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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백일홍 (3)
기한을 내일로 늘린 입궁 허가서를 받아 들고 마차에 올랐다.
까다로운 카네르바 그레이를 설득할 일이 막막해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서류를 검토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고민거리가 생긴 탓에 서류는 뒷전이었다.
자꾸만 애처롭게 웃던 하르텐의 얼굴이 기억에서 떠나질 않았다.
기억 속의 그는 언제나 차가운 얼굴을 하거나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와 제일 많이 붙어있어서인지 나를 볼 때면 조금 유한 얼굴이 되곤 했지만, 오늘처럼 상처받은 듯이 웃는 얼굴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내 말이 그를 상처 입혔다.
하르텐을 위해서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를 떠올릴 때마다 되살아나는 죄책감이 내게 남은 일말의 양심을 찔러댔다.
쓴웃음이 내려앉은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돌덩이를 얹은 듯 마음이 무거웠다.
그의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어서 나는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로지, 오늘은 일찍 자렴.”
“아…, 서류가 완성되면 바로 잘 거예요.”
“그래, 오늘은 나한테 전할 말이 없니?”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편지는 카네르바 그레이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던 계약서 봉투에 들어있었다.
그러나 계약서를 꺼낼 틈도 없이 협상 단계에서 이야기가 틀어졌다.
게다가 하르텐과 이야기를 나눌 땐 그 표정에 온 신경을 빼앗겼던 터라 편지의 존재 자체를 까먹어 버렸고.
집에 돌아온 후에야 편지를 알아채고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지만 이미 황궁을 나온 뒤라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일 또 카네르바 그레이를 만나러 갈 테니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
“그래, 그럼 먼저 들어가 보마.”
“안녕히 주무세요.”
먼저 식사를 마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리를 비우자 나는 홀로 식당에 남았다.
입맛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가씨, 마님께서 오늘도 일찍 주무시지 않으면 직접 재우러 오겠다고 하셨어요.”
“나도 알아.
어제도 말씀하셨거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하면서도 밤늦게까지 서류를 붙들고 있는 나를 보고 흘린 말을 잊지 ...
“‘내 손으로 눈을 감겨주기 전에 자는 게 어떻겠니.’라고 하셨었지, 정확히는.”
“어머, 맞아요, 아가씨!”
가넷의 해맑은 얼굴을 보고 있으니 미미하게 피어올랐던 불만도 푸시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카네르바 그레이를 설득할만한 새로운 조건을 찾으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건만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날 재우지 못해 안달이다.
“지금이 제일 바쁜 시기인데 말이야.”
“아가씨의 수면 시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걱정이라고요.”
가넷이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내 걱정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웃으며 가넷을 돌아봤다.
“그러는 가넷도 나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잖아.”
“어머, 아가씨께서 주무시질 않는데 제가 어떻게 자러 갈 수 있겠어요?
아가씨는 분명 ‘아, 귀찮아.’라고 하시면서 드레스 차림으로 주무실 텐데!”
나를 너무 잘 아는 가넷이라 이런 말싸움은 늘 내 패배로 끝이 나곤 했다.
이런 건 잘 알면서 왜 귀찮음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야?
나는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가넷이 재빨리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가씨, 오늘은 꼭 12시에 주무셔야 해요!
자기 전에 피부 관리를 위해 팩도 받으시고요.”
“그거 할 시간에 서류를 좀 더 보는 게 이득이지 않을까?”
“마님 모셔올까요?”
…자면 되잖아, 자면.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 나는 죽은 듯이 의자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제보다 더 시달린 몸이 온갖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 하며 유예를 벌었던 어제와 달리 오늘의 가넷은 나를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궁을 오가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다 보니 입궁할 때마다 온갖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된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소문이 생성되기도 하고.
그렇기에 사교계와 담을 쌓고 살아온 나마저도 입궁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괜찮은 척, 고고한 척을 하는 건가?
…어찌 됐든 내가 죽어난다는 결론은 똑같으니 상관없지만.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시녀가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도로테아궁의 상주 시녀 중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오늘도 나온 것을 보니 중앙궁에서 사신단을 위해 추가로 파견한 개인 시녀들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카네르바 그레이가 왜 시녀를 배정받았지?
일반적으로 남자 귀족은 시종을 붙여주지 않나?
생각해 보니 의아한 일이라 시녀에게 소속을 물을 생각이었는데 시녀의 너머로 보이는 인영을 보고 놀라 질문하려던 입이 도로 닫히고 말았다.
깜빡임조차 없는 시선이 올곧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내가 당황하는 것을 봤을 텐데도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실바니아궁을 지난 뒤라 지나다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시녀는 황궁의 법도대로 나와 그가 마주할 수 있도록 옆으로 물러섰다.
내가 먼저 인사하기를 기다리는 시녀의 시선이 느껴지자 비로소 내 표정이 퍽 우스꽝스러울 거라는 자각이 들었다.
뒤늦게 돌아온 이성이 황궁의 인사에게 이런 틈을 보여선 안 된다며 호통쳤다.
나는 먼저 한 발을 내딛으며 다가오는 이를 향해 인사했다.
“엔데버의 별을 뵙습니다.
나이트가의 로즈 나이트가 인사드립니다.”
금방이라도 하르텐이 ‘아가씨’
하며 부를 것만 같아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만약 그렇게 부르면 옆의 시녀는 어떻게 해야 하지?
뒷수습은 어떻게 해야…….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애.”
