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전송의 새벽 (2)
손가락에서 빼낸 반지를 손안에서 굴렸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끼지 않으면 손이 허전했다.
헤일로 카르트와 내가 약혼한 이래로 반지는 내 손에서 벗어난 적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지를 계속 만지작거리는 나를 하르텐은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 눈이 마치 나에게 반지를 저 멀리 던져버리라고 충동질하는 것 같다.
“…곤란하시면 제가 처리할까요?”
내가 고민하는 틈을 타 하르텐이 조용히 물어온다.
내 손에서 이리저리 굴려지는 반지를 보는 눈이 마냥 곱지만은 않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젓고는 가넷에게 반지를 넘겼다.
연회복을 입고 있는 나와 하르텐의 옷에는 별다른 주머니가 없다.
내가 들고 있든 하르텐이 들고 있든 가넷의 주머니에 맡기는 것보다 편한 선택지는 없었다.
가넷은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반지를 챙겼다.
주변의 시선이 힐끗힐끗 나를 향한다.
나와 데이지 퀴니가 얼굴을 맞대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일까.
데이지 퀴니는 이미 이곳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으니 남은 시선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나는 급격하게 피로해지는 것을 느끼며 발을 돌렸다.
“테라스로 가자.”
가넷과 하르텐이 뒤쫓아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테라스 행이었다.
곤란할 때마다 테라스로 도망가는 버릇을 고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소파에 앉아 발을 옥죄는 구두를 벗었다.
가넷이 익숙하게 내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언제 집에 갈 수 있을까…….”
“아직 1부가 끝나려면 한참 멀었어요.”
내 중얼거림에 하르텐이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에 힘을 풀었다.
책잡히지 않으려 온종일 힘을 주고 있었던 몸이 풀어지며 절로 나른해졌다.
파라한 백작 부인 덕에 예상보다 일찍 사교계에 얼굴을 내보였다.
원작에서는 이맘때쯤 내가 어쩌고 있었더라…….
과거의 기억을 느릿느릿 더듬었다.
하르텐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나가면서도 의식적으로 꺼내 들지 않았던 기억이었다.
이왕이면 이대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오늘 데이지 퀴니를 보니 그럴 가능성은 요원해 보였다.
결국 오늘처럼, 급해지면 다시 꺼내 들어야 할 기억이니까.
“가넷, 마실 거 좀 부탁해.”
나는 또 화장품을 꺼내 드는 가넷을 내보냈다.
목이 마르기도 했지만 가넷의 손에 얼굴을 꾸미며 앞에 나서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허무함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테라스를 나서는 가넷과는 달리 하르텐은 내 의중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가넷이 펼쳐둔 도구들을 주워 담아 파우치에 넣는 손길이 자연스럽다.
“…신경 쓰이세요?”
무엇이?
눈을 깜빡였다.
하르텐이 내 속마음을 알고서 묻는 건지, 아니면 그저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일말의 빈틈조차 보이지 않는 얼굴이 하르텐의 감정을 감춰버린다.
그 얼굴을 마주 볼수록 괜히 내 감정만 들킬 것 같아 시선을 돌려버렸다.
“…방금…….”
하르텐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얼굴은 무감각하게 나를 살피고 있는데도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묻어났다.
이것을 물어도 되는지 걱정하는 것처럼.
방금, 이라면 데이지 퀴니와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걸까?
나는 데이지 퀴니와 그 곁에 서있었던 헤일로 카르트를 떠올렸다.
“…….”
사실 내가 정말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은 헤일로 카르트였다.
데이지 퀴니는 내 목숨을 위협하고 나는 하르텐의 운명을 비틀어 버린 지금, 헤일로 카르트쯤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해도, 이 모든 상황이 빌어먹을 헤일로 카르트 하나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던 나는 헤일로 카르트가 처음으로 꽃을 챙겨왔던 그날을 떠올렸다.
애써 결심했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버렸던 그날을.
애써 덮어두었던 감정과 기억들이 천천히 되살아난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어도 마음속 어딘가는 천천히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왼손 약지를 문질렀다.
내 손으로 빼내고 내 손으로 넘겨버렸음에도 어쩔 수 없는 허전함이 가슴을 채운다.
이제야 인식한 헤일로 카르트의 공간이었다.
언제부턴지 서서히 비워져 이제는 반지라는 마지막 조각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진 지금은 그저 공허하기만 한 곳이었다.
“아가씨.”
하르텐이 내 앞에 무릎 꿇으며 속삭였다.
여전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저는, 아가씨의 클로버예요.”
“…….”
눈을 감으며 내려앉은 속눈썹이 달빛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달빛에 비친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이 텅 빈 공간에 걸려있는 것 같다.
