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백일홍 (1)
“아가씨, 이 서류는 어디다 드릴까요?”
“아, 거기다 놔줘.
고생이 많아, 가넷.”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였다.
아침부터 이어진 서류 작업은 점심을 훌쩍 지나 오후 티타임까지 계속됐다.
나를 도우려 아버지의 집무실과 내 집무실을 왕복하는 가넷과 집사에게 미안했지만 나 역시도 서류 처리에 계속 신경을 쏟아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내 집무실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하루 종일 종이 뭉치를 들고 다니기에 좋은 거리도 아니다.
내 방 근처에 집무실을 두려고 했던 예전의 선택이 새삼 후회됐다.
“차를 드릴까요, 아가씨?”
“아니야, 좀 쉬어.”
가넷은 서류 뭉치를 옮겨주면서도 내 오후 티타임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지난 2주일간 그랬듯이 괜찮다는 말로 가넷을 내보냈다.
오후 티타임을 갖지 않은 지 벌써 2주째.
하르텐이 떠난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오후 티타임을 챙기지 않았다.
“서류는 완벽하더구나, 로지.”
“어떨까요.
가능성이 보이시나요?”
아버지와 오늘 내내 서류를 주고받았음에도 얼굴을 마주한 건 저녁 식사 자리가 처음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마지막으로 처리했던 서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서류였단다.”
요 며칠간의 노력인걸요.
대답하면서도 절로 뿌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지만 역시 네 이름으로 한다는 건 마음에 걸리는구나.”
“…아버지의 이름이면 더 쉬울 거라는 건 알아요.”
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언젠가는 설명해 드리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두 분께서 계속 의문을 표하셨던 부분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제 이름으로 하고 싶은 일이에요.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자로 나설 수 있기를 원해요.”
굳이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가야 할 필요가 있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표정에 서린 그런 의문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 이름을 걸고 하고 싶은 일이었다.
토네이도를 구입하면서부터 내가 전부 계획했던 것이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책임지고 싶은 일이기도 했고.
“우리 딸이 그렇다면야.”
“난 로지를 믿는단다.”
아버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절로 마음이 따뜻했다.
나는 두 분의 응원에 감사의 의미를 담아 활짝 웃어 보였다.
“집사, 이것 좀 황궁으로 보내줘.”
“아, 이게 그…….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부서로 보내면 될까요?”
“응, 부탁해.”
아버지에게 최종 허가까지 받은 문서니 이제 보내도 될 것이다.
나는 서류 봉투를 건네며 떨리는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듬직한 미소를 지은 집사가 나가자 힘이 빠져 의자에 너부러졌다.
며칠간의 노력이 드디어 내 손을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서류를 받은 사람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오늘 보낸 서류는 고아원 설립 허가서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기획안부터 예산안, 증명서까지 서류를 작성하고 다듬느라 고생을 했다.
물론 고아원 하나 설립하는 데 일주일이란 시간을 갈아 넣을 필요는 없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린 것은 내가 설립하고자 하는 고아원이 평범한 고아원이 아니라서 그렇다.
내가 설립하는 고아원은 ‘마나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이니까.
2세기 전의 마법 전쟁 이후로 대륙 내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법사들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들이 통제당하는 동안에는 더없이 좋은 도구였으나 통제가 풀리고 나니 얼마나 위험한지 직접 겪은 탓이었다.
때문에 국가는 통제할 수 없는 아이들을 일일이 거두는 대신 그들의 위험성을 알리는 공고문을 작성해 퍼트렸다.
시장, 광장, 마을 할 것 없이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전부.
그러나 대를 이어가며 공고문의 내용은 ‘마나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은 악마와 계약한 아이들이다.’라는 이야기로 변질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나를 가진 아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 실정이었다.
몇몇 신전에서 그런 아이들을 몰래 거두고는 있지만 들키면 신도들이 떠난다는 이유로 떳떳하게 들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그 아이들이 죄가 없는 불쌍한 아이들임을 안다.
소설에서 마탑주의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마법을 배우지 못하면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마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고아원에 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내 생각이었다.
이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충분히 찾아 서류에도 덧붙였다.
부디 서류가 통과되길 바랄 뿐이다.
고아원의 이야기에는 토네이도를 빼놓을 수 없다.
토네이도로 가는 길을 보는 순간 고아원의 터로 이만한 곳을 찾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외곽에 위치하면서도 마차로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다른 목적도 있긴 했지만 이미 도착한 순간 마음이 조금 기울어 있었다.
덕분에 망설임 없이 토네이도를 구입할 수 있었고.
하르텐이 걱정하던 토네이도의 클로버들은 다음 날 바로 자유의 몸으로 풀어줬다.
고아원이 설립되면 고용해 월급을 줄 생각이었다.
원래라면 평생 빚에 묶여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토네이도와의 계약서를 태워줬다.
“…가넷!”
새삼 떠올린 하르텐의 얼굴에 놀라 기억을 떨쳐내고 가넷을 소리쳐 불렀다.
근처에 있었던 듯 가넷이 대답하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혹시 다른 서류는 없는지 갔다 올래?
상단 관련 일이면 뭐든 괜찮아.”
“아가씨, 드디어 고아원 일이 끝났는데 이만 쉬시는 게 어때요?”
가넷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요 며칠 내가 무리할 때마다 일만 끝나면 쉬라며 닦달을 했던 터였다.
내가 여전히 집무실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가넷이 책상으로 다가와 잔소리를 늘어놨다.
“요 며칠 동안 하루 다섯 시간도 안 주무셨잖아요!
이번 서류만 넘기시면 분명 쉴 거라고 하셨으면서…….
얼른 낮잠이라도 주무세요!”
“지금 가도 잠 안 올 것 같은걸…….