그러나 나의 예상과 다르게 하르텐은 비교적 평범한 말로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옆의 시녀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한껏 긴장한 그대로 고개를 드는 나를 보며 살짝 웃은 그가 옆에 서있던 시녀에게 고급스러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 눈치를 보는 시녀를 중앙궁으로 심부름 보낸 그가 나를 돌아봤다.
사신단으로서 제국에 왔다곤 하나, 그의 신분은 엄연히 타 제국의 황자.
시녀는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저에게 먼저 명령을 내렸던 이는 엔데버의 귀족이지 않았는가.
시녀로선 내 눈치가 좀 보였겠지만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노렸던 게 분명한 하르텐은 금세 미소 짓는 얼굴로 내 앞에 마주 섰다.
“아가씨.”
안 된다고 밀어낸 게 분명 어제였다.
그럴 수 없다, 고 대답하던 상처받은 얼굴 역시 어제의 일이건만 하르텐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는 얼굴로 다시 내 앞에 서있었다.
“너는…, 나한테 그런 소리를 듣고도 날 볼 생각이 들어?”
“…….”
상처 입은 듯이 애처로운 얼굴을 하면서도 웃기만 하는 그 얼굴이 어젯밤 내내 나를 괴롭혔다.
과거의 그 짧은 시간이 뭐라고, 황자라는 신분을 가졌으면서 나에게 매번 꼬박꼬박 붙이는 아가씨라는 호칭도, 나를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 표정도, 하나같이 내 양심을 쿡쿡 찔러댔다.
“왜 나를 싫어하지 않아?”
그렇게나 상처 입혔는데, 단 한 번도 그의 진심을 들어준 적이 없다.
알고 있어도, 눈치챘어도 애써 부정하고 눈을 돌려 모르는 척했을 뿐.
그럼에도 끝까지 내 손을 잡아오는 하르텐이 겁났다.
이러다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힐까 봐.
그래서…….
“제가 아가씨를 싫어하길 바라세요?”
“…….”
“…저는 괜찮아요.”
아무런 사족도 덧붙이지 않은 채로, 하르텐은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저가 상처 입어도 괜찮다는 건지, 어제의 일이 괜찮다는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지만, 눈을 맞추며 나직하게 속삭이는 괜찮다는 말은 어제의 죄책감으로 울컥했던 나를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나를 몰아넣었던 감정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끌어올렸다.
그래, 내가 흥분할 일이 아니었는데, 고민이 길어 답지 않게 예민했나 보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하르텐에게 더없이 미안해졌다.
어제부터 내내 나에게 시달리고만 있으면서, 그럼에도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그렇게 무른 이유를 알 것만 같아서, 더더욱 미안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으니 걱정 마세요.
다른 이들이 왔으면 제가 알려드렸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아?”
“짧은 기간 동안 검이나 마법을 완벽하게 익히는 건 어려웠지만, 기를 읽는 법은 제대로 배웠거든요.
위험을 감지하게 되면 틈을 찾기도 쉬우니까요.”
미안해하는 나에게 그는 왜 그런 걸로 미안해하냐며 도리어 물었다.
게다가 그 뒤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위해서인지, 전혀 다른 주제를 꺼내며 대화를 유도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제 위험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한 하르텐은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나를 에스코트했다.
나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순순히 그에게 손을 얹었다.
“제가 주변을 살필 수 있으니 얼마든지 평소처럼 불러주세요.”
“…….”
“어젯밤 내내 고민한 결과예요.
…정말로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해드릴지 계속 고민했거든요.”
“…남들 앞에서 모르는 척해주는 거?”
“네.”
“그래서 그렇게 해주는 거야?”
흠, 하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하르텐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들 앞이라기보단…, 아가씨를 해칠 수 있는 사람들 앞?”
“응?
왜 하필?”
“그건…, 차차 알려드릴게요.
일단은 오늘 예외가 한 명 있거든요.”
하르텐은 의뭉스럽게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은근슬쩍 내 신경을 다른 곳으로 빼앗아 갔다.
에스코트를 위해 올린 손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짓이 손등으로 느껴졌다.
“텐.”
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아 그를 부르자 조금 아쉬운 얼굴을 한 하르텐이 미련이 남은 듯이 손가락 사이를 한 번 문지르고 손을 뗐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하르텐은 손을 좋아하는 것 같다.
평소는 물론이고 침대에서도 손만 보면 만지지 못해 안달 난 듯이 굴곤 했다.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그랬다.
파티 홀의 휴게실에서 밤을 보냈을 때, 잠깐 틈이 날 때마다 예민한 곳을 골라 문지르는 건 애교였고, 심하면 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로…….
“도착했습니다.”
“흡……!”
나는 갑작스레 들린 하르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가득했던 살색 찬란한 상상을 들키기라도 한 듯이.
나의 동요를 눈치챈 하르텐이 의아해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 손을 파닥거렸다.
“들, 들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여기까지 데려와 준 하르텐에게는 고마웠지만, 분명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보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인사했다.
그러나 그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같이 들어가죠.”
“…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당황한 내가 뭐라 더 묻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카네르바 그레이가 우리를 맞이했다.
“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
어제와는 전혀 딴판인 태도에 당황한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있는 사이 하르텐이 부드럽게 나를 이끌었다.
“앉으세요, 아가씨.”
“……!”
깜짝 놀란 내가 곧바로 카네르바 그레이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오히려 하르텐의 눈치를 살피느라 방금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듯한 태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자세히 살펴보니 카네르바 그레이의 얼굴이 탈색이라도 한 듯 하얗게 질려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네……?”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하르텐의 눈치만 살피던 카네르바 그레이는 하르텐이 짧게 헛기침을 하자마자 곧바로 내게 사과했다.
