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백일홍 (2)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나를 반겼다.
어리둥절해 몸을 일으키는데 아직 밖이 어두컴컴했다.
벽에 걸린 그림이나 방 곳곳에 놓인 에메랄드 동상이 황궁임을 짐작하게 했다.
아무래도 술을 마시고 뻗어 휴게실에서 잠든 것 같았다.
축사를 들으며 어서 연회장을 벗어나야지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백지인 양 깨끗했다.
“아가씨.”
“텐…….
아, 아니, 황자 전하.”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방에서 갑자기 하르텐이 나타났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깜짝 놀라 어깨가 튀어 올랐다.
예법을 지키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오려 몸을 일으키자 섭섭하다는 듯 금세 울상 지은 그가 나를 도로 눕혔다.
“황자 전하라뇨.
저를 다시 텐이라 불러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제, 제가 언제……?”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아니, 지금 왜 같은 방에 있는지도 전혀 기억이 없는데 내가 텐이라고 불러주겠다 했다고?
“흐음, 제가 분명 황자 전하라고 부르시면 기대하라고 말씀드렸는데.”
“……?”
물론 존댓말도 전혀 안 된다고 했었어요.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기대하라니, 전혀 기억에 없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하르텐이 빙긋 웃더니 머리카락을 들어 입 맞췄다.
“모르는 척하시려고요?”
“…….”
“아니면, 정말 모르시는 걸까.”
담백하기만 했던 첫 움직임에 비해 그다음 행동은 조금 더 노골적인 목적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을 넘겨 드러난 목덜미에 간질간질한 숨결이 닿았다.
나는 그를 밀어내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둘지 고민에 휩싸였다.
그사이 하르텐은 내가 몸을 가리려 급하게 끌어모았던 시트를 치워냈다.
“아가씨.”
“…….”
“싫으시면 밀어내시면 돼요.
언제나 그랬듯이, 저는 아가씨 말씀이라면 따를 테니까.”
고민하는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하르텐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제 목줄을 내미는 것처럼 유순한 눈매의 시선이 2년 전의 그와 겹쳐졌다.
하르텐은 단 한 번도 내가 거부하는 것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서든 나를 최우선으로 했다.
그때의 내가 그에게 진심으로 의지했을 정도로, 그는 내게 헌신적이었다.
하르텐의 혀가 축축한 감각을 남기며 목덜미 위로 미끄러졌다.
혀로 핥은 부분 위에 이를 세웠다가 다시금 혀로 쓸어내린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하르텐은 집착적으로 목을 핥고 빨며 물었다.
내일 내 목 상태가 어떨지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하르텐과 함께 보낸 밤이면 늘 새겨져 있던 순흔들이었으니.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고.
가넷과 드레스를 골라내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그를 관찰하다가 과거와 현재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하르텐은 늘 평범한 드레스로는 가려지지 않는 곳에 흔적을 남기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풍성한 레이스를 싫어하는 탓에 목덜미 부근은 장식이 없는 드레스를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그걸 아는 하르텐은 늘 목덜미와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부터 제 흔적을 깊게 새기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내 어깨를 잘근잘근 물고 있는 하르텐은 그 근방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들였다.
하르텐이 만족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나는 반대편 어깨로 옮겨가려는 하르텐을 내게로 끌어당겨 입 맞췄다.
시작은 분명 나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 적극적인 건 하르텐이었다.
그는 내 목 뒤를 받치며 혀를 깊숙이 찔러 입천장을 긁었다.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렀지만, 두 사람 다 그런 곳에 쓸 신경이 없었다.
혀를 한번 얽으며 잠시 잠잠했던 하르텐이 다시금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것을 등을 쳐 막아냈다.
빈틈없이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콜록대며 입을 가리는 내 손 위로 전혀 타격이 없어 보이는 하르텐이 잔 입맞춤을 남겼다.
겨우 기침이 멎으려는 찰나에 입을 가린 손을 치워낸 하르텐이 내 입술을 핥으며 다시금 입 사이를 갈랐다.
겨우 갈무리된 호흡이 다시 가팔라졌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저렇게 숨이 안 찰 수 있지?
경험의 차이인가?
“흐으…….”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이르게 숨이 찼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하르텐에게서 몸을 빼내려 하자 등을 받친 손에 힘을 줘 나를 제게로 끌어내린다.
침대와 하르텐의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하기도 힘들어졌다.
“아가씨.”
“…….”
“이제는 대답해 주세요.”
또 키스하기 전에.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훑는다.
그의 아래에 깔린 채로 느끼는 그의 존재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포식자 앞에 던져진 초식 동물처럼 절로 몸이 굳었다.
내 얼굴을 쓸어내리는 다정한 눈길 이면에 진득한 무언가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
내가 망설이는 사이 하르텐은 내 긍정적인 반응에 웃음을 머금었다.
별것 아닌 그 부름이 뭐라고, 그는 몸을 낮춰 내 발등에 입 맞췄다.
그 일련의 행동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광경이었으나 고개를 든 그의 눈에 서린 정염을 마주하자 그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하르텐은 발등을 시작으로 발목, 무릎, 허벅지에 차례로 혀를 대며 잇자국을 새겼다.
늘 거울로 보던 흔적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게다가 이 정도의 흔적이면 야외용 드레스도 입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르텐을 말리기보다는 그의 혀가 내 몸을 타고 오르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핥는 하르텐은 상상 이상으로, 야했다.
묘한 기대감에 몸이 한껏 예민해졌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더듬는 감각에는 절로 허리가 떨렸다.
타액으로 젖은 살결이 채 끄지 못한 램프의 불빛에 반질거리며 빛났다.
그의 잇자국이 새겨진 곳에는 음영이 져 흔적 하나하나가 시야에 들어찼다.
그는 가장 마지막 흔적을 새긴 왼쪽 허벅지에서 얼굴을 떼어내더니 제 흔적을 감상하듯 다리를 한번 훑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예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하르텐이 속삭였다.
