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백일홍 (4)
“하르텐 엔데버 황자 전하와 로즈 나이트 후작 영애 입장하십니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한 차례 가라앉은 연회장 속, 수많은 귀족들이 황급히 나를 돌아본다.
그 시선 속에서 나는 한껏 여유로운 얼굴을 가장하고 하르텐의 에스코트를 따랐다.
연회의 주최자인 록사나에게로 걷는 동안 내 주위의 귀족들이 하나같이 아연한 표정으로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고 서있었다.
“엔데버의 별을 뵙습니다.
케를란가의 록사나 케를란이 인사드립니다.”
“만나서 반갑네, 영애.
이토록 성대한 연회에 초대받아 무척 기쁘군.”
하르텐의 칭찬에 록사나가 겸양의 말을 얹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새삼 하르텐의 위치가 다시금 인식되는 기분이었다.
늘 내 앞에서는 ‘텐’으로서 존재했기에 잘 느끼지 못했던 현실이었다.
“며칠 새 더 예뻐졌네, 로지.
드레스 정말 잘 어울려!”
“고마워.
가넷이 고생 좀 했지.”
내 드레스를 살펴본 록사나는 손을 붙잡고 쉴 틈 없이 칭찬을 쏟아냈다.
괜히 ‘가넷이 선택한 회심의 역작’이 아니었나 보다.
심미안이 높은 록사나가 이렇게까지 칭찬한 적은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그런데 황자 전화와 로지는 어떻게 만난 사이인가요?”
하르텐과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입장했으니 손님을 맞이하던 록사나의 임무는 이제 끝난 셈이었다.
평소라면 나와 로위나 영애를 방패로 삼고 몰래 이런저런 간식을 주워 먹었을 록사나였으나 내가 처음으로 파트너와 함께 연회에 참석하자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로즈가 상단 일로 도로테아궁에 들렀었지.
그때 이야기를 나누다 친분을 쌓았네.”
“어머, 얼마 전이요?”
흐음, 하며 눈을 가늘게 뜨는 록사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 또 무슨 장난거리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장난스레 휘어진 눈이 나를 향했다.
“두 분 영애께서 편히 이야기 나누시도록 잠시 자리를 비워드려야겠군.”
록사나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하르텐이 먼저 선수 쳤다.
그를 내쫓는 모양새에 당황한 내가 말리려 했으나 록사나는 한술 더 떴다.
“황자 전하께서도 다른 분들과 교류하셔야지, 로지.”
그건 그렇지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르텐은 내게 다정하게 웃어 보이고는 주변을 맴돌던 귀족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르텐의 뒷모습을 좇고 있으니 록사나가 나를 불렀다.
“세상에, 로지.
언제 그런 사이가 된 거야?”
“…그런 사이?
무슨 뜻이야?”
“어머, 날 속이려고?
어림도 없지, 로지.
귀족 회의에서 갈고닦은 눈치를 무시하지 말아요.”
한쪽 눈을 찡긋거린 록사나가 궁금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좋은 말로 할 때 털어놓으라는 은근한 눈짓과 함께.
사실 내가 걱정해야 했던 건 귀족들의 시선이 아니라 록사나의 유도 심문이었던 것은 아닐까.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 될 때까지도 록사나의 들볶음은 멈추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던 로위나 영애가 합세할 때까지, 내내.
그렇다고 로위나 영애가 록사나를 말려주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로위나 영애는 애당초 ‘궁금함’이라는 단어를 얼굴에 써 붙인 채 나타나 자연스레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묻고 싶은 게 많지만 록사나가 나를 잘 털어낼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한발 물러선 모양새다.
그러니 록사나의 극성스러운 들볶음에 로위나 영애의 은근한 눈치가 추가된 형국이었다.
어딜 봐도 내가 털어놓지 않으면 쉽사리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분위기를 깔아두고서.
“뭘 묻고 싶은 건지는 충분히 알지만, 얘기할 것도 없어.
상단 일로 엔데버 사신단이 머무르는 도로테아궁에 들렀고 어쩌다 보니 파트너 신청을 받은 것뿐이라니까?”
“난 그 ‘어쩌다 보니’가 궁금한 거야.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데 파트너 신청을 할 리 없잖아!”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황궁 연회에서도 일이 있었잖아요?”
로위나 영애가 슬쩍 얹은 말에 록사나가 깜짝 놀랐다는 듯 반응했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 섞인,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긴 반응이었다.
“그러게요!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농담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던 거였네요?”
“맞아요.
정말로 로즈 영애를 보고 계셨을지도 모를 일인걸요.”
방긋방긋 웃으며 놀려먹는 데 신이 난 두 사람을 보고 있으려니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맺혔다.
이렇게나 편하게 장난을 칠 정도로 친해진 사이가 싫지만은 않았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당혹스러움도 분명 있었지만 우리가 친근한 사이임을 알려주는 이런 시간들이 즐거웠다.
“좋아요, 이 얘기는 이만 끝내고 더 중요한 얘기를 하죠.”
“더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로위나 영애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나와 록사나는 흔치 않은 상황에 자연스레 로위나 영애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얼마 전에 티 파티에 불려 나갔다가 들었어요.”
“티 파티요?”
“드문 일이네요, 영애.
그런 곳 잘 안 나가시잖아요.”
우리가 흥미를 보이며 답하자 로위나 영애가 과장된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큰 몸짓에 잠시 가려진 표정은 진심인 듯 체념의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이죠.
그날 아카데미의 휴일이라 저택에서 쉬다가 참석하게 됐어요.
어머니께서 연 티 파티였거든요.
저는 손님들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내려왔다가…, 발이 묶였죠.”
떫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로위나 영애가 상상되어서 안타까운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우리 셋 중 가장 표정 관리를 못하는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백이면 백 로위나 영애를 선택할 것이다.