그럴 바에는 서류 작업 좀 하다가 밤에 자면 되지.”
“밤에도 잘 못 주무시고 깨시니까 그렇죠.아가씨, 다크 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오겠어요!”
여전히 내 외모에 관심이 많은 가넷이 우는소리를 했다.
나는 가넷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다른 서류를 찾아 책상을 뒤적거렸다.
“아가씨, 서류 대신 이걸 드릴게요.”
“뭔데?”
“안슈프 가문에서 보내온 파티 초대장이요!”
가넷이 반짝반짝한 눈으로 외치며 새파란 색의 봉투를 내밀었다.
파티라는 말에 마음이 기울어 편지를 열었다.
초대장의 내용을 읽은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데이지 퀴니와 헤일로 카르트가 크게 스캔들을 일으켰던 파티가 안슈프 가문의 것이었다는 게.
“아가씨, 이 드레스는 어때요?요즘 유행인 디자인이래요!색도 아가씨랑 잘 어울리고요.”
“…아무거나 해줘.”
요즘 들어 꾸미는 데 들이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일하기도 바쁜 시간인데 드레스다 장신구다 하나하나 신경 쓰고 있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꾸미는 데 흥미를 잃은 탓도 있겠지만, 일이 바빠지며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치장에 관심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으으음, 다 예쁜데.
너무 어려운 고민이네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넷은 드레스를 맞추는 그 순간부터 행복에 겨워했다.
오늘만 하더라도 집무실에서 서류 작업하느라 바쁜 내 앞까지 직접 드레스를 들고 찾아왔다.
“그럼 이걸로 결정하고…, 구두는 어떤 색이 좋을까…….”
고민에 빠진 가넷과 서류에 빠진 나 사이의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고아원 일은 전면 중지 상태였다.
허가가 됐는지 안 됐는지 결과가 도착해야 다음 일을 진행할 텐데, 고아원 서류는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아가씨, 오늘은 일찍 주무셔야 해요!”
자기 전에 올릴 팩을 챙기겠다며 가넷이 부산스럽게 집무실을 떠났다.
나 혼자 남은 집무실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뻐근해진 목을 돌리며 가넷의 온 신경이 쏠려있는 초대장을 떠올렸다.
안슈프 백작 가문.
중앙 정계에 몸을 담고 있는 가문치고는 눈에 띄는 점이 없는 가문이다.
안슈프 백작은 황실 외교부의 일원이다.
능력 부족으로 찍힌 탓에 백작임에도 고위직을 받지 못했다.
수도에 널린 가문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문이 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원작에서 데이지 퀴니와 헤일로 카르트의 스캔들이 터졌던 것이 안슈프 가문에서 주최한 파티였기 때문이다.
파티에서 데이지 퀴니와 헤일로 카르트가 파트너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 소문이 나기를 바란 것처럼 귀부인들의 휴게실 앞에서 진한 키스를 했다.
파티가 무르익어 가면서 여러 이유로 휴게실을 찾던 귀부인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입방아를 찧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파티 당일 파트너로 입장하는 데이지와 헤일로를 보고 충격받아 집에 일찍 돌아갔던 로즈는 그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아예 드러누워 버리고 말았다.
원작을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쑤셔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더 이상 감정적으로 굴어봐야 좋을 게 없다.
이 이상 당하면 스스로가 바보임을 입증하는 것밖에 안 될 것이라고 마음을 타일렀다.
데이지 퀴니와 헤일로 카르트는 이번 파티에 참석할까?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데이지 퀴니가 참석하는 사교 모임은 하나같이 사교계 혹은 정계의 유명 인사들이 주최하는 것이었으므로 안슈프 백작가 주최의 파티라면 데이지 퀴니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떠오르자 다른 의문점이 들었다.
그럼 원작의 데이지 퀴니는 왜 안슈프 백작가의 파티에 참석했던 걸까?
평소 그녀가 내세우는 기준대로라면 절대 참석하지 않을 곳이었는데.
의문이 들었지만 그 답을 알 길은 없었다.
나는 스트레칭하느라 밀어두었던 서류를 다시 들여다봤다.
이럴 땐 답이 안 나오는 문제 대신 답이 필요한 문제에 집중하는 게 이득이다.
* * *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요…….”
“그러게.원래 이렇게 인기가 많은 곳이었나?”
“글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나도 처음이긴 하네.”
나와 가넷의 대화 사이로 케드릭이 끼어들었다.
한마디를 던지며 능글맞게 웃는 얼굴이 창밖을 향했다.
안슈프 가문으로 이어지는 게 분명할 마차들의 행렬이 보였다.
이 정도로 인기가 많은 가문이 아니었을 텐데.
유명한 사람이라도 오나?
“이제 창문 좀 닫을까?찬 바람 들겠다.”
마차 창문 밖에 시선을 두고 움직이지 않는 나를 걱정한 케드릭이 손수 문을 닫아주었다.
“아가씨, 저기가 안슈프 저택인가요?”
“아니, 여긴 저택으로 향하는 길목이야.”
나무들 사이로 구조물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안슈프 가문의 자랑인 푸른 장미와 연관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창문에 얼굴을 박을 듯 붙인 가넷이 연신 조잘거렸다.
“정말 아름답네요…….꽃이 가득해요!”
“안슈프 가문의 문장도 꽃이 들어있지.대대로 꽃을 아끼는 가문이거든.”
케드릭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가넷의 감탄과 케드릭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사이에서 고요히 눈을 감은 채 나만의 생각에 빠졌다.
‘만약 원작대로 데이지 퀴니가 오는 거면 어떡하지?’
사실 데이지 퀴니가 온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데이지 퀴니가 이 파티에 나올 수도 있다는 건 헤일로 카르트도 올 수 있다는 거지.