흥분한 기색이 숨겨지지 않는 목소리에서는 은근한 색기가 배어났다.
희미한 불빛이 밝힌 그의 왼쪽 눈가가 찡그려졌다.
“아가씨는 발목이 예뻐요.”
그래서 발목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으실 때마다 이곳에 잇자국을 새기는 상상을 했어요.
비밀을 속삭이는 듯 은밀한 목소리가 유혹적으로 와닿는다.
갈 길을 잃은 내 손이 붙잡을 곳을 찾아 흐트러진 가운 자락 끝에 매달렸다.
그와 키스하는 사이 이리저리 마찰했던 가운은 겨우 몸에 붙어있는 수준이었다.
단단히 묶은 매듭 덕에 몸 위에 걸쳐져 있는 모양새는 취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움직이면 금방이라도 쓸모없어질 것만 같다.
혹시라도 풀릴까 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는데 어느새 상념에서 빠져나온 하르텐이 이중으로 묶인 가운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손수 내 가운을 벗겨낸 하르텐은 망설임 없이 침대 아래로 가운을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드러난 알몸이 부끄러워 몸을 움츠리자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어깨에 잔 입맞춤이 퍼부어졌다.
잠시 소강상태였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내가 움츠러든 몸을 펴지 못하는 사이 하르텐은 내 왼손을 들어 약지를 입에 물었다.
그의 얼굴에 손톱이라도 세울까 걱정되어 빼내려 했으나 끝까지 놓아주지 않은 하르텐은 잇자국을 깊숙이 새기고서야 입을 뗐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다른 곳에 비해 유독 움푹하게 잇자국이 남았다.
이 정도라면 내일 멍이 들겠다 싶어 걱정되었는데 정작 사고를 친 하르텐은 눈웃음치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요?”
은근슬쩍 제 몸을 내게 밀어붙인 하르텐이 물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와 달리 얇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던 하르텐이 몸을 밀착하자 맨살에 천이 스치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 언저리 단추 하나를 풀어냈다.
첫 단추를 풀어내자 그 뒤는 더 쉬웠다.
하나둘 단추가 풀려감에 따라 셔츠가 벌어지며 그 안쪽의 몸이 드러났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었는데 하르텐은 한술 더 떠 제 허리춤까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바지 버클에 손이 닿자 자동적으로 손이 움츠러들었다.
셔츠와 달리 바지는 단추 하나만 풀면 금세 끝날 텐데도 더 어려웠다.
망설이는 나를 하르텐의 손이 재촉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려는 것처럼, 하르텐의 손이 내 손을 제 버튼 위에 올린다.
그 순간 나는 묻어두고 있었던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아……?”
“왜 그러세요?”
질문에 대답을 해줄 당사자가 눈앞에 있었지만 너무 낯 뜨거운 얘기인 것 같아 볼이 붉어졌다.
이런 얘기를, 이 순간에 해도 되려나?
나는 힐긋 그의 허리춤을 살폈다.
지금 물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을까.
하르텐의 그…것이 서는지, …여기까지 해놓고서 묻는 건 조금…….
“아가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전혀 모를 텐데, 그걸 알고 있음에도 얼굴을 마주하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아니, 이런 상황에 그게 생각날 게 뭐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가 바라는 대로 바지 단추를 마저 풀어냈다.
입술로 어깨 여기저기를 지분거리던 하르텐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의 은은한 불빛이 그에게로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는 내가 엉성하게 벗겨놓은 옷을 아예 벗어 던지고 다시 내게 몸을 기울였다.
쇄골 근처에서부터 미끄러진 손가락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아랫배를 향했다.
아랫배마저 스쳐 지나간 손가락이 은밀한 곳을 향한다.
골짜기를 살짝 벌리며 파고든 손가락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음핵이었다.
예민한 부분에 접촉한 손가락이 느긋한 마찰을 시작했다.
“으응…….”
단단한 손가락이 가장 예민한 곳에 문질러지는 감각이 좋았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신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만족한 한숨을 내쉬자 하르텐은 가슴 한가운데 솟아있는 정점을 입에 넣고 굴렸다.
축축한 점막이 천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성감대를 희롱하는 감각이 뇌를 관통했다.
그가 반대편 가슴을 노리며 몸을 옮기는 그 짧은 순간에는 아쉬움마저 느꼈다.
그사이 음핵을 문지르는 손가락도 가만있지 않았다.
좌우로 굴리다가 크게 원을 그리거나 가볍게 문지르다가도 가끔 두 손가락으로 작은 살덩이를 압박했다.
한껏 흥분한 몸은 그 모든 감각을 쾌감으로 느꼈다.
한창 몸이 달아올랐다.
하르텐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두 가슴은 공기에 노출되며 차갑게 식었지만 음핵을 굴리는 손길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접촉하고 문지르다, 꾸욱 눌러오는 감각.
그러나 자연스레 이어지던 그다음이 없었다.
다가올 새로운 쾌감을 바라던 몸이 한순간에 식었다.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가씨.”
“…….”
“제가 기대하라고 했었죠?”
그 순간 아까 잠에서 깨자마자 했던 대화가 기억났다.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어?
하르텐은 여전히 여유 가득한 얼굴로 음핵에 맞닿아 있는 손가락을 튕겼다.
“불러요, 내 이름.”
이다음에 이어질 쾌감이 뭔지 알고 있는 몸이 망설이는 이성을 다그치고 있었다.
저는 아쉬울 것이 없다는 듯 웃고 있는 하르텐의 얼굴은 얄밉지만, 이미 달아오른 몸으로 그만두기도 싫었다.
어차피 불러달라는 것도 하르텐인데 내가 망설일 필요가 있나?
“…텐.”
“네, 아가씨.”
하르텐이 기쁘다는 듯 응답했다.