“저는 절대로 아가씨에게서 등 돌리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아가씨 곁을 지켜드릴게요.”
감겨있던 눈이 뜨이며 마주한 눈동자에는 일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 눈을 홀린 듯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무슨 소리야, 텐.”
내 기분을 위로하기 위한 말임을 안다.
그저 고맙다고 웃으며 넘겨도 괜찮을 거란 것도.
그러나 나는 그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속삭였다.
“너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넌 엔데버 제국의 황자인걸.”
지금이야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클로버와 아가씨의 관계로 있는다지만, 나중에는 내가 함부로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의 신분이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나라는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희미해질 텐데.
“왜, 아가씨는…, 저에게 떠나라고만 하세요?”
제 얼굴을 붙잡은 내 손을 하르텐의 손이 감싼다.
따뜻한 온기가 맞닿은 손으로부터 느껴졌다.
그 온기를 느낄 때마다 죄책감이 머릿속을 좀먹어 간다.
하르텐의 운명을 내 이기심이 비틀어 버렸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이었다.
“…….”
입바른 말을 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너를 위해서 그랬다고, 그렇게 어물쩍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침묵하며 그가 포기하기를 바랐다.
나는 언제나 하르텐에게 솔직하고 싶었지만 하르텐의 앞에 설 때마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갔다.
그것은 내 상황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했고, 모든 상황을 알게 되면 하르텐이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적막 속에서 하르텐과 나의 눈이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1분, 2분, 시간은 흐르는데 나도 그도 시선을 돌릴 생각조차 못 하고 서로를 바라봤다.
그로부터 5분 뒤 백작 부인의 부름을 받아 다녀왔다는 가넷이 테라스에 들어설 때까지 하르텐과 나는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멈춰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하르텐과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보냈던 둘만의 시간이었다.
* * *
“아가씨, 케를란 공작 영애의 티 파티 초대장이 도착했어요.”
“그래?
거기 두고 가.”
연보라색 봉투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케를란 공녀는 공작가의 후계자인 동시에 사교계에 큰 입지를 가진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정기적으로 티 파티를 열곤 했다.
파라한 백작 부인의 초대로 내가 사교계에 다시 얼굴을 내밀자 예의상 초대장을 보낸 것 같았다.
티 파티는 사흘 뒤 오후 2시에 시작한다고 적혀있었다.
사흘 뒤,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쯤 내 점심을 가지러 갔을 가넷을 기다리기로 했다.
“사흘 뒤요?”
“응,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네.
분명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나 기억에 남아있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일일 텐데, 그걸 까먹었다는 것도 의아했다.
요즘 너무 바빴나?
이런 걸 다 잊고.
“그럼요, 그날은 텐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가넷이 대답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냐는 듯 책망이 담긴 것도 같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이 기억을 애써 머리 한구석에다 처박아 두려고 노력했던 것을.
“아…….”
“텐이 알면 섭섭해하겠어요, 아가씨.”
요즘 상단 일로 정신없으셔서 그런 거죠?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넷이 웃는다.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이해해 주는 가넷 덕에 상황을 모면했다.
사흘 뒤에 하르텐이 가기로 했었구나.
알고 있었던 일임에도 새삼스럽게 놀랐다.
이젠 정말로 가는 건가, 하는 실감이 나기 때문일까.
일주일 전 또 토네이도를 찾아온 홀란 자작은 하르텐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며 재촉했다.
황자의 자리를 얻고 싶으면 하루빨리 엔데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홀란 자작과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엔데버의 둘째 황자는 살아있다는 정보다.
위독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가 죽기까지 아직 몇 주나 남았다.
원작엔 하르텐이 제국에 도착하고도 일주일은 더 살았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니까.
하르텐이 제국으로 가는 내내 둘째 황자의 세력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견제와 암살 시도를 당했는지, 말해봐야 입 아플 정도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분명 가시밭길일 게 뻔한 그곳에 무작정 하르텐을 밀어 넣을 수 없었다.
나는 홀란 자작으로부터 최대한의 시간을 벌어서 하르텐을 호위할 인원을 배정해 주었다.
아버지가 늘 내게 붙여주시는 그림자 몇과 후작저의 기사단 몇 명, 그 외에도 용병 한 팀을 고용하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됐다.
내가 꾸려둔 호위 인원을 본 집사는 웬만한 영지전이라도 가능할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던졌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모든 게 과보호라며 같이 비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쨌거나 집사의 웃음을 불러일으킨 서류는 아버지에게 전달했다.
과연 아버지가 그 호위 인원을 허락해 주실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결과를 걱정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의자에만 앉아 일을 처리했더니 허리가 아팠다.
방으로 돌아가서 쉴지 소파에 누워서 쉴지 고민하며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문밖에서 가넷이 소리쳤다.