아직 헤일로 카르트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도 못 정했는데…….
“…가씨!아가씨!”
“응?뭐야?”
“도착했어, 로지.무슨 생각을 하느라 우리 이야기도 못 들은 거야?”
주위를 둘러보니 마차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져 있었다.
창문 밖으로 다른 가문들의 마차가 돌아서 나가는 게 보였다.
이미 저택의 정문을 지나친 듯했다.
“잠시, 일 생각을 좀…….”
이렇게 오래 딴생각에 빠져있었나?
당황해 대충 얼버무렸다.
케드릭이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일도 좋지만 파티에 왔으니 즐기다 가야지.”
“맞아요, 아가씨!오늘도 정말정말 아름다우시다고요!”
가넷이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둘러본다.
지나가는 아무나 잡아서라도 나를 자랑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못 말리겠다는 의미로 피식 웃고 말았다.
“자, 이제 입장하자.”
먼저 마차에서 내린 케드릭이 나를 에스코트했다.
파우치와 부채를 챙긴 가넷은 내 뒤를 따랐다.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지나치는 사이 구두 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영애 한 무리가 내 앞에서 이런저런 말을 떠들며 걷고 있었다.
“…하면 황태자 전하께서…….”
“어머, 정말요?저는…, 그래서 록사나 영애의…….”
“무슨 소리세요.…하니 퀴니 영애겠지요.”
속닥속닥 대화의 파편들이 귓가에 계속 박혔다.
듣고 싶지 않음에도 거리가 멀지 않아 절로 들리는 소리였다.
남의 대화를 엿듣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몇 걸음 물러서려 했으나 뒤에서 몰려오는 인파도 적지 않아 계속 앞으로 밀려났다.
파티장까지 도착하는 사이 의도치 않게 얻은 정보를 총합해 본 결과 오늘 파티에 록사나 케를란 영애가 먼저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 날 데이지 퀴니 역시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내 이례적으로 공작가의 영애 두 사람이 모두 모인 파티가 되어버렸다.
어쩐지 사람이 많다 했더니…….
그 두 사람이 같은 파티에 참석한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니 다른 귀족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런 건지 입장을 알리는 시종도 없었다.
앞의 수다쟁이 영애들의 뒤를 이어 파티장에 입성하자 황실 연회 홀의 반쯤 되어 보이는 파티장에 사람이 적지 않게 차있었다.
평소라면 예의상의 초대장을 띄워 예의상의 거절 편지를 받고 끝날 일이었건만 케를란 공작가와 퀴니 공작가가 움직인 탓에 거절 편지를 보낸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지쳐 보이는 안슈프 백작 부인을 측은히 여기며 그녀를 피해 테라스 근처로 다가갔다.
안 그래도 인사를 나눌 사람이 적지 않은데 나까지 거기에 낄 필요는 없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아 주변의 마실 것을 하나 잡아들었다.
케드릭이 알코올이라며 경고했다.
나는 들은 체도 않고 벽의 일부분인 양 기둥에 기대어 섰다.
평소처럼 벽의 꽃이 되어 오늘 하루도 보내는가 싶었는데 아직 앳되어 보이는 영식 하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케드릭의 얼굴이 금세 싸늘하게 굳어져 내 앞을 막아섰으나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그를 옆으로 치워냈다.
영식이 당황한 듯 나와 케드릭을 번갈아 바라봤다.
과보호는 싫다고 했는데, 언제까지 그럴 생각인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시죠?”
이미 케드릭의 기세에 눌린 영식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고 있어 내가 먼저 나섰다.
집에선 약한 척 엄살을 부리긴 해도 케드릭은 엄연히 황실 기사단 소속이다.
장난스레 뿜어낸 기세에도 아무 훈련조차 받지 못한 영식이라면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
나는 부러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영식에게 다가섰다.
“저…, 나이트 영애, 저와 추, 춤을 춰주시면…….”
여전히 머뭇대는 영식이 손을 내민다.
케드릭이 옆에서 은근히 압박을 가하고 있음에도 내게 춤을 신청했다.
나는 유쾌한 기분이 되어 내민 손에 내 손을 올렸다.
오랜만에 밟은 플로어는 낯설었지만 기분이 좋으니 그마저도 좋다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제가 아직 영식의 소개를 받지 못했네요.”
“아, 저, 저는 베이먼 슈라우드라고 합니다.
슈라우드 자작가의 둘째입니다.”
기억에 없는 것을 보니 원작에서 별일 없이 지나간 가문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더불어 딱히 나와 척질 만한 일이 없는 가문이었고.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춤을 이어나갔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영식은 나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로 춤을 리드하고 있었다.
제3자가 보면 퍽 우스꽝스러울 광경이란 걸 알까 모르겠다.
“영식은 올해로 나이가……?”
“저는, 그러니까…, 이제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스무 살이면 하르텐과 같은 나이다.
하르텐과 같은 나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놀란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많아도 열아홉 살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건 하르텐이 나이 들어 보이는 걸까, 아니면 슈라우드 영식이 어려 보이는 걸까.
…어쩐지 전자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수긍하는 사이 춤곡 하나가 끝났다.
나와 영식은 예의를 차려 인사하고 플로어에서 내려왔다.
움직인 탓인지 파티 홀 안의 공기가 훨 답답하게 느껴졌다.
영식을 보내고 테라스로 가야겠다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나이트 영애.”
“네?”
내 인사보다 먼저 영식이 나를 불렀다.
진지한 어조로 대화를 튼 영식은 아까까지의 수줍음이 거짓말이라는 듯 결연한 얼굴이었다.
“오늘, 저와 밤을…….”
“어머, 여기 계셨네요!”