그녀는 애당초 본인이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포기가 빠른 사람이었다.
노력해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본인 식대로 해결해 버리는.
그렇기 때문에 표정 관리에 대해서도 한 손 놓은 상황이었다.
“곤혹스러운 시간이었겠군요.
이해해요, 영애.”
“늘 느끼는 거지만, 어머님들께서는 어찌 그리 사교계를 중시하시는지.
가끔 저보고 정무 볼 시간에 티 파티나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씁쓸하게 웃는 로위나 영애를 위로하고자 우리 두 사람이 재빨리 말을 붙였다.
로위나 영애는 굳어진 입매를 조금 풀더니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 티 파티에서 나온 재밌는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어서예요.
귀부인들께서 곧 황태자비 간택전이 있겠다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황태자비… 간택전이라고요?”
그렇구나, 하며 수긍하는 나와 달리 당황을 그대로 담은 록사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듯.
물론 저 반응이 일반적인 반응이긴 했다.
황태자비 간택전이라고 하면, 귀족 영애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행사 중 하나니까.
이런 식으로 갑자기 눈앞에 놓이게 되면 누구라도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그 ‘누구’에 해당되지 않는 나는 원작의 흐름을 대충 기억하기 때문일 거고.
원작에서 헤일로 카르트와 데이지 퀴니가 계속 파트너로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는 이때쯤 황태자비 간택전이 있었던 것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아직 귀족 회의에선 황태자비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적령기이긴 하시지만 이번 엔데버의 사신 파견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 혼인을 올리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맞아요.
이건 아직 귀족 회의에 오르지 않은 이야기예요.
제가 들은 건 ‘황후 폐하’의 시녀분들이 나눈 이야기의 일부니 말이에요.”
‘황후 폐하의 시녀’는 황궁에서 황후 폐하와 가장 오래 같이 지내는 귀부인들로 모두 다 사교계를 주름잡는 귀족가의 안주인들이다.
황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소문에 빠르고 유행에도 민감한 그들은 사교계의 선두주자들이라고도 불리며 다른 귀부인들이 동경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이들이 메리안 백작가의 파티에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다니.
이건 로위나 영애의 메리안 백작가를 낮잡아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단 노련한 귀부인들의 처세에 대한 의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황후 폐하의 시녀들은 사교계의 최상위 계층으로서 스스로의 위치와 그에 따른 책임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황궁 연회나 공작가의 연회 같은 큰 연회를 제외하고서는 셋 이상 모이지 않는다.
그들이 함께 참여하는 경우 그 자체만으로 ‘황후의 비호’가 그 파티에 함께한다고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로 황후가 어떤 귀족가에 뜻을 실어주고자 그들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어찌 됐든 그들이 그런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모인 경우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황후 폐하께서 메리안가의 빈민 구제 사업을 좋게 보셨나 보군요.”
“다행히도 그러신 모양이에요.
네 분이나 참석하셨더라고요.
제가 들은 그 이야기는, 비밀이지만, 그분들이 온실을 구경하실 때 하는 이야기가 제 귀에 들려서 듣게 되었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록사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귀족 회의에서 이미 결론 난 이야기가 있었던지라 갑작스러운 변심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록사나의 상황이었대도 그랬을 것이다.
간택전이 이렇게 급하게 열리게 된 이유에는 그 어떠한 정당성도 없었으니까.
데이지 퀴니와 헤일로 카르트를 질투하던 황태자, 블라세 로한의 고집에 무슨 정당성이 있을 수 있겠어?
데이지 퀴니를 사랑하게 된 남자들의 운명이 예정대로 흘러가는 중일 뿐.
내가 길에서 이탈했음에도 세계는 잘 돌아가는구나 싶어 알 수 없는 허무함이 찾아오긴 했으나 고개를 저어 금세 털어냈다.
어찌 됐든 이젠 상관없는 것을.
나는 나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헤일로 카르트에게 당한 상처는 깊게 남았으나, 내 목숨값치고는 싸지 않은가.
가끔 과거를 돌아보면 왜 한 번에 헤일로 카르트를 놓지 못했는지 스스로도 의문일 때도 종종 있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문득 하르텐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비해 한결 다정해진 얼굴로 언제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속삭여 주는 그가 보고 싶었다.
그저 어려운 게 싫어서,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거라 손가락질 받을 만한 생각이었지만.
지금 당장, 내가 바꾼 운명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울게요.”
“어머, 파트너분을 찾으러 가시나요?”
“그렇다면야 잡을 수 없지.
잘 다녀와.”
로위나 영애와 록사나의 배웅을 받고 테이블을 떠났다.
연회는 한창 무르익어 본능에 충실한 귀족 몇은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처음 입장할 때에 비해 듬성듬성 빈 공간이 보이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하르텐을 찾으려 했지만 눈에 띄는 그 금발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나보다 키가 큰 사람들이 대부분인 연회장에서 머리색으로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2층에 올라가서 사람들을 내려다볼까, 하며 2층을 올려다보는데 내가 그토록 찾던 하르텐이 거기에 있었다.
맞은편 2층에 위치한 그는 어떤 영애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눈에 박히듯 새겨졌다.
하르텐이 다른 영애와 다정스럽게 이야기하는 그 모습이.
하르텐이 나에게만 다정할 거라는 착각은 하지 않았다.
록사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이미 그건 느꼈다.
예전의 그처럼 모든 사람에게 싸늘하게 날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도.
하지만 저토록 다정한 얼굴로 다른 영애와 대화를 나누는 때가 올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상대가 데이지 퀴니라면 더더욱.
나는 그의 모습에 새삼스럽게 충격을 먹고 말았다.
나에게 그런 자격이 없음을 앎에도, 그 광경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영애, 나이트 영애.”
“네, 네?”