방음이 잘되도록 만들어 둔 탓에 문에 가까이 붙어서 소리 지르는 게 아니라면 어지간한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일어선 김에 대답 대신 문을 열었다.
“앗, 다행이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제일 먼저 확인해 달라시면서 서류를 전달해 주셨어요.”
서류는 갈색 봉투에 들어있었다.
다른 일을 제치고 처리해야 만큼 급한 서류가 있다고?
심각한 건가 싶어서 자리로 돌아가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서류는 어제 내가 집사에게 넘긴 하르텐의 호위 신청서였다.
아버지의 그림자와 어머니의 후작가 기사단원들이 속해있다 보니 그들을 보내겠다는 허락을 구하고자 어제 전달했던 것이었다.
나는 서명란 아래 아버지와도 티타임을 가져달라는 메모가 붙어있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하르텐이 떠날 날이 사흘밖에 안 남아서 급한 서류인 건 맞지만, 정말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메모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건 됐어.
고마워, 가넷.”
“네, 아가씨.
혹시 지금 나가실 건가요?”
“방에 가서 좀 쉬다 오려고.”
마침 가넷도 내 방 쪽으로 간다고 해서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집무실을 떠났다.
“쉬실 거면 목욕을 하시는 건 어떠세요?
물을 데워드릴게요.”
“아니야, 그냥 좀 누워있으면 될 것 같아.”
목욕을 하게 되면 최소 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노곤노곤해져서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지도 모르고.
내가 필요한 것은 잠깐의 휴식뿐이다.
다시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 방 앞에 도착했다.
나는 내 방문을 잡아주며 내가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가넷을 바라봤다.
나를 따라 들어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넷은 어디 가?”
“저는 텐을 도우러 가요.”
“아…….”
나는 수고해, 라는 말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눈앞에 띄지 않으려 작정한 듯한 하르텐을 떠올렸다.
파라한 백작가에서의 샴록 이후로 하르텐은 그 이전보다 더 나를 피해 다녔다.
바로 옆방인데도 동선이 거의 겹치지 않았다는 건 의심을 넘어서 확신에 가까워지는 증거였다.
이럴 때면 그 무뚝뚝한 얼굴 아래의 표정이 궁금해진다.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다 보니 무슨 생각인지 감이 전혀 잡히질 않아 불편하기만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르텐은 곧 떠날 것이다.
엔데버 제국으로 가버리면 영영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지금은 같은 집 안에 있어서 적어도 한두 번 정도 보게 되지만, 그곳으로 떠나고 나면 아예 보게 될 일 자체가 없어지겠지.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르텐과의 사이를 풀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까, 아니면 이대로 흘러가게 둬야 할까.
생각해 보기도 전에 마음이 절로 기울어졌다.
나의 선택은 후자였다.
나는 이대로 침묵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떠날 테고, 언젠가는 나를 잊을 것이다.
굳이 감정 상해가며 그럴 필요는 없겠지.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며 감은 눈에 힘을 줬다.
분명 내 선택임에도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하르텐이 떠나기 사흘 전이었다.
하르텐이 떠나는 날까지 밤마다 잠을 설쳤다.
어째서인지 침대에 누울 때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새삼 혼자 누운 침대가 어색하다고 느꼈다.
하르텐과 함께 밤을 보낸 횟수가 손에 꼽을 만큼 적은데 기억은 어찌 그리 선명한지 알 수 없었다.
하루하루 눈 밑 그늘이 짙어가는 나를 보며 가넷이 안타까워했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잠이 돌아오진 않았다.
“…가넷, 하르텐의 준비는 얼마나 됐어?”
“준비는 오전에 다 되었어요.”
괜히 초조해져 가넷에게 하르텐의 소식만 계속 물었다.
가넷은 ‘왜 직접 가지 않으시고?’
하는 의아한 표정을 했지만 대답은 착실하게 해주었다.
“그렇구나…….”
대답을 듣고 나니 심란함만 더했다.
나는 30분째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은 책을 내려다봤다.
티타임을 시작하면서부터 폈지만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고요하기만 한 하르텐 방의 문 너머로 온 신경이 쏠려있던 탓이었다.
나는 결국 책을 덮고 일어섰다.
“텐은 어디에 있어?”
“오전부터 주인님께 불려갔으니 아마 집무실일 거예요.”
나는 하르텐을 찾아 나서려던 몸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
아버지의 집무실에 있으면 방해할 수 없지.
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도 있었다.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내 선택이었음에도 이렇게나 혼란스러운 마음은 도대체 뭘까.
“…아가씨?”
가넷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다.
오늘 하루 내내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있는 나를 계속 지켜봤던 탓이다.
나는 웃는 얼굴을 하며 다시 책을 들었다.