…아니, 정정한다.
이건 사과가 아니라 사죄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내게 무슨 잘못을 한 건진 모르겠다만, 테이블을 부여잡은 채로 필사적으로 사과하는 카네르바 그레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없던 안쓰러움이 생길 지경이었다.
“…누가 경에게 아가씨라는 호칭을 허락했지?”
맥락으로만 따져보면 내가 한 말 같지만, 놀랍게도 나는 아직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저 말은 내 뒤에서 자리를 지키던 하르텐이 으르렁거리며 한 말이었다.
아직도 겁먹어 있는 카네르바 그레이를 위협하듯 목소리가 한층 낮아진 채였다.
“죄송합니다, 영애!
제, 제 사과를 받아주십시오!
저는, 그, 서류에 문제가 없었지만, 착각을 해서…….”
“서류?
착각이요?”
이젠 좀 아는 단어가 나온 것 같다.
그와 내가 나눌 서류 이야기라면 어제 보여준 협상 제안서밖에 없다.
비록 계약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설명했던 그 종이 쪼가리.
“제가, 착각을 해서 영애를 곤란하…,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뭘 어떻게 착각하셨는데요?”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착각에 하르텐이 관련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르텐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모르던 카네르바 그레이는 곧 체념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하르텐이 내 얘기만 나오면 얼굴을 찌푸려서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네, 네.”
“근데 어제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요?”
“네, 정원에서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시는 걸 봤습니다.”
나는 하르텐을 돌아봤다.
왜 내 얘기에 그렇게 반응했냐는 물음이 목 끝까지 치민 탓이었다.
그러나 예민할 수 있는 문제라 대놓고 물어볼 수 없어서 찝찝한 얼굴로 다시 카네르바 그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뭐 사람이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는 거겠지.
“…헉!
여, 영애, 제 뒤의 그림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
딱히 볼 게 없는 그림인데요?”
그냥 빈자리를 채워 넣기 위해 구입한 것 같은 그림이었다.
못난 부분은 없지만 특출한 부분도 없는, 평범한 풍경화 한 점일 뿐이었다.
카네르바 그레이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제 목숨이 줄어드는 소리가 들립니다만…….
“아무튼 그래서,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알게 돼서 사과하는 거라고요?”
“…사실 어제 가져오신 서류는…, 누구라도 탐낼 만한 조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애와 계약을 맺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단호하게 잘라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짧게 웃었다.
이게 뭐야.
아까운 내 시간 돌려줘.
카네르바 그레이를 설득하기 위해 나를 갈아 넣은 서류를 집어 던지고 싶어졌다.
그토록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상황이 꽤 마음에 들기도 했다.
카네르바 그레이가 이토록 내게 쩔쩔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하르텐을 한번 돌아봤다.
아까부터 앉으라는 우리의 권유에도 그 자리에서 꼼짝 않던 하르텐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로 옆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와 하르텐 모두 한 톨만큼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마주한 시선에서 ‘저 잘했죠?’
하는 하르텐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다고 한다면 착각일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핏 웃었다.
그가 말한 ‘나를 해칠 수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더불어 나를 배려해 주는 하르텐의 마음까지도.
“이제 다시 상단 얘기로 넘어가 보죠.
일단 제가 오늘 가져온 새로운 조건도 확인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일 얘기가 나오자 방금까지 어쩔 줄 모르던 카네르바 그레이가 자세를 바로 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겠다는 듯 굴고 있지만 어제를 생각해 보면 새삼스러운 분별력이다.
나는 웃음을 참고 서류를 넘겼다.
“텐, 너도 볼래?”
“저는 괜찮아요.”
그래, 알겠어.
담백한 대화를 끝내고 정신없이 서류를 읽어 내리는 카네르바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데 하르텐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만히 머물던 손은 장난치듯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거나 잡았다 놓는 등의 짧은 스킨십을 하는가 싶더니 점점 미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방금 전의 포근한 분위기에 달고 진득한 잼 한 통을 부어 넣은 것처럼.
그러나 나는 슬그머니 닿았다가 떨어지는 온기가 싫지 않아 그를 밀어내지 않았고 점점 더 범위를 넓히기 시작하는 손짓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손가락은 어느새 목덜미를 느릿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탓에 훤히 드러나 있던 목덜미에 내리꽂히는 시선이 따갑다.
그를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나는 조금 긴장한 듯 땀이 배어나는 손을 말아 쥐고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내 몸에 닿아있는 손가락의 생김새가 머릿속에 선명하다.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은 물론이거니와 군데군데 박인 굳은살까지도.
내가 그 손을 볼 수 있는 때는 많지 않았다.
정확히는, 침대 위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영애.”
“…네?”
서류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집중하고 있던 카네르바 그레이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내가 흠칫 놀란 것과 달리 목덜미에 닿아있는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계약하겠습니다.”
“아… 벌써요?
아직 설명 못 드린 부분이 많은데…….”
“서류로 충분합니다.
필요한 정보는 다 있었습니다.”
어제도 느꼈지만, 서류를 읽는 속도가 장난 아니다.
몇 분이나 됐다고 12장짜리 서류를 다 읽은 거야?
“어제와 오늘, 어느 쪽 제안이 더 마음에 드셨나요?”
“양쪽의 목표가 다르다 보니 어느 한쪽이 낫다 이야기하기 어렵군요.