그 모습을 발견하고 발조차 떼지 못하고 굳어있는 나를 부른 것은 헤일로 카르트였다.
내가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아무 감정도 없는 무감각한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다.
가십거리를 찾아대던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하는데, 헤일로 카르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잠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영애.”
“…우리 사이에 할 이야기가 있었던가요?”
하르텐이 떠난 2년간 나는 헤일로 카르트와 데이지 퀴니 두 사람과 일정이 겹치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했다.
모든 귀족들이 몰리는 황궁 연회야 록사나, 로위나 영애도 있고 지방 귀족들의 수도 적지 않아 우리 셋이 한 공간에 있음을 인식하는 귀족들이 없었지만, 혹여나 사사로이 참석한 티 파티나 살롱 파티에서 데이지 퀴니, 헤일로 카르트를 마주칠까 봐 얼마나 조심했는지 모른다.
내가 사교계에서 점점 잊혀간 것은 그만큼 사교계에서 활개를 치는 두 사람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했으니 눈치 빠른 헤일로 카르트라면 알아챘을 것이다.
2년 동안 그토록 얼굴 맞댈 일이 없었다는 게 정말 우연일 거라 믿는 멍청이가 아니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상황에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데이지 퀴니는 하르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그 파트너인 헤일로 카르트는 나를 붙잡는 지금의 상황이 정상적이라고 보는 건가?
화가 치밀어 올라 발에 힘을 실으며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아주 잠시면 됩니다.”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내 응대에도 헤일로 카르트는 나를 다시 붙잡았다.
오히려 내 노골적인 적의에 더 절실해진 모습이었다.
그 반응에서 나는 쉽게 물러서지 않겠단 의지를 읽어냈다.
나는 한숨과 함께 작은 고갯짓을 해 보였다.
그를 무시하기엔 귀족들의 흥미 어린 시선이 계속 나를 따라다닐 것임을 알았기에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계속 말싸움하는 건 사교계에 씹을 거리를 하나 더 주는 것밖에 안 된다.
테라스?
다음 날 헤일로 카르트의 양다리 소식을 듣고 싶다면 좋은 선택지일지도.
내가 고갯짓한 곳은 음료와 핑거 푸드들이 펼쳐져 있는 연회장의 가장 구석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적당히 피할 수도 있으면서 밀폐되지 않은 공간.
목소리를 좀 낮춰야 하긴 하겠다만, 바로 옆에서 대화를 엿들을 간 큰 귀족은 없을 것이다.
최선의 선택은 아니어도 차선책으론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가죠.”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나는 헤일로 카르트의 안내를 받다가 흘긋 고개를 돌려 2층을 쳐다봤다.
무의식중에 흘러간 시선이었다.
하르텐을 찾느라 아까 그 자리 주변에 시선이 자꾸만 머물렀다.
그러나 내가 헤일로 카르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자리를 비운 듯 하르텐은 그 자리에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가죠.”
그 순간 왜 나는 하르텐이 나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왜 나는 그 순간… 하르텐이 나를 헤일로 카르트로부터 데려가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스스로를 비웃으며 헤일로 카르트의 뒤를 마저 따랐다.
예상대로 연회장의 구석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늘 같은 교류를 위한 연회에서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시종에게 음식을 주문하거나 음식을 먹을 새도 없이 자리를 비우기 때문이었다.
나는 쟁반을 든 채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시종에게서 샴페인을 받아드는 헤일로 카르트를 무심한 시선으로 훑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헤일로 카르트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 시야에 맺혔다.
이 상황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그 무심한 얼굴을 포함해서.
연회장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은 나를 위해 챙겨온 샴페인은 내 앞에 두고 제 것은 제 앞에 둔 헤일로 카르트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다.
답지 않게 망설이는 모양새였다는 건 꽤 의외였지만.
나는 그가 먼저 입 열기를 기다리며 샴페인 잔을 쥐었다.
그가 말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목이 탔다.
늘 제 할 말을 거침없이 했던 헤일로 카르트가 망설이는 지금의 상황이 나를 불안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시간을 끌수록 그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샴페인을 들어 목을 축이는 나에게 헤일로 카르트가 물었다.
“…샴페인은 입에 맞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단번에 반 잔을 비워내고서야 짙은 알코올 향이 느껴졌다.
술이 약한 나로서는 그다지 입맛에 맞지 않았으나 예의상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헤일로 카르트는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렇군요.”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둘 사이에는 또 한 번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애당초 그에게 할 말이 없는 나와 말을 꺼내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헤일로 카르트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답답했지만 먼저 말을 건네는 건 내키지 않아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갑자기… 이렇게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영애.”
갑자기라는 것도 알고 시간을 빼앗는 것도 알고, 내 사정을 잘 아는 주제에 왜 망설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애써 눌렀다.
지금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려는 것이 술기운 때문인지 데이지와 있는 하르텐을 보고 난 충격 때문인지 스스로도 가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함께 오신 분은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그걸 카르트 공자께서 왜 물으시는지.”
그는 내 호칭에 잠시 놀란 눈을 해 보였다.
정말 찰나에 스쳐 지나간 표정이었고 금세 갈무리되었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나에겐 똑똑히 보인 표정이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불쾌해졌다.
마치 내가 그렇게 예의 차린 호칭을 쓰리라곤 전혀 예상 못 했던 것 같은 그 반응이 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똑같은 사람 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두 분께서 갑작스레 파트너로 자리에 나오신 게…, 저한테는, 다른…….”
“…….”
“아니, 방금 말은 잊어주십시오.”
고뇌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 헤일로 카르트는 샴페인 잔에 시선을 두고 뭔가에 골몰하는 듯했다.
제 생각을 다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각에 잠긴 그를 보고 있자니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어쩌면 데이지 퀴니의 부탁으로 내 시간을 붙잡아 두러 온 걸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흘러가자 내가 먼저 묻고 싶은 말이 생겼다.