2년 전의 그때처럼, 내 클로버로 묶여있던 그 시절처럼.
제가 원하는 것을 얻어낸 하르텐은 젖어있던 구멍에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오랜만의 삽입에 하나뿐인데도 이물감이 느껴졌다.
하르텐은 손가락을 굽히거나 내벽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나를 자극했다.
계속되는 자극에 부푼 음핵을 엄지손가락이 간간이 눌러온다.
하르텐은 차근차근히 내벽을 넓혔다.
음핵을 꾹 누르며 손가락이 내벽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을 때는 자극이 과해 허리가 반사적으로 튀어 올랐다.
안을 크게 한번 휘저은 손가락이 밖으로 몸을 물리자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손가락이 다시 밀려들어 오며 엄지손가락이 다시 음핵 위로 문질러졌다.
“여전히 좁네요.
이대로면 다치겠어요.”
“아, 아읏.”
하르텐이 뭐라 말을 걸었지만 이미 쾌감에 심취한 나는 반도 듣지 못하고 흘렸다.
가볍게 혀를 찬 하르텐이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기 시작했다.
겨우 끄트머리를 밀어 넣었을 뿐인데도 압박감이 더했다.
2년 전에는 젤의 존재로 인해 이 정도 압박감을 느껴본 적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황궁엔 그런 물품이 전혀 구비되어 있지 않아 하르텐이 더 신경을 기울이며 움직여야만 했다.
하르텐의 손가락이 공기를 가르자 축축한 액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공간에 울려 퍼진 소리가 야했다.
하르텐은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얼굴을 내려 허벅지 부근을 핥았다.
몸속의 손가락이 반 바퀴를 돌며 내벽에 문질러졌다.
동시에 하르텐의 혀가 음핵을 밀어 올렸다.
균열이 시작되는 부분과 음핵이 맞닿은 부분을 혀로 쿡쿡 쑤시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때요, 아가씨.
이제 더 넣어도 될까요?”
그대로 내가 적응하기까지 기다릴 것 같았던 하르텐은 먼저 조급함을 내보이며 손가락 하나를 더 들이밀었다.
하르텐이 제 손가락을 물고 있는 입구 주변에 혀를 대며 차근차근히 넓혀간 탓에 압박감도 훨씬 덜했다.
“어디가 기분 좋으신가요?”
내벽을 차근차근히 짚으며 하르텐이 물었다.
삽입된 세 손가락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탓에 감각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 느껴지는 쾌감이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여기는?”
하르텐이 몇 번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자극했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곳이 없었다.
오히려 애매하게 부추겨진 쾌감들이 완벽하게 해소되지 못하고 몸 안에 갇힌 듯한 감각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조금 더, 조금 더 강렬한 자극이 필요했다.
“테엔…….”
계속 이어졌던 애무는 분명 쾌락을 동반했지만 터트리지 못하니 괴롭기만 했다.
나는 어떻게든 해달라는 심정으로 하르텐에게 손을 뻗었다.
어리광 부리듯 제 얼굴을 내 손에 가져다 댄 하르텐이 조용히 물었다.
“이대로 괜찮으세요?”
나는 뭐가 괜찮은지 되물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나는 후회했다.
그가 괜찮냐고 물었을 때 안 괜찮다고 했어야만 했다.
아니, 적어도 뭐가 괜찮아야 하는지 정도는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그런 걸 따질 정신을 붙잡아 왔을 땐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흐른 뒤였다.
이미 하르텐은 제 성기를 내게 문지르고 있었고, 달아오른 몸은 그 몸짓에도 흥분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줄도 몰랐던 술기운은 하르텐이 내게 몸을 기울였을 때 정말로 다 날아가 버렸다.
손가락과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두께가 느껴졌다.
“이, 이게 무슨…….”
역시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다.
어쩌다 이 상황까지 오게 만들었을까.
아니, 술에 취했으면 얌전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여기에 있다가!
“힘 풀어요.”
아니, 그럴 거면 그 두께부터 어떻게 하고…….
아니, 잠깐만.
…애초에 안 서는 거 아니었어?
왜 나는 이제야 위화감을 느끼는 거야?
그러나 온통 물음표가 떠있는 내 상태를 전혀 모르는 하르텐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구에 귀두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입구를 가르고 들어올 것만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음핵부터 입구까지 길게 한번 문질렀을 땐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지며 절로 다리가 움찔 떨렸다.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간 근육을 쓰다듬던 하르텐이 삽입을 시작했다.
더불어 애매하게 달궈져 있던 몸이 자동적으로 손을 뻗어 어깨를 붙잡으며 매달렸다.
느릿느릿 진입하는 그것은 그 어떤 기구로도 느껴보지 못한 두께였다.
하르텐이 늘 나를 배려한다며 초보자용 운운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술에 취한 머리로는 그때의 크기가 상상의 한계였던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하르텐이 조급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애무에 소홀하진 않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집요하게 몸을 물고 빨고 핥았지.
그래서인지 삽입은 무리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불어 손가락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던 깊은 곳이 자극되며 하르텐이 그토록 찾던 쾌락점이 짓눌렸다.
“아응, 흐…….”
“…아가씨, 여기가, …기분 좋으신가요?”
그토록 바라던 쾌감이 머릿속을 한번 헝클어트렸다.
눈물이 고일 만큼 강렬한 감각이었다.
잠시 멍하니 감각에 휩쓸려 나를 놓았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흐으으, …아가, 으응, 아가씨라, 읏, …고 하지, 마.”
“후우, 안이, 무척 뜨겁네요.”
모르는 척 말을 돌리는 남자를 노려보며 물기에 젖은 눈을 깜빡였다.
지나친 쾌감에 흘러내린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르텐이 다정한 얼굴로 눈물을 핥았다.
“역시, 실제로 보니까 좋네요.”
눈을 깜빡일수록 고여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교적 또렷해진 시야에 하르텐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떠날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얼굴.