좋은 전략이었습니다.
아예 다른 주제를 꺼내 어제와 비교가 어렵게 하는 것, 단순한 것 같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진심으로 칭찬하는 태도에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걸 생각해 내느라 쓴 시간은 좀 아쉽지만 내 노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으니 보람차기도 했다.
나는 자신 있는 얼굴로 계약서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희 쪽에서 지원할 자본은 한정적이에요.
달리 말하자면,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다는 거죠.
제안은 우리가 했으니 선택은 그레이 경에게 맡기겠어요.”
“어려운 선택지로군요.
효율을 따지자면 단연 어제의 계약서를 선택하겠지만, 오늘의 계약서는… 분명 더 큰 수익을 가져다줄 겁니다.”
양쪽을 선택하지 못해 아쉬운 듯한 얼굴로 카네르바 그레이가 계약서를 꺼냈다.
미리 준비해 둔 두 장의 계약서 사이에서 연보랏빛의 봉투가 툭, 떨어졌다.
“무슨 편지 봉투가…….”
“아, 맞다.”
또 까먹고 있었네.
나는 웃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이건 제가 다시 가져갈게요.
계약서와는 상관없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계약서는 제가 가지고 있어도 됩니까?”
“아직 우리 상단의 도장을 찍지 않았으니 정하고 나서 인을 찍고 보내주세요.”
“네, 좋습니다!”
슬슬 이야기가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자 여태껏 묵묵히 옆을 지키던 하르텐이 나섰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좋아.
마침 할 말이 있었거든.”
우리 두 사람은 카네르바 그레이의 인사를 받으며 도로테아궁을 나섰다.
할 이야기가 있어 그를 이끌고 나오긴 했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실바니아궁 근처까지 동행을 하는 것은 위험한 것 같아 도로테아궁과 실바니아궁 사이의 정원에 발을 들였다.
“아가씨.”
의외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하르텐이었다.
나는 카네르바 그레이에게서 돌려받은 편지를 꺼내다 말고 하르텐을 올려다봤다.
“앞으로 예정된 일이 있으신가요?”
“예정된 일?
오늘을 말하는 거야?”
“그것까지 포함해서…, 앞으로 일주일 동안의 일정이 궁금합니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내일부터는 사신단을 위한 사교 행사들이 몰려있다.
황실 연회 이후 사신단이 여독을 풀 동안 준비한 파티들이었다.
내일은 테라엔 백작가, 모레는 케를란 공작가…, 매일매일이 연회의 연속이었다.
나는 어제 참석 확정 편지를 보낸 두 가문을 떠올렸다.
“모레에 예정된 케를란 공작가의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야.
그리고 엿새 뒤에는 메리안 백작가의 연회에 참석할 거고.
그거 말고는 아직 없어.”
연회라면 질색이지만 록사나와 로위나 영애의 초대라 참석하기로 했다.
황실 연회에서처럼 셋이서 모여있으면 시선도 훨씬 덜 모여서 그나마 편하기도 하고.
“마침 잘됐네요.”
“……?”
“저도 그 두 가문의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거든요.”
사신단을 환영하는 의미로 펼치는 사교 행사들이긴 하지만, 사신단이 필수로 참석해야 하는 행사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신단은 공작가의 파티쯤 되어야만 몸을 움직이곤 했다.
그러니 케를란 공작가의 연회에서 하르텐을 마주칠 거란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리안 백작가의 파티도 참석한다고?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
그렇구나.”
뭔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찜찜함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능숙하게 내리눌렀다.
오늘의 나는 예민하다는 것을 아까 실감하지 않았던가.
분명 그 연장선이겠지.
“아가씨.”
“응?”
“…혹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부탁?
하르텐이 제 입으로 부탁이라 말한 것은 처음이라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를란 공작가의 연회에서 제 파트너가 되어주세요.”
“…뭐?”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나를 따라 걸음을 멈춘 하르텐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진심이냐고, 목 끝까지 차올랐던 질문을 꿀꺽 삼켰다.
단단하게 마주해 오는 눈만 봐도 그가 더없이 진심인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설득하기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연회는 당장 이틀 뒤다.
이미 파트너를 구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
물론 나는 록사나와 로위나 영애를 만나러 가는 거라 연회장에는 얼굴만 내비칠 생각으로 파트너를 구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선 이미 파트너를 구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그렇게 대답하면 된다.
오빠들 중 아무나 붙잡고 가면 되니까.
그렇게 하면 얼마든지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런 계산을 머릿속으로 끝냈음에도 나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정말 당연한 답인데.
오히려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게 더욱 이상해 보일 텐데, 그럼에도 그에게 거절의 말을 내뱉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것이 오늘 오전의 내 예민함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그를 위한 결정인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침묵하는 나를 하르텐이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반응 하나하나를 전부 다 새기려는 것처럼 단 한 번도 흐려지지 않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내 얼굴을 비추고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빛이 그의 금발을 타고 흘러 눈꺼풀에 걸렸다.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은 속눈썹이 실망의 감정을 담기 시작하는 눈동자와 함께 내리깔리기 시작할 때 나는 충동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좋아, 같이 가자.”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하고 말았으나, 그 직후 환희를 담고 휘어지는 눈동자가 다시금 빛 아래 드러났을 때는 그 후회마저 보잘것없어지고 말았다.
그 말을 취소할 유일한 용기마저 놓쳐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기쁜 듯 행복하게 웃는 얼굴에 대고 그 행복을 빼앗아 갈 의지가 내겐 없었으므로, 우리 두 사람이 그날 파트너로서 연회에 등장하게 되리란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 되었다.