“데이지 퀴니 공녀가 시키던가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떠한 순화도 거치지 않아 과하게 직설적으로 뻗어나간 내 말에 헤일로 카르트의 무감각하던 표정이 깨졌다.
그는 내내 무심했던 표정에 금이 간 것도 모르는 듯 그대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마주한 시선 속에서 그 눈동자가 담고 있는 나는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데이지 퀴니 공녀가 엔데버 황자 전하와 제가 무슨 사이인지 알아봐 달라고 시켰냐 물었어요.”
금세라도 내게 무례하다 일갈할 것 같던 헤일로 카르트는 어째서인지 주변을 한번 돌아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귀족들이 듣습니다.
목소리를 낮추시는 게…….”
“왜요, 맞는 말이라서?
데이지 퀴니 공녀의 시종 노릇이 부끄럽긴 하신가 봐요?”
헤일로 카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 말에 반박하고 싶은 모양새였다.
물론 그렇겠지.
‘카르트 공자’나 되어서 그런 말에 쉽게 맞다 대답할 순 없을 터다.
실제론 그녀의 수족관에서 꼬리 흔드는 물고기 중 한 마리에 불과하더라도 수족관 밖의 사람들에겐 더없이 탐스러워 보여야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므로.
예법으로 따지고 들어도 내 말은 과한 편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헤일로 카르트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반응했을까 싶을 정도로.
늘 예의를 지킴에 있어서는 기준선을 벗어나지 않으려던 나를 생각해 보면 과민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예의를 따지기에는 헤일로 카르트의 죄가 작지 않았다.
일방적인 파혼 요구를 받고 그 이후부터 사교계에서 손가락질당했던 나.
그 모든 피해 보상은 도대체 누가 해줬고?
그러니 그도 이 정도 무례는 눈감아야 할 것이었다.
정말 진흙탕 싸움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 심합니다, 영애.”
“아니면, 클로버 노릇이라고 해드릴까요?”
“……!”
“기억나세요?
퀴니 공녀의 클로버가 되어 샴록에 참가하신 적 있으시잖아요.”
마지막 말만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 나를 말리려던 헤일로 카르트의 모든 움직임이 뚝, 멎었다.
마치 전원이 꺼져버린 기계처럼.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가 들은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는 듯했다.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양.
“말도 안…….”
“헛소리로 치부할 생각 마세요.
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아니니까.
못 믿겠다면 그 사람을 여기로 불러올까요?”
“……!”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은 절대 그 자리에 있어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는 건 들키지 말아야겠지만 그 사실만 감수하면 헤일로 카르트를 들쑤시기엔 퍽 좋은 정보였다.
어차피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클로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할 거고, 설령 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르텐이라는 것까지 연결시키지 못할 테니까.
예상대로 동요를 감추지 못한 헤일로 카르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표정에서 그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체념했다는 게 느껴졌다.
약간의 허세를 담은 마지막 말이 치명타였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와 내가 샴록에서 얼굴을 마주 댄 적이 있어서 수긍해 버린 걸지도 모르고.
“…….”
아까보다 더 무거워진 침묵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헤일로 카르트의 오른손은 잔을 움켜쥔 채로 굳어있었다.
손에 어찌나 힘을 줬는지 손등에 뼈마디가 드러나 있었다.
“이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처음부터 궁금했던 건 하나예요.
내게 황자 전하와의 관계를 묻는 게, 데이지 퀴니 공녀와 연관 있는 것인지.”
“저는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헤일로 카르트가 뱉어낸 대답은 무척이나 빈약했다.
그 어떤 의문도 해소시켜 주지 않는 대답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고작 그 궁금증 때문에 귀족들의 가십거리가 되는 걸 감수하시는군요?”
“…….”
그는 그 되물음에서 내가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어디에서 화가 났는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나는 연회장 한가운데서 그와 함께 묶이던 그 순간부터 기분이 나빴다.
나는 더 이상 그 얼굴을 무감각하게 마주할 수 없었다.
“지난 2년간의 내 노력을 이렇게 한순간에 날려버리는군요.
다신 이렇게 얼굴 마주할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기분을 배려해 주신다면 그렇게 해주셔야 할 겁니다.”
부러 누그러뜨리지 않은 어조로 쏟아내고 나니 기분이 조금 풀렸다.
내 무례에 대해서 그가 정식으로 항의한다면 가문 간의 문제가 될 테지만 카르트가의 일방적인 파혼 요청을 묵묵히 받아줬던 우리 가문에 그 정도 문제를 제기하진 않을 것이다.
그 고고하신 자존심에 욕 좀 먹고 말지 설마 후작가와의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이겠어?
그런 계산을 때리고 나니 한결 후련하게 입을 털 수 있었다.
너무 많은 말을 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은 있었지만, 그 덕에 헤일로 카르트의 포커페이스도 부숴버리고 동요하는 모습도 봤으니 후회는 없었다.
아직 갚아줄 것이 많지만, 오늘은 이만 물러나기로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다 보니 얼떨결에 휴게실이 이어지는 복도까지 걸어오게 되었다.
대부분의 휴게실은 먼저 자리를 차지한 귀족들 덕에 방이 찼다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그 팻말을 무심하게 넘기며 록사나와 로위나 영애를 찾으러 돌아갈지 현관으로 가 마부를 부를지 고민하고 있는데 코너를 꺾으며 나타난 사람이 내 팔목을 붙들었다.
“아가씨.”
다른 이가 들을까 염려한 듯 귓가에 나지막이 내려앉는 목소리가 그 주인을 알려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꺾어 방금까지 만나고 싶었던, 그러나 지금은 보고 싶지 않은 얼굴과 마주했다.
“텐.”