영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사이로 끼어들었다.
나와 영식이 맞대고 있던 시선은 갑자기 나타난 인물에게 고정되었다.
평소와는 달리 발랄한 어투로 끼어든 인물은 데이지 퀴니였다.
“…퀴니 영애?”
“나이트 영애, 정말 오랜만이네요.저번 샴록 이후로 처음인가요?”
외양은 데이지 퀴니가 맞는데 하는 행동은 평소와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부름에 대답을 하는 걸 보니 데이지 퀴니가 맞는 모양인가 보다.
“그렇…군요.
그날 이후로 처음이네요.”
대답이 절로 떨떠름해졌다.
그날 헤일로 카르트를 옆에 끼고 와서 하르텐을 노리던 그 얼굴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헤일로 카르트와 나를 번갈아 보던 눈 깊숙한 곳에 맺혀있던 희열은 분명 그녀의 진짜 감정일 터였다.
더불어 하르텐을 훑던 눈에 담긴 탐욕도.
“네, 오랜만에 뵈니 무척 반갑네요.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데요.”
“지금은 좀 힘들 것 같군요.슈라우드 영식과 먼저 대화를……?”
데이지 퀴니를 상대하기 껄끄럽기도 하고, 언제 헤일로 카르트가 나타날지도 모르니 슈라우드 영식을 방패 삼아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건만, 어느새 슈라우드 영식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영식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오히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슈라우드 영식은 이미 가신 것 같네요.이제는 시간이 되시나요?”
기다렸다는 듯 묻는 얼굴이 신경을 긁는다.
게다가 주변의 시선도 점점 몰리고 있어 더 거절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좋아요, 테라스 근처로 가죠.”
나는 케드릭과 가넷 근처로 데이지 퀴니를 이끌었다.
의외로 데이지 퀴니는 아무런 반발 없이 내가 고른 장소로 따라왔다.
“저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으신 건가요?”
“…미리 충고하는데, 테라스로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건 어떨까요?”
선심을 베풀겠다는 양 꺼내는 말이 우습다.
느긋하게 눈웃음치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는 태도가 여유 가득했다.
데이지 퀴니가 함정을 파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전 괜찮으니 여기서 이야기하시죠.”
“흐음, 그래요?”
의외라는 듯 짧게 웃더니 몸을 돌려세운다.
파티장의 사람들을 등진 채로 나를 향하는 얼굴은 노골적인 적의를 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듣지 못할 만큼 낮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왜 벌써 나를 경계할까.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본 낯을 드러낸 데이지 퀴니는 섬뜩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적의로 일그러진 얼굴 위에 띄워진 미소는 기괴한 분위기를 흘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아, 맞아.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지.”
“…….”
“이렇게 얘기하고 싶진 않았는데…….”
나지막했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데이지 퀴니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자 주변 귀족들의 흥미 어린 시선이 나와 데이지 퀴니를 향했다.
“헤일로 카르트 공자가 저에게…, 청혼서를 보냈더군요…….”
시선이 찌를 듯이 나를 향한다.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숨겨지지 않은 입꼬리가 비소를 그린 채 속닥이는 영애들.
노골적으로 나를 품평하며 깎아내리기 바쁜 귀부인들.
나는 그 가운데서 그들의 잘못이 내 잘못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파혼도 일방적으로 당한 처지에 왜 그들의 손가락질을 내가 받고 있어야만 하는지, 억울할 뿐이었다.
그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고요한 파티장에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요?”
오늘 파티의 또 다른 주인공, 록사나 케를란이었다.
그녀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파티장의 한가운데서부터 나와 데이지 퀴니가 서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부채를 펴 얼굴을 반쯤 가린 탓에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케를란 영애.”
다른 귀족들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울먹이는 얼굴을 만들었던 데이지 퀴니가 제 구원자를 만난 듯 얼굴이 환해졌다.
케를란 영애에게 한 걸음 다가간 데이지 퀴니가 하소연 같은 거짓말을 속삭이려는 찰나.
“로즈 나이트 영애, 우연이네요, 영애를 찾고 있었거든요.”
나를 발견한 케를란 영애가 탁 소리 나게 부채를 접더니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차갑게 굳어있던 얼굴은 나를 향하자마자 화색이 돌았다.
“…저를요?”
“네, 영애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거든요.”
록사나 케를란이 다정하게 말을 걸자 수군대던 영애들과 귀부인들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멈췄다.
그들은 방금까지 물고 뜯었던 나를 내버려 두고 사태를 관망하기 시작했다.
“영애께 티 파티 초대장을 매번 보내는데도 오지 않으시기에 제가 찾아왔어요.”
록사나 케를란이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장난스러운 어투에 당황한 내가 어버버하고 있자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어 데이지 퀴니와 나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휴게실이라도 가서 얘기하는 건 어때요, 영애?”
“아, 저는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나서…….”
“별로 쓸모없는 이야기인 것 같던데, 굳이 들어야 하나요?”
그렇죠, 퀴니 영애?
신랄한 말과는 달리 데이지 퀴니에게 되묻는 얼굴은 티 하나 없이 해맑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케를란 영애의 공격에 데이지 퀴니의 견고한 가면에 틈이 살짝 보였다.
방금 전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데이지 퀴니는 록사나 케를란이 제 편일 거라 믿은 모양이었다.
웃으려다 실패한 것 같은 얼굴이 나를 향했다.
“더 볼 것도 없네요.가죠.”
시원시원하게 결정을 내린 록사나 케를란이 나를 이끌고 파티장의 출구로 향한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귀족들이 빠져나갈 길을 터주었다.
록사나 케를란에게 끌려가듯 걷는 동안 주변에 서있던 영식들의 눈에서 선망, 동경과 기이한 열기가 느껴졌다.