그러나 그 표정만은 예전과 달리 무척 부드러워져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것만 같다.
얼굴은 익숙한데, 그 얼굴이 담고 있는 감정이 너무도 낯설었다.
술기운에 놓치고 있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소년티마저 사라진 얼굴은 완연한 남자의 것이었다.
달빛이 요요히 그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이렇게 예쁘게, 후, 울 줄 몰랐는데.”
부드럽게 올라간 입에서 뱉어내는 말이 파렴치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얼굴에 홀렸던 정신을 다잡았다.
성격부터 뭐 하나 예전과 닮은 점이 없다.
도대체 나는 뭘 보고 하르텐을 떠올렸던 걸까?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어 봐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를 살피던 얼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여유로우신가 봐요?
얕은 움직임을 반복하던 하르텐이 느릿하지만 크게 한번 허릿짓했다.
으으응, 읏.
의지와는 달리 낯부끄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그가 자세를 바꾸는가 싶더니 조금 거칠게 파고든다.
아까 무심결에 반응을 보였던 부분을 집요하게 노리는 몸짓이 자비 없었다.
질척한 액이 살과 부딪치는 소리, 살과 살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가득했다.
간간이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하르텐의 신음 소리도 들렸다.
여유롭게 웃고 있던 얄미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무슨!
응, 무슨 소리, 를 하는, 읏, 거야아…….”
아래에서 계속 쿡쿡 쑤셔지는 쾌감과 흔들리는 몸 탓에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마치 앙탈 부리는 듯한 말투에 되레 놀란 것은 나였다.
나는 열이 오르는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며 눈앞의 얼굴을 노려봤다.
그러나 정사에 집중한 그는 내 말조차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크게 뒤로 빠졌다가 다시 쳐올린 성기가 아까부터 한 점만 집요하게 눌러왔다.
나는 진저리 치며 그의 등에 매달렸다.
한 번, 두 번 그의 몸이 나를 내려찍을수록 점점 더 고조되는 감각이 무서웠다.
부유감에 무서워 그의 등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허리를 뒤틀었다.
일그러진 얼굴의 그가 이를 악물었다.
몸이 부딪치며 흔들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급하게 얼굴을 내려 입술을 찾는 몸짓이 다급했다.
“응, 으응, 흐응!
으으응…….”
입술이 맞대어지자 흘러나오던 신음이 목에서 막힌 듯 울렸다.
그러나 아까처럼 그 신음이 부끄럽다든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런 생각이 들 틈조차 없었다.
쾌감이 과했다.
이때까지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쾌감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딱 죽을 것 같았다.
델 듯 뜨거운 덩어리가 입구를 벌리는 감각이 생생했다.
빠져나가던 성기의 귀두가 입구에 걸리는 감각마저도 소름 끼치는 쾌감으로 다가왔다.
그저 찌르고 빠지고 하는 단순한 왕복 운동인데, 심지어 나는 아래에 깔려서 그를 받아내기만 하는 입장이었는데도, 그럼에도 까딱 잘못하면 죽겠다 싶었다.
아니, 그래서 죽을 것 같은 건가?
복상사라는 말이 영 없는 말은 아니었다고, 멍한 정신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흐아, 안, …안 돼…….
싫어!”
내가 반쯤 정신을 놓은 사이에도 파도는 계속 몰아치고 있었다.
온몸으로 그 파도를 껴안고 버티던 나는 곧 도망치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다.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이 그를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지금도 충분히 쾌감이 과했다.
멈추지 않는 감각이 공포스럽기만 하다.
본능이 파도 끝에 쓰나미가 몰려올 거라고 속삭였다.
그 끝을 맞이하면, 정말로 쾌감에 취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아있던 생존 본능으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아, 안 됩니, 다.
가만히, 후, 계세요…….”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가가 원망스럽다.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몸을 그가 온몸으로 내리눌렀기 때문이었다.
아, 아, 아아.
말을 잃은 사람처럼, 나는 단말마의 신음만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온몸이 곧 다가올 감각을 대비하려는 것처럼 긴장으로 굳어졌다.
눈이 홉뜨이고 입이 벌어졌다.
그가 뭐라 짓씹듯이 중얼거리며 온 힘을 실어 몸을 내리누른 순간, 나는 그대로 절정에 올랐다.
“흐아, 아, 아아앙!”
몸이 통제를 벗어나면서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아래에 박힌 남자의 페니스가 한 번 더 빠져나갔다가 거세게 밀어붙여졌다.
수축한 내벽으로는 그 감각도 과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곧 따뜻한 무언가가 몸 내부를 채우고 내내 벌어져 있던 질구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눈을 떴다.
눈을 감았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정도로 까무룩 잠이 들었던 듯싶다.
시야가 선명해지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복근과 가슴팍 덕분에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곧바로 실감하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목 아래에 베개치고는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닿아있는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시선을 돌리니 하르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옆에 누워있었다.
목 아래에 느껴지던 딱딱함은 내 베개 대신 받쳐져 있던 하르텐의 팔이었다.
혹시라도 팔이 저릴까 싶어 고개를 살짝 틀자 그가 곧바로 반응했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아, 으응.”
그가 몸을 움직이자 시트와 맨몸이 마찰하는 감각이 선명했다.
꿈이라며 넘기기엔 너무나 선명한 기억이 머릿속에 몰아쳤다.
제정신인 상태로 현실을 마주하고 나니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어졌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지.
눈앞에 하르텐만 없었으면 진지하게 고찰해 볼 만한 주제였다.
나는 아침부터 심란한데 같이 일을 친 그는 얼굴에서 빛이 나 보였다.
포만감에 찬 표정으로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은근슬쩍 입술을 비비며 밤 내내 물어뜯었던 흔적들을 핥는 감각이 선명했다.