* * *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강제로 몸을 일으켜야 했다.
아니, 이제 점심인 것을 보아하니 새벽쯤 일어났던 것 같기도 하다.
눈을 뜬 순간부터 내 의지로 움직인 적이 없다 보니 아는 게 없다는 말이 확실하겠지만.
원래부터 나를 치장시키는 데 의욕적인 가넷이지만 오랜만에 파트너와 동반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의욕이라는 단어로도 설명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록사나, 로위나 영애와 파티에 참석할 때는 편한 드레스만을 고집하니 ‘가넷이 선택한 회심의 역작!’
같은 드레스는 1차적으로 걸러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 굴할 가넷이 아니지만 오늘처럼 순순히 협조할 때와 비교하면 타협점을 찾느라 힘들 때가 많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언제쯤 끝나?”
“거의 다 끝났어요!”
평소라면 10분에 한 번씩 언제 끝나냐며 칭얼거렸을 내가 오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넷을 채근했다.
가넷은 행복한 얼굴로 화장하는 동안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어 주었다.
“가넷은 나를 꾸미는 게 왜 즐거운 거야?”
“음…, 글쎄요.
뿌듯함일까요?
아니면 자랑스러움일 수도 있겠네요!
우리 아가씨가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시다, 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모든 전속 시녀들의 공통점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10분마다 보채는 나를 달래가며 화장하고 머리하는 건 보통 인내심으로 못 할 일인데, 전속 시녀의 인내심이란 대단하네.
아니, 다른 영애들은 나만큼 보채지 않을 테니 가넷이 대단한 걸지도.
“다 되었어요, 아가씨!
마차를 준비시킬 테니 시간 맞춰 출발하시면 돼요.”
“응.
고마워, 가넷.
오늘도 수고했어.”
가넷은 뿌듯한 표정으로 헤헤 웃었다.
차 한잔하고 계시겠어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빈속으로 모든 치장을 받은 나를 걱정한 듯 가넷은 다과도 함께 챙겨왔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마카롱에 반색하며 다과 접시를 기쁘게 바라보았다.
“으음, 부채는 어떤 색이 어울리려나.
아가씨, 혹시 파트너분과 드레스 코드를 맞추셨나요?”
“음, 아니.
드레스 코드는 딱히?”
“그렇군요.
그럼 그분과 가장 연관 있는 색을 골라주세요.
부채는 그 색으로 맞춰야겠어요.”
나는 마카롱을 오물오물 씹다 말고 고민했다.
하르텐의 햇빛 닮은 금발을 떠올리자니 금색이 좋을 것 같고, 투명하게 빛나는 은안을 생각하니 은색도 괜찮을 것 같다.
둘 다 지금 입은 드레스에서 크게 벗어나는 색이 아니다 보니 결정이 쉽지 않았다.
“음…, 금색으로 해줘.”
“네, 알겠어요.”
내 고민을 끝으로 나는 연회에 갈 준비를 완벽히 마쳤다.
행복한 얼굴로 다과를 해치우는 내 옆에 부채가 든 조그만 손가방을 챙겨두던 가넷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아가씨.
“생각해 보니 아가씨의 파트너가 어떤 분인지 못 들은 것 같아요.
금색이 어울리는 분이라…, 누구실까요?”
나는 내심 뜨끔한 마음을 감추고 태연하게 웃었다.
오늘 참석하는 파티가 케를란 공작가에서 여는 연회라는 것을 아는 이상 하르텐의 이름을 꺼내기가 애매해 부러 말을 피했던 거였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르텐의 신분만 언급하기도 난감했다.
내 유일한 전속 시녀인 가넷마저 모르는 사이에 친분을 쌓은 타국의 황족이라니, …어떻게 해도 질문 공세를 피하기 힘든 조합인걸?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 연회장에 입장하고 나면 그 소식은 어떤 식으로든 가넷의 귀에 들릴 터다.
부모님마저도 나에 대한 일을 가넷에게 물어보시니 가넷에게 숨긴다는 말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파트너가 궁금해?”
“어떤 분이신지도 궁금하고…….
앗, 혹시 제가 아는 분인가요?”
알긴… 알지.
나는 대답 대신 슬쩍 시선을 흘려버렸다.
가넷은 열성적인 눈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엔데버의…….”
“어머, 사신단분들 중 한 분이셨군요!”
“황자 전하.”
“아하, 황자 전…….
네?
뭐라고요?”
꽥, 소리를 지른 가넷은 저도 당황한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럼에도 바삐 굴러가는 눈동자가 가넷의 당황을 여실히 드러냈다.
“화, 황…, 심지어 엔데버의……?”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내가 태평하게 웃으며 낙관적으로 말했지만, 가넷에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넷은 식겁한 얼굴로 ‘세상에, 어떡하죠?
지금이라도 화장을 다시 할까요?’
하며 호들갑 떨었다.
나는 더 식겁한 얼굴로 ‘날 죽일 셈이야?’
하고 응수했다.
“하, 하지만 화, 황자 전하가 파트너시라는데!
제가 너무…, 너무 신경을 못 써서…….”
라고, 장장 여덟 시간 동안 나를 데굴데굴 굴린 가넷이 말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고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을 현관으로 발을 내딛었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렀다간 가넷의 말대로 화장을 다시 해야 할지 모른다.
아니, 화장만 다시 하면 다행이게?
“분명 화장에 맞춰서 머리와 드레스도 바꾸자고 할 거야…….”