부담스럽기만 한 시선을 피해 마주한 영애들은 시기와 열등감, 패배감이 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들을 느끼고 나자 출구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가시가 돋은 듯 불편하기만 했다.
나는 록사나 케를란이 잡아끄는 손에만 의지하며 그들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는 왜 보자고 하셨나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거 먼저 봐주시겠어요, 영애?”
“이건…….”
그녀가 내민 것은 우리 상단의 신상 향수였다.
하르텐이 막 저택에 도착했을 당시에 제작해 유통하고 대박을 친 제품이었다.
“저희 상단의 향수로군요.”
“네, 그래요.그렇지만 중요한 건 향수가 아니죠.”
그녀는 향수병을 톡톡 두드렸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즐거운 기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이 향수병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게 영애라고 들었어요, 맞나요?”
“…제작할 당시 제 의견이 반영된 향수병을 제작한 건 맞아요.”
그녀는 내 대답을 듣더니 신이 난 어조로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긴 했지만 향수병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건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문답 도중 시종일관 의아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나에게 록사나 케를란이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향수 사업은 원래 케를란 공작가에서 먼저 뛰어들었었다.
그러나 이미 향수는 적지 않은 회사들이 뛰어들어 별다른 이익을 내지 못하고 나이트 가문에 넘긴 사업이라고 했다.
“이 향수병을 보고 생각했어요.
왜 우리는 새로운 향수를 만들 생각만 했을까.
그리고 이 향수병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누굴까.”
록사나 케를란은 연극을 하는 듯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영애.그런 의미에서 영애는 내 마음에 쏙 드는군요.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저를 록사나라고 불러달라며 웃는 얼굴에는 홍조가 올라있었다.
휴게실에 들어온 내내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쏟아낸 탓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마주 웃었다.
“좋아요.록사나는 저를 로지라고 불러요.”
“좋아요, 로지!다음에 내 티 파티에 와주세요, 로지.그땐 꼭 말을 놓는 친구 사이가 되고 싶네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록사나는 소파에 파묻히듯 앉았다.
그러더니 문득 생각난 듯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무슨 일이었어요?안슈프 백작 부인께서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시기에 끼어들긴 했지만,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았는데.”
“아…, 퀴니 영애와 잠시 마찰이 있었어요.”
내가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록사나는 짧게 코웃음 쳤다.
“얼마 전부터 내 티 파티에서 그 영애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이 많더군요.어쩜 그리 영애들과 귀부인들을 잘 구워삶아 놨는지.”
“…록사나는 퀴니 영애를 좋아하지 않나요?”
내 질문에 록사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영애들과 귀부인들의 칭찬을 받는 영애는 대부분 툭 치면 어딘가 부러질 것같이 연약하고 아부에 능하기만 한 영애죠.나는 그런 종류의 영애를 싫어해요.내가 관심 있는 것은 능력의 유무니까요.”
“…….”
“자신의 외모를 믿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양이지만, 오래 못 갈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에요.
다른 영식들의 반응만 보더라도 알 수 있죠.
장담하건대, 로한의 영식들 대부분이 데이지 퀴니보다 로지를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엑스트라와 여자 주인공을 비교하는 것치곤 과한 칭찬이었다.
내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자 금세 미소를 띤 얼굴이 다정하게 말했다.
“데이지 퀴니보단 로지가 훨씬 더 아름다워요.이름 그대로 장미 한 송이가 핀 것 같은걸요.”
“저는 록사나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망설이다 수줍게 답하자 록사나가 눈에 띄게 좋아하더니 내 두 손을 맞잡았다.
“이제 보니 로지는 귀엽기도 하네요!세상에, 어쩜 이렇게 못난 구석이 없죠?”
겸양과 칭찬의 말이 오가는 사이 록사나와 한결 친해졌다.
시간이 되어 돌아가 봐야겠다는 록사나를 보내고 나니 뒤늦게 가넷과 케드릭이 떠올랐다.
데이지 퀴니의 뒤에서 언제라도 뛰어들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케드릭을 가넷이 뜯어 말리던 모습이.
나는 화들짝 놀라 휴게실에서 나와 파티장으로 향했다.
어쩜 두 사람을 까먹을 수가 있지.
오랜만에 나눈 또래와의 대화가 너무 재밌던 탓인가.
록사나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방금만 하더라도 둘만의 공간이 낯설어 쭈뼛거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색함도 잊고 둘만의 대화에 빠져 웃기 바쁜 시간이 되었다.
록사나가 떠오르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파티장으로 향하고 있는 내 맞은편에서 사람이 한 명 걸어오고 있었다.
큰 키로 보아하니 영식인 것 같았다.
평소라면 반대편 벽에 붙다시피 걸으며 시선 한번 주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감이 솟구치고 있는 지금은 달랐다.
나는 고개를 들고 당당한 걸음으로 앞을 향했다.
“……!”
“…로즈 영애.”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이는 헤일로 카르트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양새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는데 눈이 마주치자 걸음을 그대로 멈춰버린다.
나는 길 한가운데를 막고 선 헤일로 카르트를 그냥 지나칠지 아니면 아는 척할지 고민했다.
“방금 파티장에서 일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일이 있긴 했었죠.”
무시하기에는 노골적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기에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내 자세에 당황한 듯한 기색이 잠시 얼굴에 퍼졌다.
“우리가 파혼한 지 3개월이 되었던가요?”
“…3개월이 되기에는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제 귀에 청혼 소식이 들려오더라고요.”
여기서 말하는 3개월은 파혼 직후 가져야 하는 숙려 기간이다.