이 사태를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서는 그를 밀어내고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맞겠지만 그 커다란 몸을 내게 비비적대는 감각이 싫지만은 않았다.
마치 큰 맹수가 내게만 배를 까뒤집고 애교 부리는 기분이랄까.
“아가씨께서 처음이라는 사실을 잊고…, 조금 과했던 것 같아 반성하던 중이었어요.”
“응, 어?
어어…….”
반성?
과했…, 뭐, 뭐?
뒤늦게 이해하고 얼굴을 붉히는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본다.
가슴께에 간질간질한 파문이 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꿈인가, 꿈이겠지?
현실 도피 중인 나를 현실로 끌어오듯 입술을 마주 댄 그가 조그맣게 웃었다.
부정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처음이신 게 맞다는 뜻이군요.
그 와중에 유도 심문까지 하고 있었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하르텐이 아닌 것만 같다.
겉가죽만 같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이제 낯선 것을 보는 눈으로 그를 한번 훑어봤다.
“이게…, 뭐 어떻게…….”
“2년 동안, 그 공…, 흠, 아무튼 누가 아가씨를 채 가진 않았을까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너 왜 이래?
갑자기, 이거,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어.”
이쯤 되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걸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분명 헤어지기 전날까지도 무뚝뚝한 얼굴로 말 한마디 안 걸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인사마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서먹하게 남겨놓고 떠났으면서.
왜 이렇게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까.
이 괴리감은 어쩔 거야, 도대체?
어젯밤 연회장에서의 그를 떠올려 보면 시선이나 표정이 지금의 상태에 더 가까웠던 것 같긴 하지만, 남들의 시선이 있는 곳이라 그런 줄 알았지 정말 이렇게 180도 뒤바뀌어서 왔을 줄이야.
“이제 앞으로 그 새끼만 처리하면…….”
“응?
뭐라고?”
내 생각에 빠져 웅얼대는 그의 목소리를 전부 다 듣지 못했다.
뭘 처리한다고?
의아해 되물었지만 그는 기쁘게 웃는 얼굴로 다시금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너무 예뻐서.
목덜미에 간질간질한 숨이 느껴졌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낯설다.
뒤이어 덧붙이는 아가씨, 하는 호칭에는 다디단 꿀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 잠은 충분히 주무셨나요?”
등에 달라붙어 있는 온기가 낯설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맨살을 맞대고 잠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 낯설다는 말보단 처음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달라붙는 하르텐에게서 몸을 물리고 시선을 마주했다.
어제부터 느꼈지만, 시선을 마주할 때면 하르텐의 눈가가 자동적으로 휘어진다.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어쩔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건 되레 나였고.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속절없이 그에게 휩쓸려 가는 것만 같다.
닿아있던 몸을 떼어내자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등 뒤에 찬 기운이 돈다.
침대에 넓게 펼쳐져 있는 시트로 몸을 감싸 매는데 은근슬쩍 다가온 손이 내 허리를 끌어당겨 제 허벅지 위에 앉혀놓았다.
한두 번 그를 떨어뜨려 놓은 게 아니니 내가 그를 밀어내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도 하르텐은 쉬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젯밤 내내,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이미 호되게 당한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는 탓인지 말을 놓는 건 비교적 쉬웠다.
시선을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목소리를 가다듬는 것 또한.
그러나 여전히 다정한 저 시선은 어렵기만 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 사람처럼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것도 분명 이 때문이겠지.
“술에 많이 취하신 것 같아 걱정되어 쫓아왔어요.
잘 계신지만 확인하고 가려 했는데 문을 잠그지 않으셔서…….”
…내가 술에 취했다고?
잠이 들었다 깬 뒤의 기억은 비교적 명료한데, 파티장에 있던 내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하르텐의 설명을 들었다.
하르텐은 파티장을 나서는 나를 뒤쫓아 왔다고 한다.
사신단에서도 핵심 인물인 그가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걸까?
의문이 들었으나 내가 물을 순 없는 질문이었다.
“가넷은 제가 보냈어요.
너무 취하셔서 몸을 못 가누시기에.”
하르텐이 손을 들어 어깨를 문지른다.
춥지 않으세요?
라며 웃는 얼굴을 보아하니 시트 아래로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나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드레스를 부탁했다.
“물론이죠, 아가씨.”
하르텐은 나보다 먼저 일어났던 건지 간단한 셔츠와 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시트 아래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와는 대비되는 복장이었다.
“시중을 들어드릴까요?”
“아, 아냐, 고개 돌리고 있어.”
아무리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라지만, 그래도 대낮부터 맨몸으로 그 앞에 설 자신은 없다.
나는 하르텐이 벽을 보고 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가지런히 정돈된 옷을 하나하나 챙겨 입었다.
중간에 드레스의 지퍼를 잠그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나머지 옷가지들은 평소에도 혼자 입던 것들이라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다 입으셨나요?”
“응, 됐어.”
드레스 밑단을 정리하고 있는데 하르텐이 타이밍을 맞춰 물어온다.
나는 고개를 돌려도 된다는 의미에서 긍정했다.
옷 다음으로 문제인 머리를 대충 빗으며 그러모으고 있는데 하르텐이 성큼성큼 걸어와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이쯤 되면 내게 접착제를 발라놓은 건 아닐까 싶다.
“새 드레스를 준비해 드리고 싶었는데.”
어제의 드레스를 다시 갖춰 입은 나를 보고 하르텐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그 제안을 내쳤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띌 일은 안 돼.
황궁 시녀들은 더더욱.”
“흐음, 왜요?”
몰라서 물어?
차마 말로 내뱉을 수 없어 빤히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맞춰온다.
…진짜로 몰라서 묻는 거구나.
“나랑 엮여서 좋을 거 없어.
다른 귀족들에게 들켜봤자 사교계에 안 좋은 소문만 퍼질 뿐이야.”
“…그건 아가씨를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저를 위해서?”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둘 다겠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야 나보단 하르텐의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다.