“네?
아가씨,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아무 말도.”
걸음을 재촉해서 도착한 현관에는 나이트가의 문장이 새겨진 새하얀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반색하며 마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마차에 오르고 싶었다.
“아가씨이…, 화장 수정은 정말 얼마 안 걸려요!
정말, 정말 잠깐이면 가능해요.”
“그렇겠지, 가넷.
너의 기준으론 머리를 다시 다듬고 드레스를 갈아입는 것도 얼마 안 걸리니까.”
칫, 가넷이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마차 문 너머의 가넷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밝게 웃어주며 인사했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아가씨.”
마차에서 내렸을 때는 조금 정신이 없었다.
케를란 공작가의 연회답게 적지 않은 귀족들이 참석한 탓이었다.
케를란 공작가는 평상시 초대하는 사람의 수도 매우 적고 초대한 이마저도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정해두었기 때문에 이런 시기가 아니면 여유롭게 구경할 수 없는 곳이다.
덕분에 이번 연회 소식이 들리자 중앙 귀족, 지방 귀족 할 것 없이 대부분의 귀족들이 케를란 공작가의 연회에 참석하고자 초대장을 구하기 바빴다.
그렇게 힘들게 초대장을 구해 온 귀족들 중에서는 내 또래로 보이는 영애들도 있었다.
두셋씩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록사나와 로위나 영애가 떠올랐다.
사교계와 담을 쌓던 내가 사귄 유일한 친구들.
로위나 영애와 록사나, 나까지 세 사람은 사교계에서 괴짜 취급을 받았다.
사교계의 목적이 정보 교류를 통한 귀부인들 간의 정치인데 우리 세 사람은 그런 정치판을 멀뚱멀뚱 구경하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주체적으로 나선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케를란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사교계보다는 귀족 회의가 더 익숙한 록사나라든가 젊은 나이에 아카데미의 조교수로 활동 중이라 사교계를 낯설어하는 로위나 영애의 특수한 이력 때문이긴 했지만,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완벽한 중립을 자처하는 우리를 대부분의 귀부인들이 이상하게 여기곤 했다.
이 연회의 주최자인 록사나는 아마 연회장에서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속으로는 귀찮아하면서도 겉으로는 절대 티를 내지 않을 그 모습이 예상되어서 입가에 은은히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로위나 영애 역시 나와 똑같은 감상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사실 우리 셋이 사교계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도 편 가르기 싸움이 얼마나 귀찮은 짓인지 잘 알기 때문에 도망쳐 나온 것이니까.
가넷을 떨쳐내느라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발했더니 연회장의 입구에 도착했을 땐 연회가 시작하고 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파트너인 하르텐을 두고 먼저 입장하기도 애매해서 나는 정원으로 발을 돌렸다.
연회를 위해 개방된 정원은 평소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색색의 불빛이 더해져 화려하게 탈바꿈해 있었다.
나는 늘 차를 마시던 정원의 테이블까지만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더 깊은 정원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정원에 발을 들인 지 정확히 5분이 되던 순간 왜 하필 골라도 정원을 골랐지, 하는 후회를 하고 말았다.
나무가 높게 자란 케를란가의 정원은 이른 시간부터 약속을 잡고 만나는 어린 연인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나무 뒤에 숨은 커플은 그나마 낫고 아예 벤치에 앉아 입술을 맞대는 커플을 봤을 때는 흠칫 놀라며 재빨리 그들을 지나쳐야만 했다.
정원의 초입을 넘어 더 들어온 뒤부터는 스킨십의 수위도 높아져 금방이라도 침대에 뛰어들 것 같은 커플도 두엇 지나쳐야 했다.
그때쯤에서야 왜 연회장으로 돌아가 하르텐을 기다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이만큼 들어온 이상 다시 그들을 지나칠 용기가 나지 않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우뚝 서고 말았다.
정원이 연인들의 밀회 장소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게 설마 연회 시작부터인 줄은 몰랐지!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아 생긴 실수였다.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나는 그래도 조금 더 가면 저택의 뒷문이 나올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정원 탐색을 이어가기로 했다.
“…를 했군요.
…아요.”
“선물로 보…, …리가 없…….”
20분쯤 걸었을까, 정원의 끝이 보이는 느낌이라 성큼성큼 걷고 있는데 정원에 놓인 나무 벤치에 앉아있는 한 쌍의 연인이 보였다.
그러나 이제 곧 정원을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솟아오른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마음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정확히는 지나치려 했다.
그쪽에서 나를 불러 세우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나이트 영애?”
나는 둘만의 세계를 구축 중이던 커플이 왜 날 불러 세우나 싶어 뒤돌아 봤다.
뒷문으로 향하는 길목을 눈앞에 두고 뒤돌아서야 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부름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커플을 확인하고 나서는 그냥 무시할걸, 싶긴 했지만.
“…퀴니 영애, 그리고…….”
헤일로 카르트였다.
싸하게 굳은 나와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은 데이지 퀴니, 그리고 무심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헤일로 카르트까지, 누군가 우리 셋을 봤다면 한동안 사교계를 시끄럽게 할 소문 하나가 탄생했을 텐데.
“정원 깊은 곳엔 무슨 일이시죠?
여긴 저희 두 사람밖에 없는데.”
그 찰나 데이지 퀴니가 스토커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훑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고 금세 생글생글 잘도 웃어댔지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던 그 꺼림칙함은 착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데이지 퀴니가 스토커냐 대놓고 물어봤더라도 나는 할 말이 딱히 없었다.