30분 전의 그 페이지가 다시 나를 반겼다.
“아가씨, 텐이 곧 떠난대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오후에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아침이었는데 벌써 오후가 됐다.
그사이 책은 겨우 2페이지 넘어가 있을 뿐이었다.
“네, 배웅하러 가실 거죠?”
가넷이 대답도 듣지 않고 양산을 챙기러 몸을 돌린다.
나는 익숙한 장면을 보며 새삼 시간의 흐름을 체감했다.
“…그래.”
그러나 내 선택은 그때와 달랐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하르텐을 마지막으로 보게 될 테니 배웅하러 가야지.
저택 밖으로 발을 내밀자 아버지께서 상단에 의뢰하셨다던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특별 제작한 내 마차를 내어주고 싶었으나 하르텐과 아버지 모두의 반대에 부딪쳐 기각되었다.
그 대신 나는 마차의 겉을 꼼꼼히 따져보며 확인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그걸 핑계로 삼아 내 마차와 바꿀 생각이었다.
마차의 곁에는 내가 붙인 기사들이 말을 끌고 서있었다.
용병들은 마차가 시장에 들를 때 합류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림자들은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겠지.
아마 마차가 출발하고 나면 다른 루트로 수도를 벗어나 이들과 조금 떨어져서 호위할 것이다.
나는 그 인원들을 되새기며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꾹 눌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르텐은 마차의 뒤쪽에서 아버지와 함께 서있었다.
아침부터 함께였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할 얘기가 남은 걸까.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지금 그 사이에 끼어들어 봤자 하르텐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할 것이다.
“아가씨, 텐이랑 인사 안 하실 건가요?”
마차 주변만 맴돌고 하르텐의 곁에 가지 않는 나를 가넷이 이끌었다.
나는 못 이긴 척 가넷에게 끌려가 하르텐과 아버지의 앞에 섰다.
“아, 로지.
어서 와라.
배웅하러 나왔구나.”
“…네.”
하르텐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아버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나를 반겼다.
옆얼굴에 꽂히는 시선 때문에 아버지에게 마주 웃어주면서도 신경이 분산됐다.
“아버지도 배웅하러 오셨나요?”
아까 표정만 보면 일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긴 했지만, 이제 보낼 사람에게 볼일이 뭐가 있겠는가.
나는 계속 하르텐에게 향하려는 시선을 붙잡아 아버지의 얼굴에 고정했다.
묘하게 실망감 어린 얼굴의 아버지가 대답했다.
“아니, …일이 있었단다, 로지.”
정말로 일이었나 보다.
나와 하르텐의 사이가 냉랭해진 틈을 타 하르텐을 독점하셨으면서 아직도 일 이야기가 남았다고?
마지막까지 부려먹으시다니.
아버질 보는 눈이 절로 곱지 않아졌다.
“아하하, 둘이 인사할 시간을 줘야겠구나.
아빠는 이만 들어가마.”
내 시선을 느낀 아버지가 얼른 자리를 떠나셨다.
이제 이곳에는 나와 하르텐과 가넷이 남았다.
가넷도 내 눈치를 살짝 보더니 마부와 이야기를 나누겠다며 떠나버렸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아가씨.”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하르텐이었다.
며칠 만에 얼굴을 마주한 하르텐은 퍽 야위어 보였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은 살이 빠져 날카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내가 듣고 있다는 의미로 시선을 계속 마주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하르텐은 말을 꺼내는 대신 새삼스레 내 얼굴을 구석구석 훑었다.
마치 눈에 새기려는 듯 하나하나 뜯어보는 시선이었다.
“…아프지 말고 잘…, 지내세요.”
마지막까지도 하르텐다운 말이었다.
표정도 시선도 모든 게 하르텐 그 자체였다.
이젠 곧 사라질.
“조심히 가.”
…미안했어.
망설이다 덧붙인 말에 하르텐이 고개를 기울였지만 그 의미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웃으며 하르텐에게서 뒤돌아섰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헤어진다 생각하니 아쉬웠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기분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멀어져 저택의 현관에 섰다.
나와 하르텐 사이의 거리는 이제 열 걸음 남짓이었다.
지난 며칠간 나와 그가 벌려놓은 거리이기도 했다.
떠나고 나면 기쁠 줄 알았다.
내가 망친 그의 운명 중 일부를 돌려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 내게 남은 감정은 심란함뿐이었다.
하르텐의 떠남이 마냥 실감 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출발하겠습니다!”
하르텐이 마차에 올라타기 전 다시 시선을 내게 맞춘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을 해석하기도 전에 그는 딱딱한 몸짓으로 내게 인사를 남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의 채찍질 소리, 말의 발굽 소리, 마차의 바퀴 소리가 어우러져 멀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마차의 뒤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