이미 사교계의 평판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나와 사신단의 일원으로 로한 제국에 방문해 제 입지를 다져야 할 하르텐을 비교하자면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건 묻지 말고.
어쨌든 들켜서 좋을 거 없으니까, 먼저 나가면 내가 좀 더 있다가 갈게.”
“파티에서 눈이 맞은 남녀가 한 방에서 나왔다는데 좋지 않을 일이 있나요?
그저 재밌는 스캔들 하나를 던져줄 뿐이잖아요.”
내 마음을 돌리려는 듯 다정하게 속살거리는 목소리.
스캔들이라는 단어에 더 힘이 들어간 것 같다면 착각일까.
내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풀어내고 그를 소파에 앉혔다.
“이제 더 이상 접점을 만들어선 안 돼, 텐.
너는 사신단이고 엔데버의…, 황족이야.”
“…….”
금방이라도 반박할 것만 같던 하르텐은 말을 고르려는 듯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한 건 확실했다.
“그렇지만 저는 제 과거가 부끄럽지 않은걸요.
아가씨의 클로버로서 지냈던 시간은 제 인생에서 몇 없는…, 평화로운 시간이었어요.
저는 그 시간을 잊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내 말을 이해했다고 해서 그게 수긍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되레 내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거부했다.
“…그랬다고 해도, 그걸 밝히는 건 위험해.
소문이 퍼지면 분명 네 앞길을 막을 거야.”
“제 선택으로 인한 결과라면 그것 또한 제 몫이겠죠.
그렇지만 아가씨, 어떤 결과라도 저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몇 번이나 설득했지만 하르텐은 내 말을 들을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만류할수록 더 타오르는 것 같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그를 설득했다.
“…그러면 적어도 내 의사는 존중해 줘.
나는 너와 스캔들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를 위해서라는 말에는 요지부동이던 하르텐이 마지막 말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네.
부모님이 걱정하실 테니 이제 그만 갈게.”
“아가씨…….”
하르텐이 나를 불러 세웠지만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못을 박아두고 방을 떠났다.
“이제…, 사교계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지긋지긋해.”
“…….”
“…너도 알잖아.”
하르텐이라면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를 위한다는 이야기로 설득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 솔직한 심정이라도 밝히고 싶었다.
그를 걱정하는 것 다음으로 나를 겁나게 하는 건, 또다시 나를 찔러댈 그 시선들이 남길 흉터들일 테니까.
문밖을 나서 복도를 걷는 걸음이 무거웠다.
내 이기적인 말이 그를 상처 입혔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앗,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황궁의 마차 중 하나를 타고 집에 돌아오자 가넷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도록 돌아오지 않는 나를 걱정해 현관에 나와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가넷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복도를 걷는 내내 가넷은 내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에요.
아가씨가 처음으로 외박하고 온 기념적인 날인걸요!
아가씨가 즐겁게 보내셨다면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음.”
물을 가지러 간다던 가넷을 저택으로 돌려보낸 건 하르텐이었다.
가넷은 하르텐이 엔데버의 황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인지, 내가 그를 파티에 초대해 즐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난 2년간 내가 붙이지 못할 편지를 쓰던 모습을 보며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믿었으니 가능할 생각이었겠지.
“처음 봤을 땐, 텐이 아닌 줄 알았어요.
2년 만에 그렇게…, 변했을 줄이야.”
말 사이의 공백에서 수많은 수식어가 스쳐 지나갔다.
…맞는 말이야.
난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수긍했다.
내가 보기에도 2년 만의 그는 지나치게 유혹적인 포식자가 되어있었다.
조금만 더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간 그대로 잡아먹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진심을 담아 스쳐 지나갔을 만큼.
“…그러게.”
“파티는 즐거우셨나요?”
“...
파티…, 어젯밤 사이에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잠시 돌아봤다.
하르텐을 만나고, 술에 취해 기억에도 남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내 웃는 얼굴로 긍정했다.
…응, 즐거웠어.
* * *
“오늘은 직접 방문하시는 날이죠?”
“응.
상단에 미리 연락 넣어놨지?”
“네, 물론이에요.”
아침부터 집무실이 바빴다.
집사와 가넷, 시녀장이 번갈아 방문하며 이런저런 서류를 책상 위에 쌓아 올렸다.
늘 일정한 텀을 두고 올라오던 서류들이었으나 오늘은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이다.
한 달에 한 번, 고아원에 방문하기로 정해져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후부터 고아원에 방문해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 이날만큼은 오전에 대부분의 업무를 당겨서 처리하고 있었다.
“우선 저택에서 30인분의 음식을 준비했고, 짐마차로 옮길 예정이에요.”
“가는 동안 상하지 않도록 잘 포장해 줘.”
“네, 제가 출발하기 전, 도착한 직후에 한 번씩 더 확인하도록 할게요!”
처리가 끝난 서류들을 아버지의 집무실에 올리러 가넷이 자리를 비우자 상단에서 보내온 물품 목록을 찾으러 간 집사가 교대로 문을 두드렸다.
나는 손으로 굴리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고 그를 들였다.
“아가씨, 말씀하신 목록표를 찾아왔습니다.”
“이쪽으로 줘.”
집사가 내민 목록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내가 요청했던 물품들에 몇 가지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3번과 7번, 29번은 내가 요청한 게 아닌데.
누가 추가로 요청했어?”
“이번 목록표는 아가씨의 의견과 레일라 씨의 의견으로만 구성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마 고아원 측에서 요청한 물품인 것 같습니다.”
“좋아.
이대로 확인서를 발급해서 상단에 보내.
물품 도착 예정 시각은?”
“오후 3시입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집사를 내보냈다.
시계로 시선을 돌리니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서류를 처리한 덕분에 오늘 분량은 곧 끝날 예정이었다.
나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런 날이면 집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기도 분명 좋을 것이다.