시간이 남아서 정원에 왔다.
커플들을 다시 지나칠 용기가 없어 뒷문으로 가기로 했다.
나는 그쪽들을 쫓아온 게 아니다.
…누가 봐도 설득력 없는 주장이었다.
마지막 문장은 도리어 내 무덤을 파는 것 같기도 하고.
“여기 사람이 있을 줄 몰랐어요.
실례했습니다.”
“실례라뇨?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저희에게 실례할 만한 일을 하셨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도대체 어떻게 꼬아 들으면 그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사교계 화법이라도 생긴 건가?
“게다가, 파트너분은 어디에 두고 정원을 홀로 걷고 계신가요?
파트너분께서 혹시…….
앗, 제가 너무 민감한 질문을 드렸나요?”
데이지 퀴니는 한 자락의 악의도 담기지 않은,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순간에는 도리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행세도 포함한 채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나에 대한 악의는 고사하고서라도 은근슬쩍 헤일로 카르트의 팔을 감싸 안으며 과시하는 듯한 행동마저도 이전과 다른 게 없었다.
그러나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이유 모를 적의도 아니고 헤일로 카르트를 제 손에서 굴리고 있다는 우월감도 아니었다.
나를 아직도 헤일로 카르트에게 매달리는 멍청한 여자로 보는 듯한 그 행동이 가장 모욕적이었다.
그 사실을 인식했을 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실감했을 정도로.
“음, 아무래도 제가 배려심이 부족했던 모양이에요…….”
열받은 내가 긍정도 부정도 보이지 않자 데이지가 은근히 한마디를 덧붙여 나를 ‘파트너 없이 연회에 참여한 영애’로 몰아넣었다.
하르텐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그 말이 사실이었을 테니 완전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나는 여태껏 황궁 연회를 포함한 사교계 활동 중에 제대로 된 파트너를 데리고 참석한 횟수가 손에 꼽혔다.
헤일로 카르트와 약혼하기 전까지는 가족들이 돌아가며 파트너를 했고 헤일로 카르트는 나와 파티에 잘 참석하지 않았으니 이제는 파트너와 함께 연회에 참석하는 게 더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파트너 없이 연회에 참석한 영애라는 타이틀은 불명예로 취급될 만한 게 아니었다.
이미 사교계의 괴짜로 묶여 불리는 신세인데 고작 그 정도쯤이야.
게다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괴짜들’도 파트너를 귀찮아하는걸.
그러니 내가 모욕감을 느끼길 바라며 저 말을 한 거라면 전혀 효과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소설 주인공이라 파트너 없이 연회에 참석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본데 나한텐 일상과도 같은 일이란다.
그걸 지금 트집이라고 잡고 있는 거냐, 비웃어 줄 용의도 충분했다.
오히려 나는 데이지 퀴니에게 역으로 물어보고 싶었다.
‘파트너 없이 연회에 참석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나요?’
민감한 질문이니, 배려심이니 나를 위하는 척하고 있지만 따져보자면 ‘파트너 없이 왔어?
어머, 세상에.’를 고급스럽게 돌려 말한 것과 다를 게 뭔가.
이제는 그 위선적인 태도가 같잖기만 했다.
그러나 나의 조그만 복수는 다른 이에 의해서 저지당했다.
뒷문을 등지고 있던 나의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먼저 선수 쳐버린 것이다.
“그런 것 같군, 영애.
내가 보기에도 퍽 배려심 없는 질문이었네.”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할 필요도 없는 말투였다.
공녀인 데이지 퀴니에게 서슴없이 하대할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중에서 나에게 이토록 친밀하게 접촉할 수 있는 이는 또 몇이나 되겠고.
어쩐지 애들 싸움에 엄마를 불러온 아이가 되어버린 느낌이지만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하르텐이 언젠가는 데이지 퀴니에게 빠져버린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는 내 편을 들어주고 있지 않은가.
물론 내 몫을 빼앗아 간 것은 조금 얄미웠지만.
“엔데버의 별을 뵙습니다.
나이트가의…….”
“인사는 생략해도 된다고 했잖은가, …로즈.”
다정하게 웃는 목소리와 달리 눈은 한 조각의 웃음기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손이 자꾸만 그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니 그에게 등을 기댄 듯한 묘한 자세가 되었다.
당황하던 데이지 퀴니가 금세 표정을 수습하곤 눈가를 휘어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엔데버의 별을 뵙습니다.
카르트가의 헤일로 카르트가 인사드립니다.”
“엔데버의 별을 뵙습니다.
퀴니가의 데이지 퀴니가 인사드립니다.”
“만나서 반갑네.”
‘로즈’라는 호칭부터 시작해서 너무 격이 없는 듯한 우리 둘의 모습까지, 이 뒷수습을 어찌할지 뒷골이 당기기 시작하는데 하르텐은 퍽 태연한 태도로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아니, 입꼬리를 끌어 올려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고 있었으니 태연하다는 말엔 어폐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실을 데이지 퀴니와 헤일로 카르트도 눈치챈 모양이고.
“오늘 연회에서 두 분은 파트너이신가요?”
“네, 맞아요.”
데이지 퀴니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힐긋 올려다본 하르텐이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은 표정이라 내가 대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스치듯 내게 시선을 준 데이지 퀴니는 이내 활짝 웃으며 제 파트너에게 팔짱을 끼웠다.
…왠지 나를 입 다물게 할 수단으로 헤일로 카르트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저 자신이 그런 데 이용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헤일로 카르트는 내내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다.