이리저리 꺾인 복도 너머에 어떤 사람이 서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하르텐의 부름에 마찬가지로 작게 화답했다.
하르텐이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방을 찾아보죠, 잠시 휴식이 필요하신 듯하니.”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온 그가 나를 잡아 이끈다.
나는 이 순간 그 손을 뿌리치고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것인지 고민했다.
그런 내 고민이 무색하게 빈방은 금세 나타났다.
나를 먼저 방 안에 들인 하르텐은 앞서 지나쳤던 방들이 그러했듯 방이 찼음을 알리는 팻말을 걸었다.
저 팻말이 방 앞에 있는 이상 시녀와 시종은 물론이고 저택의 주인마저도 이 방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밀실에 하르텐과 나만 남아있다는 사실이 미묘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나는 나를 향해 올곧이 꽂히는 시선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르텐은 어딘가 불유쾌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
아까의 호칭으로 다시 나를 부른 하르텐은 뭔가 답답한 것 같기도, 뭔가 분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들여다볼 수 없는 그의 속은 부정적인 감정들로 가득 차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눈만 깜빡거리며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투박한 손길로 제 머리를 쓸어 올린 하르텐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다시 한번 나를 애달프게 부른 하르텐이 어딘가 낙담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뻣뻣하게 굳어있는 내 몸을 살며시 끌어안은 그가 응석 부리는 듯한 어조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는…, 여전히 불안해요.”
“…….”
“과거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이런 순간들마다 후회하게 돼요.”
어떤 선택?
물음이 목 끝까지 치달았으나 나는 익숙하게 삼켜버리고 수그러진 그의 어깨를 조심스레 토닥였다.
그가 제 속을 뱉어내는 흔치 않은 순간을 내 궁금증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제가 모르는 아가씨의 시간들이 무서워요.”
“…….”
내내 숨겨왔던 감정을 가시화시킨 듯 하르텐의 얼굴에 불안감이 번졌다.
내게 온전히 기대오듯 맞닿은 몸이 안타까워 나 역시 손을 뻗었다.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가 위로를 필요로 한다는 건 알았다.
그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저는 아가씨가 좋아요.”
감정을 배제시킨 듯 담담한 목소리에 숨이 턱 막혔다.
그래선 안 된다, 고 그리도 쉽게 내뱉었던 부정이 그 순간만큼은 쉽지 않았다.
이토록 직설적으로 그의 감정을 들은 것이 처음이어서?
아니면, 담담하려 애쓰는 목소리 끝이 흔들렸다는 걸 알아버려서?
나만큼은 그에게 휩쓸려선 안 되는데.
그의 미래든 나의 미래든 가시밭길이 될 것이 확실한데도 나는 입을 달싹이기만 했을 뿐 끝내 말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를 밀어내면 그가 영영 내게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단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 말에 상처 입고서도 다시 웃는 얼굴로 나타나던 그를, 이번만큼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내가 그 가정에 겁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말을 망설일 만큼.
이때까지 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 감정을 부정하고 모른 척했던 모든 순간들이 무색하게, 나는 그가 돌아오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심 그를 탓하며 휩쓸리는 척했지만, 실제론 그가 손 뻗어주기를 매번 기다리고 있었다는 깨달음은 내 심장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내내 그를 부정했던 말들이 도로 비수가 되어 내게 꽂히는 것만 같았으므로.
그래서 나는 망설이던 그 순간 아픔과 함께 내 감정을 자각했다.
나도 그를 좋아한다.
이 감정을 사랑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그를 아껴왔던 마음 이면에 그를 좋아하는 마음 역시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씨앗을 심고 물을 뿌려 맺은 결실이었다.
나는 이제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단 마음이 내가 해야 할 말 대부분을 앗아갔으므로.
그가 알아채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말로써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그의 목 뒤를 문질렀다.
며칠 전의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물론 유혹의 의미보다는 나 역시 그렇다는, 무언의 긍정을 담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내 손길에 잠시 등을 굳힌 하르텐은 다른 쪽의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가 짧게 한숨을 쉬자 뜨거운 숨이 어깨에 온기를 남기고 흩어졌다.
“아가씨, 저는…….”
“…앗!”
중얼거리던 하르텐이 갑자기 목덜미 부근을 물어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큰 소리를 내자 하르텐은 날 껴안은 팔에 더 힘을 주더니 다정스레 그 부근을 할짝였다.
“아가씨를…….”
그 뒤로 하르텐의 말이 더 이어질 것 같았으나, 그는 목덜미에 입술을 문지르고 혀를 세우는 데 정신을 빼앗긴 것 같았다.
그가 주는 축축하고 야릇한 감각에 두 팔이 갈 길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테, 텐?”
은근슬쩍 내 허리에 팔을 두르며 제게 끌어당기던 하르텐이 왜 부르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까지 내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던 그 얼굴은 어딜 갔는지 시선이 마주친 그는 화사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아가씨.”
달큰한 목소리로 속삭인 그가 내 시야가 그로 가득 찰 때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빈틈없이 나를 옭아매는 팔과는 달리 다정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나는 멍하니 그 얼굴을 응시했다.
“키스하고 싶어요, 아가씨.”
입술이 맞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는 유혹적으로 눈을 휘며 속삭였다.
내가 망설이는 기미를 보이니 아예 대놓고 유혹하는 모양새였다.
치열하게 싸워대던 이성과 감성은 하르텐이 내 손에 얼굴을 비비는 순간 한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애당초 내가 감정을 깨달은 순간 이미 기울어진 싸움이었지만.
“…난 너무 유혹에 약해.”
체념의 한숨과 함께 의지박약인 스스로가 괘씸해 중얼거리는데 하르텐은 마냥 좋다는 듯 내 얼굴 여기저기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저에게만이라면, 저는 좋아요.”
“너만?”
