했다.
뒷담화 중간중간, 칼튼 영애는 마치 내게 동의하라는 듯 무언의 압박을 줬다.
장담하건대, 여기서 내가 단 한 가지라도 긍정하는 즉시, 그녀는 자신이 나불거렸던 모든 말들을 내가 뱉은 이야기로 둔갑시켜 사교계에 뿌릴 것이다.
안 그래도 인사를 받는 순간부터 어이가 없었는데, 어서 동의하지 않고 뭐 하냐는 듯한 눈짓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 데이지 영애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건들지 못하는 사람은 데이지 퀴니와 제국의 황족들이었다.
방금도 참석자들 중 그녀의 독 오른 혀끝을 피해간 것은 데이지 퀴니가 유일했다.
되레 그녀는 데이지 퀴니의 머리 모양이나 드레스 따위에 과한 칭찬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데이지 퀴니가 다니는 드레스 숍 이름이 나올 즈음 인내심이 닳고 말아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칼튼 영애, 그만 조용히 하는 게 어떨까요?”
“…….”
“당신이 말했듯, 나는 나이트 후작 영애죠.
칼튼 영애가 언제, 먼저, 누구에게 말을 걸 수 있는지 배우지 못했나요, 칼튼 백작 영애?”
백작 영애라는 부분에 악센트를 주자 당황한 시선이 멈출 기미 없이 허공을 헤맨다.
나는 단호하게 이만 자리를 비울 때가 된 것 같다며 그녀를 내 곁에서 치워버렸다.
그녀를 보내고 난 뒤에는 안 그래도 입 싼 칼튼 영애에게 씹을 거리를 던져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녀가 금세 데이지 퀴니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고는 괜한 걱정이었구나, 생각했다.
애당초 데이지 퀴니의 추종자가 나에 대해 입을 열 때 좋은 말을 할 리가 없으니.
“…아가씨, 잘하셨어요!”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가넷이 내게 마카롱을 챙겨주며 소곤소곤 말을 걸어왔다.
어릴 때부터 케드릭과 라미엘의 과보호 아래 파티장을 다녔던 나는 저런 영애들을 상대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커가면서 케드릭과 라미엘의 보호가 덜해진 반면 그녀들은 더더욱 악착같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나를 멋대로 휘두르려 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옆에서 그 모든 상황을 바라만 봐야 했던 가넷이 내 선방에 기분 좋지 않을 리가.
“…이 마카롱 맛있네.”
새삼스레 과거의 내가 얼마나 멍청한 호구였는지를 인식하자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마카롱을 맛보는 혀에 애써 온 신경을 집중하며 딴청을 피웠다.
“맛있어 보이는 마카롱이군요, 나이트 영애.”
“…….”
딴청 피우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바라보는 가넷, 묵묵히 내 옆에 자리를 지키고 서서 접시나 잔을 들어주는 하르텐.
두 사람 덕분에 한 달 만의 파티가 무척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내 평화를 깨뜨리려는 듯, 데이지 퀴니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내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혼신의 힘을 다해 표정을 꾸며내고 고개를 들자 데이지 퀴니가 그곳에 서있었다.
시선이 절로 그녀의 곁에 서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아까 테라스에서 들은 것이 맞는다면 그녀의 곁에 서있는 그는 분명…….
“오랜만이에요, 영애.
황실 파티에서 뵙지 못해 무척 아쉬웠답니다.
영애와 한 번 더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거든요.”
방금 삼킨 마카롱이 역류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
보란 듯이 옆에 선 남자의 팔짱을 끼며 웃는 얼굴이 그렇게 가식적일 수 없었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노골적인 혐오가 나를 향했다.
“…그렇군요.”
나는 말을 아꼈다.
이 이상 말한다면 간신히 지키고 있는 평안이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 내 옆을 지키고 있던 하르텐의 손을 붙잡았다.
“나이트 영애의 클로버인가요?”
“네, 맞아요.”
가면을 쓴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한다.
마주친 시선에서 무엇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르텐이 내 손을 감싸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 역시 하르텐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렇군요.
이쪽은 내 클로버예요.”
데이지 퀴니가 자연스럽게 헤일로 카르트를 제 앞에 세운다.
나는 그녀가 짓고 있는 미소가 어쩐지 나에게 승리를 자랑하는 의기양양함의 표현 같다고 느꼈다.
“오늘 클로버를 데리고 참석하셨다는 것은, 나이트 영애도 샴록을 충분히 즐기시겠다는 의미겠죠?”
발갛게 달아오른 볼, 어여쁘게 휘어지는 눈매, 다정한 미소를 담은 입꼬리까지, 데이지 퀴니는 그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자신을 꾸며내고 있었다.
비록 그 속은 진창임을 그녀 스스로도 알고, 나도 알지만.