조금 흐려진 시선이 한 곳에 붙박혀 있었다.
집요한 구석이 있는 그 시선은 하르텐과 나를 미세하게 빗겨나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그 눈이 내 어깨 언저리에 닿아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르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던 데이지 퀴니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해졌다.
그녀까지 입을 다물자 그 누구도 대화를 이끌어 가지 않았다.
정원 깊숙한 곳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정적 속에서, 어깨를 감싸주던 손이 멀어졌다.
힘을 푼 것처럼 자연스럽게 떨어진 손은 내 손등을 한 번 툭, 건드리고 멀어졌다.
그저 우연히 부딪친 것처럼 약하게.
그러나 그 부딪침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을 때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르텐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즐겁지 않은 표정이었다.
조소하는 입매와 가늘어진 눈이 내 시선을 붙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내 생각을 꿰뚫어보는 듯, 내가 딴생각에 빠질 때마다 짓던 표정.
‘딴생각을 하고 계시네요.’
숨소리와 섞여 속살대는 목소리.
고개 돌리지 못하도록 속박하는 걸로 부족해 머릿속조차 욕심내던 하르텐이었다.
그럴 때면 어쩐지 그가 나를 한입에 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허황된 생각마저 들곤 했다.
이렇게 조각난 기억에서마저도 그는 내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가 기계적으로 미소를 띠웠다.
너무 보기 싫은 인간들이라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지고 싶었나 보다.
현실 도피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최소한의 예의만 차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슬슬 입장하는 게 좋겠네요.
이 이상 늦으면 케를란 공녀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요.”
“…그렇군.
그럼 먼저 실례하지.”
헤일로 카르트도 데이지 퀴니도 이제는 그다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는 어쭙잖은 복수심으로 그들 앞을 얼쩡거렸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다 귀찮기만 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아예 얼굴 마주 댈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
저들이 어떻게 살든, 내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까.
이때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나보다 반걸음 앞서있는 하르텐의 손을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닿아있는 손가락이 사이를 파고들더니 틈 없이 깍지를 꼈다.
마주 댄 손바닥이 간지러운 것도 같았으나 단단하게 감겨오는 느낌이 좋아서 나 역시도 그 손을 꽉 붙잡았다.
꽤 오랜 시간을 걸어 연회장 입구로 돌아왔으나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귀족들의 수가 너무 많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연회가 시작된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가건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마차의 행렬을 보아하니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이 더 지나야 입장이 가능할 모양새였다.
하르텐의 신분상 귀족들 틈바구니에 끼여 입장을 대기하고 있을 수 없어 연회를 위해 오픈된 방 하나를 먼저 잡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으니 나와 하르텐 사이의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신경 쓸 곳이 줄어든 나는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하르텐과 잡담을 나누었다.
“아가씨.”
“응.”
“예전에 저를 저택에 데려가셨을 때 기억나세요?”
나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없는 시간 동안 계속 되새겨 보던 기억이었다.
빛바랬을지언정 잊어버릴 수 없는 과거의 파편.
하르텐과의 만남은 내 첫 갈림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두 기억이 공존하기 시작하던 순간의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으므로.
첫 번째는 물론, 정해진 흐름을 바꾸지 않고 그에 휩쓸려 살아가는 것이었다.
제3자의 눈으로 지켜본 세계를 다시 한번 방관하며 살아가는 것.
가장 마지막 순간에 내 몸을 지킬 수단 하나만 남겨놓고 다른 어떤 상황에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첫 번째 선택지였다.
그러나 나는 변하고 싶었다.
운명이라는 이유로 정당성을 주장하며 나를 상처 입힌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 운명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막막했던 그때 하르텐의 변화는 내 유일한 희망이었고 위안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데이지 퀴니에게 구해져 그녀를 사랑할 운명이었던 하르텐은 단 한 번도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그 맹목적인 시선이 매번 내게 확신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미래를 축복해 주고 싶었다.
내 미래의 희망은 모두 그에게서 비롯되었으니 그의 미래 또한 그랬으면 해서.
그러나 순간순간 찾아오는 과거의 기억은 자꾸만 내 발걸음을 물고 늘어졌다.
나는 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게 찾아오는지 한 번 겪었다.
내 방심이었을 수도, 오만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하는 희망이 짓밟힌 그 순간의 기억이 잊히지 않았다.
하르텐에게서 비롯된 희망조차도 그 앞에선 일시에 부서질 정도로.
나는 하르텐을 내 나름대로 소중하게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 나를 보고 싶었노라고 말해주는 그를 무척 아끼고 있다.
하지만 또한 나는 경계해야만 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운명이 그를 거두어 갈지 모르니 마지막 희망까지 그에게 걸 수 없었다.
“그때 아가씨께서 하신 말씀은, 아직 유효한가요?”
받을 이 없는 편지를 끄적대던 밤이면 늘 떠오르는 순간들이었다.
그 어느 때의 기억이든 그리움에 잠식당하는 순간이면 기꺼웠으므로.
내가, 혹은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이 존재하기에 오히려 그의 질문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그런 나를 바라보며 하르텐이 더없이 화사하게 웃음 짓는다.
웃는 척하던 아까완 달리 눈도 부드럽게 휘어지며 완전한 미소를 그려냈다.
“복수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활짝 웃는 얼굴에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달콤하고 여전히 미소가 서린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 생각이, 아직 유효한가요, 아가씨?”
왜 그 순간 성서의 한 구절이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는, 그토록 아름답다.’는 구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