“네, 저만.”
“…너만이 아니면?”
장난기가 돌아 되묻자 슬금슬금 등을 타고 오르던 손이 멈췄다.
갑자기 휴게실의 온도가 뚝 떨어진 것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저 말고,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이를 악문 하르텐이 애써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마치 제 반응을 내게 들키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러나 중간중간 뭉개지는 발음과 나를 더 억세게 끌어안는 손은 그의 속내를 숨겨주지 못했다.
나는 나를 품에서 놓으면 죽을 듯 구는 그가 싫지만은 않아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씨, 대답해 주세요.”
내가 대답을 미룰수록 하르텐의 목소리가 더 초조해진다.
아까 전 내 시간을 욕심내던 그때처럼.
나는 대답을 독촉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싶었으나 그는 끝까지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없어, 없었어.
그러니까 얼굴 보여줘.”
“…그래도 안 돼요.”
아가씨는 싫어하실 테니까, 안 돼요.
누그러진 목소리가 단단하게 제 의지를 피력한다.
내가 왜 싫어하겠어?
그리 대답해도 그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금 기분으론 존재하지도 않는 놈을 찢어버리고 싶으니까, 안 돼요…….”
장난인 줄 알았던 심정이 꽤 진심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놀랍기도 하고 가슴께가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놀릴 생각으로 장난스레 한숨을 내쉬자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내게 매달리듯 붙어있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제가 질투하는 거…, 싫으세요?”
아니, 사실은 좋아.
그렇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나는 대답 대신 속삭였다.
“키스해 줘, 텐.”
하르텐은 굶주린 짐승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갈급하게 맞닿은 입술은 금세 서로를 갈구하듯 벌어졌고 질척하게 젖은 소리와 함께 혀가 맞닿았다.
하르텐에게서 화이트와인 향이 났다.
“아가씨, 잠시만…….”
그의 목에 팔을 걸고 매달린 나를 잠시 떨군 하르텐이 웃는 얼굴로 내 허리를 받쳤다.
나보다 한 뼘 더 큰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싶어 발꿈치를 들고 버텼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에 숨겨지지 않는 조급함을 담은 채로 나를 안아 들었다.
몇 걸음 옮겨 침대 위에 나를 앉힌 그가 섬세한 손짓으로 구두를 벗겨주었다.
내내 좁은 공간 안에 구겨져 있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자 푸스스 웃음을 터트린 하르텐이 고개를 내려 발등에 입 맞췄다.
고개를 숙이며 내리깔린 금빛 속눈썹 아래 눈동자가 요요히 빛났다.
“저는, 아가씨의 몸에 제 흔적이 남아있는 게 좋아요.”
“왜?”
“…그걸 볼 때만큼은 실감이 나거든요, 제가 아가씨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게.”
그런 게 없어도 너는 내게 의미 있는 존재야, 하르텐.
그러나 나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오늘따라 목 너머로 삼키는 말이 많다는 생각을 하며.
글자 하나하나가 씁쓸한 맛을 남기며 심장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직까지는 저뿐이라는 게 정말 좋아요.
…앞으로는, 아직 모르는 거지만.”
“앞으로라니, 그런 생각을 해?”
“모든 경우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아가씨께 배웠으니까요.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요.
제가 정말로 찢어 죽여버릴지도 모르잖아요?”
등골 한편이 오싹해지는 말을 하면서도 얼굴은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처럼 해맑아 괴리감이 엄청났다.
그의 선량한 얼굴을 믿어야 하는지 가감 없는 진심을 뱉어내는 입을 믿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정말로 그러진 않을 거지?”
결국 나는 그의 얼굴이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아는 하르텐은 남을 함부로 상처 입히지 않았으므로.
하르텐은 입맞춤으로 답했다.
“아, 으응…….”
“아파요?
여기?”
몸 내부를 왕복하는 손가락이 매번 다른 지점을 찔러 올린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조되던 감각이 다시금 추락하며 몸이 애매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읏.
으응, 앗!”
하르텐의 엄지손가락이 음핵을 문지르며 나를 흥분시켰다.
갑작스러운 쾌감에 허리가 튀자 하르텐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빠른 손가락이 음핵을 문지르고 밀어 올리면서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응, 응, 흐으…….”
자꾸만 입술을 탐내는 하르텐 덕에 숨이 가빴다.
나는 하르텐의 팔을 붙잡으며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엉덩이 아래에서 단단해진 무언가가 천 너머로 느껴졌다.
“텐, 흐윽, 으으응, 아…….”
“여기 좋아요?
방금 느낀 것 같았는데.”
발그레 물든 얼굴이 내게로 기울어진다.
웃음기를 머금고 가늘어진 눈가가 내 반응을 샅샅이 살폈다.
그의 품에 가둬진 나는 그의 과한 관심 속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방탕하게 벌어진 내 다리로 향했을 때는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이 들어갔으나 단단하게 버티는 하르텐의 허벅지에 걸려 오므릴 수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주는 쾌감을 받아들이며 몸을 움찔대니 그의 셔츠가 내 몸 아래서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셔츠가 뭉치며 자세가 불편해지자 그는 망설임 없이 셔츠를 벗어 침대 아래로 던져버렸다.
단단한 가슴이 벽처럼 내 뒤를 받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등에 그의 가슴이 와 닿는 느낌이 묘했다.
“텐, 테엔…….”
“듣고 있어요.”
하르텐은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간지러움에 어깨를 움츠리자 장난스레 어깨를 깨문 그가 다정하게 속삭인다.
그 속삭임에도 자극받은 귀는 옅은 소름을 일으켰다.
몸속 한 점을 노리는 손가락이 집요하게 몸을 쑤셔 올렸다.
“흐으, 앙…, 테엔……!”
“여기요?”
열기 어린 목소리가 사그라질 듯 속삭이는 내 목소리에 답했다.