파혼한 귀족들은 다음 혼담을 이 숙려 기간이 끝난 뒤에 꺼내는 것을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내 삐딱한 말에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을 여는 헤일로 카르트를 보며 열심히 지껄여 보라는 뜻에서 들어주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우선 약혼은…, 집안끼리 말을 꺼낸 정도입니다.
정식으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입에서 나온 첫 말이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거였다.
나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되물었다.
“누가 보면 다른 사람 결혼인 줄 알겠네요.
본인의 혼담이라는 자각은 있나요?”
“네.”
“그럼 왜 본인의 혼담을 그렇게 남 일처럼 보는 거죠?”
“…저는 감정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이가 없어 비소하니 허공을 더듬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보다 데이지 퀴니 영애가 더 가치 있었다는 이야기로 들리네요.”
“…….”
반박할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얼굴이 꼴도 보기 싫었다.
나는 그를 지나쳐 파티장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젠 더 이상 그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다.
“케드릭 오라버니!”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영애들 몇에게 둘러싸여 곤란해하는 케드릭이 보였다.
가넷은 영애들에게 밀린 듯 처음의 그 장소, 기둥 근처에 서있었다.
나는 서서히 몰리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가넷에게 다가갔다.
“가넷,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아니에요, 아가씨.”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넷은 떠나기 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해 가넷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
“케드릭 도련님께 영애들이 춤 신청을 하셨어요.
그런데 전부 다 거절하고 계시거든요.”
“인기 좋네…….”
그 순간 1부를 마치는 종이 울렸다.
2부부터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함께 밤을 보낼 상대와 짝을 짓거나 파티장에 남거나 집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가 생긴다.
“아가씨, 파티를 더 즐기실 건가요?”
“아니, 난 집에 돌아갈래.”
“그럼 도련님은…….”
가넷이 여전히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힘들어 보이는 케드릭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나는 내가 저기에 끼어들어서 케드릭을 빼내올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다 쿨하게 결정했다.
“버리고 가자.
아무리 생각해도 저길 뚫고 데려올 자신이 없네.”
“네, 아가씨.”
나와 가넷은 먼저 파티장을 떠났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2부의 파티를 기대하는 만큼 1부가 끝난 지금, 마차 보관소로 향하는 길은 거의 비어있다시피 했다.
길을 따라 걸으며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슈라우드 영식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마주친 것도 우연이라는 생각에 인사를 하고자 했는데 영식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분명 눈이 마주쳤음에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발걸음이 느려졌다.
“아가씨?”
그래, 어차피 별 의미 없는 사람인데 뭐.
그렇게 생각을 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지 퀴니였다.
“어머, 와주셨군요, 슈라우드 영식.”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움직이던 발걸음이 또 한 번 멈칫했다.
그것은 직감 같은 감각이었다.
아까 슈라우드 영식의 대화를 자르고 끼어들었던 데이지 퀴니.
그리고 지금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나를 무시하고 지나친 슈라우드 영식.
무의식중에 등 너머로 시선이 움직였다.
그들은 멀지 않은 곳에 서있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으니까요.
받아주셔서 기쁠 따름이에요.”
“저야말로, 퀴니 영애와 이렇게 시간이 보낼 수 있어 영광입니다……!”
슈라우드 영식의 목소리가 떨렸다.
동시에 데이지 퀴니를 내려다보는 표정에는 은근한 열기가 서렸다.
에스코트를 위해 내밀어진 손이 의미하는 바를 알 것만 같아 나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들과 멀어지는 와중에도 유혹적으로 말을 거는 데이지 퀴니의 목소리와 거기에 취한 영식의 허세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용도 계속 듣고 있기 거북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로즈 나이트 영애보단 당연히 데이지 퀴니 영애가 훨씬 매력적입니다!”
소리가 점점 작아져 데이지가 뭐라고 속삭였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영식이 흥분해 지르는 소리는 귓가를 아프게 찔러왔다.
가넷이 뒤에서 씩씩거리며 뭐라 중얼거렸으나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부러 무시했다.
그날의 파티는 지친 내가 마차에서 잠드는 것으로 끝이 났다.
아침에 눈을 뜨자 옷도 다 갈아입혀진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일어난 후에는 기분이 상쾌해 전날의 파티에 대해 연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과 얽히지 않아야지.
나는 그날 이후 다시 사교계에 잘 나서지 않게 되었다.
* * *
“올해 황실 파티는 시기가 좀 이르네요.”
“벌써 황실 연회가 열린다고?”
“네, 오늘 초대장이 도착했어요.”
여느 때처럼 편지 뭉치를 가져온 가넷이 황금색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내밀었다.
책상에 놓인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편지를 열자 매년 똑같은 모양의 초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정대로 2주 뒤에 엔데버 제국에서 사신이 올 예정인가 봐.”
“그럼 환영 파티가 열리겠군요!”
“그 환영 파티를 황실 연회와 같이 진행할 생각인 것 같아.”
확실히 황실 연회는 나처럼 사교계에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참가하는 연회니 환영회와 같이 연다면 더 성대해지고 좋을 것이다.
사신들에게 로한의 위엄을 뽐낼 기회를 놓칠 수 없을 테지.
“엔데버…….”
엔데버의 사신단이라.
거리가 멀어 교류도 거의 없는 곳이지만 나에겐 누구보다 익숙한 곳이다.
나는 무의식중에 하르텐의 방으로 이어진 문을 바라봤다.
하르텐이 엔데버로 돌아가고 2년이 지났다.
그사이 아버지와 하르텐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일을 꾸미는 것 같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내가 들은 하르텐의 마지막 소식은 하르텐을 호위했던 용병단과 기사들로부터 들은 것이었다.
그들은 몇몇 위협이 있긴 했지만 황성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보고했었다.