온몸으로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그녀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데이지 퀴니의 미소 짓는 얼굴에 시선이 고정된 클로버 둘이 내겐 시선도 흘리지 않고 곁을 스쳐 지나간다.
데이지 퀴니의 앞에 서있으니 나는 그저 벽을 장식하기 위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느새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려있었다.
시선 중 반은 그녀의 외관에 넋을 잃은 이들이겠지만 나머지 반은 헤일로 카르트를 사이에 둔 우리 두 사람의 관계성에 흥미를 가진 이들일 것이다.
후작 영애와 공작 영애가 한 남자를 두고 일으키는 사랑싸움이라니, 그 누구라도 관심을 보일 만한 주제였다.
“그렇다면 오늘 나이트 영애와 클로버를 바꿔보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헉.
미처 막지 못한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갔다.
나는 뒤늦게 입을 틀어막고 데이지 퀴니를 살폈다.
그 옆의 헤일로 카르트의 시선도 데이지 퀴니를 향해있었다.
나와 헤일로 카르트, 두 사람의 따가운 눈빛을 받고 있으면서도 데이지 퀴니의 견고한 가면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넋이 나간 사이, 정작 일을 친 그녀는 하르텐에게 계속 말을 걸어보려 안달이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네요.”
하르텐에 대한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 보이며 데이지 퀴니가 속삭였다.
머리가 금발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하르텐의 원래 머리색을 떠올리곤 얼굴이 해쓱해지고 말았다.
혹시나 해서 급한 대로 구한 염색약을 썼는데, 안 썼다면 데이지 퀴니의 관심이 더했을 것이다.
나는 하르텐에게 유혹의 눈짓을 던지는 데이지 퀴니의 한쪽 손이 헤일로 카르트에게 붙잡힌 것을 발견했다.
잡은 손을 통해 데이지 퀴니의 주의를 제게 돌리려 노력하는 모양새였다.
“나이트 영애의 클로버는 이름이 뭔가요?”
그러나 데이지 퀴니는 제 모든 관심을 하르텐에게 쏟아붓고는 헤일로 카르트에겐 단 한 톨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나는 데이지 퀴니의 변덕인지 의도인지 모를 발언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하르텐을 데려가면 끝이라지만 나와 갈 헤일로 카르트가 클로버가 아니란 걸 들키면 그 뒷수습은 어떻게 하려고?
“…아가씨.”
망설이는 나를 하르텐이 나직하게 불러온다.
익숙한 칭호와 익숙한 온기가 급하게 돌아가는 머리를 잠시 멈춰 세운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가면 너머의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또, 딴생각을 하시네요.’
귓가에 속삭이던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
내가 잠깐이라도 시선을 돌릴라 치면 더욱 집요하게 옭아매던 손길도.
첫날밤부터 하르텐은 내가 저와 닿아있는 동안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어떻게 알아채는 건진 아직 알 수 없지만, 생각이 조금이라도 그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나를 궁지로 몰아가곤 했다.
지금도 그는 내가 헤일로 카르트를 떠올렸단 걸 알아챈 것 같았다.
테라스에서처럼, 손에 가해지는 힘이 점점 강해졌다.
손가락 사이의 반지도 여전히 제 존재감을 과시한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잊지 않고 반지를 빼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방금 제의는 거절하겠어요, 퀴니 영애.”
“그런가요?
아쉽네요.”
내가 제안을 거절했음에도 데이지 퀴니는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되레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으로 헤일로 카르트에게 팔짱을 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스친 만족감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만족감 어린 표정을 지워낸 그녀는 순간순간 스치는 표정에 나를 향한 혐오감을 숨겨두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애써 숨기려는 모양새였다.
데이지 퀴니의 곁에는 여전히 헤일로 카르트가 서있었다.
가면 너머로 나와 하르텐을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이 불편했다.
나는 그와의 작별 인사보다는 외면을 택했다.
헤일로 카르트를 이끌고 사라지는 데이지 퀴니의 뒷모습이 여전히 당당하다.
그 뒤를 따르는 추종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그 긴 행렬을 지켜보다 내가 서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라스 근처, 잠시 쉬고자 하는 귀족들이 있는 곳.
나를 아는 이들은 많을 테지만 나를 좋아하고 추종하는 이가 있냐고 묻는다면 아무도 없을 거라는 대답뿐이다.
나는 새삼 내가 서있는 자리를 인식했다.
나는 흔하디흔한 엑스트라, 여주인공인 데이지 퀴니처럼 될 수 없겠지.
계속 이어지는 생각의 끝은 허무였다.
나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외전.별의 눈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내왔던 바는 더러운 작자들이 점령한 곳이었다.
그곳은 내 안식처이자 내 가족들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내가 끔찍이도 혐오하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