움찔대는 손을 들어 내 양옆으로 뻗어진 팔뚝을 움켜쥐자 다정한 입맞춤이 귓바퀴에 쏟아졌다.
고조되는 감각에 붙잡을 것을 찾았을 뿐인데, 하르텐은 그것조차 기꺼운 듯했다.
가만히 내게 얼굴을 기울인 하르텐은 짓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몸 안쪽을 차지하고 있는 손가락을 굽히며 속삭였다.
“여기가 좋으신가 봐요.
아가씨의 몸이 제 손을 놓질 않아요.”
그의 말대로, 쾌감을 느끼기 시작한 나의 몸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을 아쉽다는 듯 물어대는 아래가 느껴져서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응, 으응, 아, 안 돼, 테엔……!”
“몇 번이든 괜찮아요.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해드릴 테니까요.”
…다른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는 부러 뒷말을 나지막이 속삭인 듯했으나, 내 귀에는 그 말이 더 귀에 박혔다.
나는 쾌감으로 곱아드는 팔을 가까스로 펴 등 뒤에 위치한 그의 얼굴을 잡아끌었다.
지척에 다가온 그 얼굴에 먼저 입 맞추자 하르텐은 혀를 내어 내 입술을 진득하게 핥았다.
간질간질한 혀 놀림 몇 번이 끝나고 나자 금세 숨이 부족해졌다.
츕, 츄릅.
숨이 차 먼저 고개를 돌리자 하르텐은 젖은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리도록 귀를 핥았다.
지나치게 야릇한 소리에 그의 손가락을 물고 있던 아래가 다시금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손끝으로 쾌락점을 한 번에 쳐올렸다.
“하앙!
아으응…….”
몸속 한 점에 모든 신경계가 집중되는 느낌.
척추를 따라 전율과도 같은 감각이 뇌에 전해졌다.
쾌락과 동시에 뻣뻣하게 굳어졌던 몸이 곧 나른하게 풀어졌다.
절정 직후의 노곤함이 신경을 부드럽게 감쌌다.
품 안에서 완전히 무력해진 나를 하르텐이 고쳐 안는다.
이미 힘이 빠진 다리의 고정을 풀어주고 제 허벅지가 아닌 다리 사이에 앉힌 것이다.
그의 몸 위에 올라탔던 아까보다는 접촉 면적이 줄어들었음에도 엉덩이 아래의 단단한 그것은 여전히 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바지춤을 더듬었다.
하르텐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가씨?”
하르텐에 의한 쾌감을 받아내기만 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오가는 롤러코스터 위에 있는 기분이다.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쾌감이지만,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하르텐 덕에 적당히라는 게 없으니까.
그 덕에 나는 늘 죽을 만큼 느끼고, 느끼고, 느끼다가 밤이 다 가기 일쑤였다.
그러니 한 번쯤은 이런 시도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주도해서 그의 쾌감을 이끌어 내는 것 말이다.
나중에 이 시간들을 떠올렸을 때, 나만 즐기는 게 아니라 함께 즐긴 시간이었다고 느끼고 싶었다.
물론 나는 하르텐만큼 능숙하게 할 수 없겠지만.
“쉿, 가만히.”
당황한 표정이 여실한 채 자꾸 내 손에서 벗어나려는 하르텐에게 속삭이자 하르텐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힐긋 확인한 표정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었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나의 한마디에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떨리는 기분으로, 풀어낸 벨트를 침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벗어.”
“아, 아가씨, 이건…, 아니, 그럴 수는…….”
“얼른 벗어.”
단호한 한마디에서 나의 ‘절대 무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었는지 하르텐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지막까지 ‘정말요?’
하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봤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바지 단추를 끌러내는 것부터 지퍼를 푸는 과정까지 전부 지켜보고 있으니 하르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당황하거나 어쩔 줄 모를 때 볼이 붉어지는 건 몇 번 봤지만 얼굴 전체가 새빨갛게 물든 것은 처음 봤다.
내 눈앞에서 바지 벗는 게 부끄러웠나?
그러나 내 드레스부터 슈미즈까지 모두 벗긴 것이 하르텐임을 생각해 보면 꽤 아이러니한 반응이었다.
내 옷은 씹어 먹어버릴 것 같은 눈을 하고서 직접 벗겨놓고 이제 와서 부끄러워한다고?
“가만히 있어.”
하르텐은 이제 조금 체념한 표정으로 내 허리에 팔을 둘러 나를 제 몸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손을 따라 다시 자리를 잡으며 그를 내려다봤다.
시선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달아올라 있었으나 그 이면에는 애써 억누르는 흉포함이 있었다.
나를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듯 뜨겁게 달아오른 시선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래로 깔렸다.
나는 침을 한번 삼키고 부풀어 오른 그의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몸을 이렇게 오래 보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늘 내 옷을 벗기는 데만 온 신경이 쏠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노골적인 시선이 그의 아래로 쏟아지자 부풀어 있는 천의 면적이 더 늘어난 것도 같았다.
나는 긴장하며 천 아래에 억눌려 고통스러워 보이는 페니스로 손을 뻗었다.
천 위에 손이 닿자 하르텐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큭, 아가씨…….”
조금 더 용기를 내 천을 완전히 아래로 당기자 우뚝 솟아오르는 그것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기가 컸다.
원래, 이 정도였던가?
이론상의 지식뿐이던 내게는 조금 무서운 광경이었다.
이 큰 게 사람 몸에 들어온다고?
그게 가능해?
“원래 이렇게…, 큰 거야?”
무의식중에 불쑥 물음이 튀어나왔다.
당황한 탓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인식하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한 번뿐이긴 했지만 어쨌든 저 크기를 몸에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때의 아픔이 이제는 이해가 됐다.