아버지와 하르텐이 연결돼 있다는 건 가끔 예정일보다 늦게 돌아오는 상단들을 살피다가 알아낸 것이었다.
그들은 원래 정해진 루트보다 더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대부분 엔데버 제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마을을 들렀다 온 것이었다.
밤중에 엔데버 제국에서 넘어온 자들과 몰래 서신을 주고받는다고 정보원이 알아오지 못했으면 모르는 채로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내가 그 사실을 직접 알아내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뒤늦게 내 손으로 알아내고 나니 배신감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이 사실을 알기까지 걸린 1년이란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이기도 했고, 아버지에게는 연락했으면서 나에겐 연락 안 했던 하르텐에 대한 배신감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함부로 연락하지도 못했는데.
“…가씨!
아가씨!”
“어, 응?
왜?”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가넷이 성큼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번 연회도 참석하지 않으실 건가요?
작년에는…, 참석하지 않으셨잖아요.”
작년 이맘때쯤 데이지 퀴니와 황태자에 대한 소문이 돌았었다.
황태자와 데이지 퀴니가 약혼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이에 대해 록시는 연회마다 벨로프 케를란과 헤일로 카르트 중 하나를 옆에 끼고 다니더니 정작 혼담은 황태자와 주고받는다며 어이없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시기에 연회에 참가해 봤자 헤일로 카르트와 벨로프 케를란의 이야기로 시끄러웠을 것이다.
더불어 헤일로 카르트와 나를 저울질하며 누가 더 비참한지 비웃을 귀족들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여 불참한 것도 있고.
그러나 의외로 약혼은 황실 측의 묵묵부답과 퀴니 공작의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계속 미뤄지는 중이었다.
원작에서도 그맘때쯤 약혼 이야기가 나왔다가 데이지의 욕심으로 계속 미뤄지긴 했지만 정말 의외인 것은 황실 측에서도 계속 선택을 미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작에선 황태자가 데이지 퀴니에게 반해 추진했던 약혼인 만큼 황실은 둘의 약혼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황태자가 관심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원작만큼 노골적이지 않고, 황실은 아예 소문으로부터 귀를 닫은 모양이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참석…해야지.”
엔데버 제국의 사신단이라면 나 역시 볼일이 있다.
안전을 위해서라며 사신단의 명단을 공개하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올 것이라고 예상 중인 사람이 있었다.
“대신 치장은 과하게 하지 마.
올해는 볼일이 있어서 가는 거니까 최대한 눈에 안 띄어야 해.”
“하지만 아가씨는 어떻게 입어도 아름다우신걸요.
이미 늦었어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올해도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부디 작년의 그 충격을 다시 받지 않기를 기도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년엔 드레스가 너무 부담스러워 가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가넷은 룰루랄라 방을 떠났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연회 당일.
아침에 깰 때부터 좋았던 기분은 연회에 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지속되었다.
어머니의 협박과 가넷의 감시, 아버지의 은근한 서류 뺏기로 잠자는 시간이 더 늘어서일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상쾌했던 기분은 계속 이어져 평소라면 긴장했을 홀의 복도에서도 꽤 여유롭게 주변을 구경할 정도가 되었다.
“아가씨, 기분이 무척 좋으신가 봐요.”
“음…, 그러게.”
“어젯밤에 충분히 주무셔서 그래요!”
잠도 안 자고 서류에만 매달려 있는 나를 걱정하던 가넷이 내린 결정은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거였다.
서류를 다 처리해야만 연회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며칠째 쪽잠만 자는 나를 보다 못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어머니는 가장 먼저 나에게 서류를 보내는 아버지를 혼내시고 내 집무실에 발을 들이셨다.
아버지가 서류를 뺏어가는 와중에도 밤을 새우겠다며 촛불을 켜는 나에게 촛불로 서류를 다 불태우겠다며 협박하시더니 9시부터 나를 잠자리에 눕히고 떠나셨다.
“…다음부터는 밤 안 새우고 잘 테니까 어머니를 부르지는 마.”
어젯밤 촛불을 흔들며 웃으시는 어머니의 기세에 순한 양이 되어 그 말을 따라야 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역시 검을 잡으신 분이라 그런가, 손에 무기가 쥐어져 있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신다.
“…네.”
나와 마찬가지로 겁먹었던 가넷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를 든 어머니가 다가오는 그 장면은… 꿈에 나올까 무서운 장면이었다.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가넷과 이야기하는 사이 연회장의 입구에 도착했다.
잔뜩 긴장한 듯한 시종이 명단과 펜을 내밀었다.
나는 내 이름을 적고 그 옆에 사인한 뒤 다시 내밀었다.
배에 힘을 준 시종이 문을 열고 내 이름을 외치자 문 근처의 귀족들이 나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2년이란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그 2년 동안 내가 사교계에 얼굴을 거의 안 비친 탓도 있어 그들이 내게 보내는 시선은 예전만큼 날 서있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호의적인 것도 아니지만.
“로지!”
“아, 록시.”
록사나가 로위나 메리안과 함께 나에게 다가왔다.
며칠 전의 편지에서 얘기했던 은빛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디자이너의 혼을 갈아 넣은 드레스인 게 티가 났다.
가넷이 옆에서 감탄의 한숨을 흘렸다.
“오늘 정말 예뻐, 로지!”
“내가 뭘…….
네가 훨씬 아름다워, 록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칭찬 사이에 로위나 영애가 말을 보탰다.
록시와 친해지며 이리저리 말을 나누게 된 영애인데 나와도 마음이 잘 맞아 퍽 친해졌다.
“록사나 영애의 미에 대한 감각은 특별하죠.”
평소처럼 무표정을 고수한 로위나 영애가 은빛 드레스 끝자락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아래쪽에 놓인 금빛 자수가 정말 아름다워요.”