음식을 준비해서 갈 테니 다 함께 소풍을 가도 좋겠지.
나는 의자 옆의 종을 울려 가넷을 불렀다.
“네, 아가씨!”
“가넷, 고아원 측에 소풍은 어떠냐고 묻고, 티타임용 다과를 준비해 줘.”
“네, 알겠습니다.”
서류 지옥에서 벗어나 마차에 올라타니 낯선 여유가 나를 반겼다.
언제나 서류에 파묻혀 일을 하는 게 몸에 배어있다 보니 고아원으로 나들이를 가는 날은 내게 몇 없는 여가 시간과도 같았다.
이마저도 시간이 잘 나지 않아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가지만.
시장에서 길이 막힐까 조금 더 먼 외곽의 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풀 내음 가득한 풍경과 더불어 익숙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뿐인 풍경을 만끽하려 마차 창문을 열고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예전이었다면 위험하다고 말렸을 가넷이지만 내가 서류 사이에 갇혀 시체가 되어가는 게 불쌍해 보였던지 내 소소한 일탈을 막지 않았다.
“아가씨, 벨라 아주머니가 소풍으로 라타판산에 오르는 건 어떠시냐고 물어오셨어요.”
“라타판산을?
아이들이 오를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산은 놀이터인걸요.
구두를 신고 오신 아가씨가 더 힘드실 거예요.”
나는 아차 하며 내 발을 내려다봤다.
평소 내 차림에 관심이 없다 보니 늘 입던 단출한 원피스에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은 채였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귀족 영애치고는 많이 수수한 차림이지만 산을 오르기 좋은 복장은 아니다.
“그렇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래서 제가 굽 없는 신발을 하나 더 챙겨왔답니다!”
해맑게 웃는 가넷의 얼굴은 그늘 한 점 없이 신나 보이기만 했다.
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신나 보인다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어?”
“으으음, 물론 이것도 있지만, 오랜만에 고아원에 가는 거라 신나는 게 더 큰 것 같아요!”
단 거, 예쁜 거, 귀여운 거에는 사족을 못 쓰는 가넷이 행복한 얼굴로 상상에 빠졌다.
고아원을 설립하고 그 틀을 세운 것은 나지만, 고아원의 운영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가넷이었다.
유모에게 이것저것을 배워 매주 고아원을 도우러 나섰고, 집을 잃은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 역시 시장의 뒷길에 바삭한 가넷의 도움이 컸다.
내가 재력으로 고아원을 일으켰다면 가넷은 시간과 헌신을 들여 고아원을 세운 셈이다.
그 덕분인지 고아원의 아이들 대부분이 가넷의 말을 잘 따랐다.
“저번 주 주말에도 보러 다녀왔으면서, 그렇게 좋아?”
“그야, 아이들이 너무 귀여운걸요.
정말, 어떻게 그렇게 귀여운 걸까요…….”
한창 시작되려는 가넷의 넋두리를 끊은 것은 도착했다는 마부의 외침과 함께 멈춰 선 마차였다.
가넷은 방금까지의 제 상태도 잊은 채 아이들에게 줄 물건부터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가넷이 마차 내부의 짐을 정리하는 사이 바깥에서부터 마차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를 에스코트하려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
“케를란 경.”
“오랜만입니다, 나이트 영애.”
깍듯이 인사하는 그는 록사나의 오라비이자 황실 기사단의 단장 벨로프 케를란이었다.
의외로 소탈한 성격을 가진 벨로프 덕에 첫 만남에서부터 말을 트기 시작했더니 나와 그의 방문 시기가 겹치면 늘 에스코트를 하러 마중을 나오곤 했다.
“마지막 방문이 2주 전이라고 들어서 오늘은 다른 분이 계실 줄 알았어요.”
“그럴 예정이었습니다만, 다른 기사들의 훈련 시간이 맞지 않아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마나를 가진 아이들을 모아 고아원을 짓겠다는 서류를 제출했을 때 나는 내심 자신하고 있었다.
고아원을 세우게 된 동기부터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의 교육, 그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줄 자금력까지, 나보다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의 계획이 어그러질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었다.
나는 인간의 불신이 오랜 기간 쌓여 공포심에 가까운 감정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마법사들이 배척받기 시작한 것은 역사로 따지자면 고작 2세기 전부터이다.
그러나 그때의 일은 아직도 복구할 수 없는 많은 피해를 남겼다.
그 피해를 수복하며 커온 제국인들에게 마나를 가진 아이들이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이었을 뿐.
내가 처음으로 제출했던 서류는 불허 도장이 찍힌 채 내 손으로 돌아왔다.
나는 나의 실수를 인정했다.
나 역시 제국인들 중 한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마법사들 모두가 위험하지 않음을 알고 있대도 반대의 경우를 무시해선 안 됐다.
그래서 다음으로 제출하는 서류에는 고아원에서는 아이들에게 마법을 절대 가르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황실 마법사들이 원할 경우 고아원의 아이들을 제자로 보내겠다는 내용까지 추가했다.
물론 싫다고 하는 아이에게는 강제할 수 없도록 못 박았지만, 매년 줄어드는 황실 마법사의 수를 보면 꽤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했다.
평민이지만 몇 년간의 교육을 받은 채로 황궁에 입궐하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테니.
그러나 그것으로도 조금 부족했던 건지 황실은 한 가지 조건을 더 내걸었다.
3일에 한 번씩 황실 기사단이 고아원에 들르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굳이 이야길 하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마법을 배우진 않는지 감시차 오는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일평생 검에만 매진하며 살아온 사람들과 길거리를 전전하며 생존 본능을 갈고닦아야 했던 두 부류의 인간들은 무척 경계하는 분위기로 섞이지 못하고 단절된 채 지냈다.
어느 쪽도 서로를 믿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무시한 채 살아갈 것 같았던 그들은 의외의 사건으로 인해 화합했다.