“전 색감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은가루가 뿌려져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거리는걸요.”
“어머, 오늘 신경 쓴 보람이 있네.”
우리 두 사람의 칭찬에 록시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치장에 관심이 사라진 나와 관심은 있지만 감각이 없어 포기한 로위나가 드레스를 칭찬하는 일이 드물었던 탓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종이 건네는 샴페인 잔을 받아 홀짝이기 시작했다.
“오늘 사신단도 연회에 참석한다지?”
“전원 참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오긴 오겠지.”
“아직까지도 사신단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니, 정말 만반의 준비를 했나 봐요.”
나와 록시가 동의한다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엔데버 제국의 수도에서 로한의 수도까지 오려면 분명 여러 도시들을 통과해야 했을 텐데 아직까지 아무런 정보도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황궁에 도착하고 나면 알음알음 정보들이 새어 나올 구석이 많을 텐데도 이렇게 베일에 싸인 것을 보면 정보를 틀어막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음이 느껴졌다.
“엔데버의 황족이라도 온 게 아닐까요?
아니면 공작이라든가…….”
분석에 능한 로위나가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지만 록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인질로 잡히면 분명 타격이 클 거야.”
“좋지 않은 생각이긴 해요.”
나는 잠시 하르텐을 떠올렸다.
하르텐은 현재 엔데버의 유일한 직계 황족이다.
방계 황족들이 몇 있긴 하지만 황제가 직계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며 하르텐을 불렀으니 황자의 자리를 인정받은 하르텐은 그 앞에 탄탄대로만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로한 제국에 사신으로 온다고?
좋은 생각이 아니다.
목이 타 빈 잔을 두고 새 잔을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멀리서부터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연회에 사신단이 참여하는 경우 들리는 북소리였다.
록시와 로위나 영애, 나는 연회장의 또 다른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황제와 황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을 잡은 채 등장한 두 사람이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올리자 모든 귀족들이 일제히 몸을 숙였다.
나와 로위나, 록시도 그에 맞춰 몸을 굽혔다.
아마 황태자와 사신단이 그 뒤를 이어 함께 등장할 것이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어 그가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입장이 끝나고 북소리가 끝나기 전까지는 함부로 고개를 들어선 안 된다.
나는 궁금한 마음을 애써 눌렀다.
“고개를 드시게.”
북소리가 멎었다.
모든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파티장의 중앙 계단 위에 서있는 인물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왼쪽 끝에서부터 모두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응?”
“로지, 무슨 일 있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는지 록시가 속닥속닥 말을 걸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이 있는 건 맞지만 대답할 수 없다.
“무슨 일 있나요?”
로위나까지 가담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록시가 의아한 눈을 하긴 했지만 황제가 연설을 시작하자 거기에 집중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힐끔힐끔 사신단 행렬을 훑기 시작했다.
내가 찾던 사람이 있긴 있었다.
그런데 있으면 안 되는 사람도 저기서 발견해 버린 것 같다.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눈이 마주쳤다.
착각인가?
거리가 거리인 만큼 아닐 확률이 높다.
아마 연회장을 훑어보다가 스쳐 지난 거겠지.
하지만 그 시선이 1분 동안 이어지자 더 이상은 우연이라고 넘길 수 없었다.
그는 나를 찾고 있었다는 듯 내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우연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순간, 그는 미소 짓는 얼굴로 다시 시선을 보냈다.
그는 2년 전 엔데버로 돌아갔던 하르텐이었다.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현실이었다.
어떻게 봐도 익숙하기만 한 얼굴이었다.
나는 힐끗 한 발자국 뒤에 물러서 있는 가넷을 살폈다.
가넷은 여타 시녀들과 마찬가지로 황족들과 얼굴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그렇다면 가넷은 아직 하르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거겠지.
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축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사신단을 위한 환영사와 제국을 위한 축사가 계속되다 보니 평소보다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면 얼굴을 뚫어버릴 듯 집요한 시선을 보내는 하르텐 때문에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고.
그를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나와 달리 내 옆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은 단 한 번도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축사는 앞으로 10여 분 더 이어지며 제국의 번영을 기원할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흘렸던 시간이 이렇게나 불편하게 느껴질 줄이야.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신경을 분산하려 노력했다.
함께 서있던 록시가 고개를 돌리더니 축사를 지루해하는 동생을 보는 듯 조그맣게 웃었다.
부끄러움에 볼이 달아올랐다.
“로지, 사신단에 너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있네.”
“…으, 으응?”
“음,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나 봐요.
아까부터 너무 노골적이긴… 했죠.”
둘 다 하르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급히 손을 내저었다.
“무슨 그런 소리를…….
착각이야.
록사나, 놀리지 마.
로위나 영애도요.”
“어머, 착각이라니.
저 시선부터 어떻게 하고 부정하지 그래?
이젠 내 얼굴에도 구멍 하나 생길 것 같은데.”
록시가 빙글빙글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입가에 미소를 걸친 로위나 역시 다급하게 부정하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 내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놀림에 더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려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뜨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축사가 끝나면 어서 연회장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다른 귀족들도 낌새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며 다시금 샴페인을 들이켰다.
아까부터 여러 이유로 일곱 잔이나 비웠다.
평소라면 술기운에 기절하듯 잠들었을 양이었다.
이제 그만 마셔야겠단 생각을 하며 여덟 번째 잔을 비워냈다.
다행히 축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록시와 로위나에게 휴게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마지막 잔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마지막 잔 이후로 급격히 몰려온 술기운에 머리가 멍했지만, 가넷의 뒤를 따라가니 출구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연회장을 떠나기 직전 사신단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천천히 이어지던 시선은 하르텐을 지나 그에게로 이어졌다.
하르텐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