아이들이 낯설어했던 것은 기사단뿐만이 아니었다.
클로버의 신분에서 벗어난 고아원의 고용인들 역시 아이들에겐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가넷이 계획한 소풍은 모두가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기죽은 채로 구석에 굳어있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지내려면 지금보다 친밀한 감정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만 아이들은 소풍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 소풍에서 처음으로 논다는 개념을 배운 아이들은 그들을 지켜보던 고아원의 고용인들뿐만 아니라 황실 기사단의 딱딱한 얼굴에서마저 웃음을 끌어낼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그 뒤로 고아원에 방문하는 기사들은 매번 바뀌었으나 처음의 경계심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군요.
오늘 소풍을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멀리 나가십니까?”
“아뇨, 뒷산에 오르려고 해요.
가문의 기사들도 함께 움직일 테니 쉬고 계셔도 돼요.”
그러나 벨로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포장해 온 음식들을 옮기는 인원들을 돕기 시작했다.
기사단장쯤이면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한대도 납득할 만한 지위인데, 단 한 번도 요령을 피우지 않는 게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내심 감탄하는 마음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언니, 로 언니!”
“어머, 베로.
언제 내려왔어?”
“엄마가 언니 온다고 했어요.
궁금해서 내려와 봤어요!”
짓궂게 웃는 얼굴이 마냥 해맑기만 하다.
나는 손을 뻗어 베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따라 절로 미소가 입가를 맴돈다.
“소풍 갈 준비는 됐어?”
“네!
얼마 전에 기사님들이 사다 주신 신발을 신었어요.
산에서도 엄청 편해요!”
베로는 자랑하지 않곤 못 배기겠는지 발을 내보였다.
나는 놀란 얼굴로 박수를 쳐주며 베로의 신발을 칭찬했다.
배시시 웃는 베로의 얼굴 뒤로 뿌듯한 미소를 짓는 벨로프 경이 있었다.
가끔 기사들이 먹거리들을 챙겨와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곤 했었는데 이제는 신발로 발전한 모양이었다.
“…경들께 부담이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에요.”
베로가 다른 친구들을 불러 모으러 간 사이 벨로프 경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먹거리들은 다 같이 나눠 먹을 테니 부담이 덜해 괜찮았지만, 아이들의 신발은 한두 푼이 아니었을 터다.
“모든 기사들이 마음을 모았던 일입니다.
단 한 명의 반대도 나오지 않았지요.
다들 정이 많이 든 모양입니다.”
“아이들도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와서 훈련도 안 하고 쉬고 먹기만 하다가 가지 않습니까.”
늘 훈련으로 기사들을 굴린다던 벨로프 경이 상쾌한 얼굴로 말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이 한 줄로 서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좇는다.
“나름대로 보답하고자 생각해 낸 선물이었습니다.
…손재주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직접 만들어 전해줄 생각이었습니다만.”
나는 덩치에 비해 과하게 조그만 바늘을 든 채 쩔쩔맬 얼굴들을 떠올리고 짧게 웃었다.
진심이라고 호소하는 얼굴을 보아하니 다시 돌려준대도 받지 않을 성싶었다.
게다가 소풍이라는 얘기에 새로운 신발을 신고 나온 아이들의 모습은 더더욱 내 말을 막았다.
나는 그저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아이들의 뒤를 따라 산으로 향했다.
저택에 돌아왔을 땐 늦은 밤이었다.
소풍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저녁까지 먹고 출발하니 그 정도 시간이 되어서야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응, 그래.”
어째서인지 하녀 둘이 나를 마중 나온 모양새로 현관에 서있었다.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가씨께 급히 도착한 편지가 있습니다.”
“황실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하녀 하나가 내 겉옷을 들어주는 사이 다른 하녀가 예의 그 휘황찬란한 봉투를 내밀었다.
황실 연회 초대장과 똑같은 봉투였다.
나는 과연 황실은 이 봉투를 얼마나 쌓아두고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편지를 집어 들었다.
“방에 가서 열어보고 답할게.
돌아가 봐도 좋아.”
제 할 일을 마친 하녀들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황실이라는 단어가 들릴 때부터 반짝거리는 눈을 숨길 생각을 않던 가넷이 노골적인 기대가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무슨 편지일까요?
혹시 황후 폐하의 티 파티 초대……?”
“거긴 내가 함부로 낄 자리가 아니야.
사교계를 주름잡는 귀부인들이 가는 곳이지.”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는 가넷을 흘기며 실링을 갈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내게 왜 이런 편지가 왔나 내심 걱정스러웠다.
좋은 일이 있을 리는 없으니 최대한 덜 안 좋은 일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러나 편지의 첫 문장을 읽은 순간 나는 곧바로 가넷을 내보내고 말았다.
가넷이 조금 칭얼거리기는 했으나 나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물론 미안한 마음에 가넷이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 한 조각을 약속하긴 했지만.
가넷을 보낸 뒤 다시 펼친 편지는 ‘아가씨께’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었다.
가넷에게 하르텐의 존재에 대해서 들키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쳐도, 황실의 봉투를 써서 보낸 편지가 하르텐의 편지인 것을 들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나는 들을 이 없는 깊은 한숨을 쉬며 편지를 읽어 내렸다.
황금빛 봉투를 만지작거리는 손에 상념이 묻어났다.
답장을 바란다는 마지막 문구가 눈에 걸려 책상에 앉은 채로 편지를 끄적인 지 한 시간이 지났다.
“…후우.”
황궁에서 내보내는 편지와는 다르게, 황궁에 들어가는 편지는 대부분 해당 궁의 시종장들이 먼저 확인한다.
편지에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보내는 편지 역시도 시종장의 손을 한번 거친 뒤 하르텐에게 전해질 것이다.
아무리 돌려 말하려 해도 편지를 읽는 시종장의 눈을 피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시간이 걸리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타국의 황자 전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