금세 쾌락에 겨워 그에게 매달릴 수 있었다는 게 더 놀라울 정도로.
하르텐은 대답 대신 뭔가를 참아내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애매한 자극이 계속 가해져서 그의 인내가 닳아가는 중인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조급한 손길이 내 허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 손길의 의미를 모르는 척 그의 몸에 다시 신경을 기울였다.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쥐었다.
핏줄이 조금 서있는 그의 일부는 의외로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손바닥으로 가장 윗부분을 감싸서 문지르자 하르텐이 움칠 몸을 떨었다.
“아, 큿…….”
쾌감을 참아내려 이를 악무는 게 시야에 훤히 보였다.
나는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하르텐이 왜 그토록 나를 밀어붙였는지 이해하고 말았다.
내 손짓 아래 그가 쾌감을 느끼는 그 상황 자체가 나를 흥분시켰다.
천천히 액이 솟기 시작하는 구멍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조금 끈적끈적한 액체가 내 손짓에 따라 주변에 묻어났다.
하르텐이 짧게 신음하며 내 손을 저지했다.
“아가씨, 더 이상은…….”
내가 그의 몸에 심취해 있는 동안 그 모든 감각을 받아내던 하르텐은 어느새 눈이 살짝 풀려있었다.
조금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나를 저지한 하르텐이 한 손으로 급하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를 악무느라 힘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목울대에 핏줄이 서있었다.
나는 진득한 쿠퍼 액이 묻은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다 댔다.
하르텐의 눈이 놀란 듯 홉뜨였다.
“아가씨!”
깜짝 놀란 하르텐이 내 손을 잡아끌었으나 이미 액체의 일부를 삼킨 뒤였다.
짠맛이 혀끝에서 잠시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하르텐은 아연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얼굴이 다시 새빨개진 것도 같다.
“…이제, 이제 됐어요.
제가…….”
…아, 젠장.
억누르던 욕망이 터져버린 듯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짓씹듯이 욕설을 뱉어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그는 조급하게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금세 나를 침대에 눕힌 하르텐이 내 위를 점령하며 일그러진 얼굴로 속삭였다.
“못 참겠어요, 아가씨…….”
내 골반을 잡아 제게로 당긴 하르텐이 제 몸을 내게 부딪쳐 왔다.
아까까지 내 손 아래에서 농락당하던 그의 일부가 입구 근처를 문질러 오는 게 느껴졌다.
핏줄이 불거져 있는 기둥이 예민하게 부어오른 음핵을 느릿하게 자극하고 멀어졌다.
“혹시라도 아프면 말씀하세요.”
나를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는 눈을 하면서도 말만큼은 퍽 다정하다.
다정함과 흉포함 그 사이, 그 간격이 참으로 그다웠다.
나는 여유 없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웃어버리고 말았다.
저렇게 조급한 듯 굴어도, 못 참겠다는 듯 행동해도, 결국은 내 아픔에 전부 그만둬 버릴 그임을 안다.
몇 번의 문지름으로 미끈해진 기둥이 입구를 틀어막았다.
천천히 살을 밀어 올리는 감각이 나의 신경 대부분을 앗아갔다.
조금 간지럽기도 했던 손가락과는 비교되지 않는 굵기가 통로를 열어젖혔다.
“으응…, 읏.”
그는 그 순간에도 나를 배려하는 듯 느릿한 속도로 출입을 반복했다.
한번 밀어 올리고 조금 빠져나갔다가 다시 밀어 올리는 감각이 예민해진 신경계로 느껴졌다.
짧게 신음하는 나를 달래듯 하르텐이 손을 내려 음핵을 문질렀다.
눈앞으로 몇 개의 별이 튀었다.
나는 단단한 어깨에 손톱을 세우면서 고통과 쾌락을 감내했다.
찔걱, 소리를 내며 그의 몸이 다시금 뒤로 물러났다.
쾌락점 바로 근처를 짓누르고 빠져나가는 몸짓이 안타까워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하르텐이 짧게 신음하며 몸을 뒤로 더 물렸다.
달래듯 몸을 숙여 입 맞춰온다.
그 탓에 그의 몸이 조금 더 밀려들어 왔다.
천천히 다시 진입하기 시작한 그의 몸은 멈춤 없이 안으로 쭉 밀고 들어왔다.
동시에 혀로 비릿한 피 맛이 조금 났다.
“아응, 아아앙!”
아까 전의 안타까운 감각을 보상하듯 정확히 스팟을 짓눌러 온 그의 기둥이 눈앞이 번쩍거릴 정도의 쾌감을 일으켰다.
맞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마주한 그의 얼굴에는 미처 억누르지 못한 욕망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꽤 긴 시간이 걸렸던 삽입에 그의 인내가 닳아버린 듯 입술을 짓씹은 흔적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상처가 남은 입술을 매만졌다.
“뜨거워요.
여기, 느껴지세요?
다 들어왔어요.”
제 존재감을 알려주듯 잘게 움직인 그가 쾌락점 주변을 쿡쿡 찔렀다.
방금과 같은 극단적인 쾌감은 아니었으나 내내 부족하던 무언가를 채워주듯 충족감이 들었다.
그는 허리를 받쳐주던 손을 떼고 엉덩이를 쥐었다.
내 상태를 살피는 그의 눈 주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진 옷, 붉게 물든 눈가가 그를 퇴폐적이고 야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아, 아아……!”
아까처럼 천천히 페니스를 빼는 하르텐은 다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두꺼운 귀두가 입구에 걸려 멈추며 또 다른 쾌감을 일으켰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흐윽, 응!”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짓쳐 드는 몸짓에 자동적으로 입이 벌어졌다.
단어로 이루어지지 않을 소리들이 산발적으로 새어 나왔다.
감각이 신경계를 과부하시키다 못해 넘쳐흘렀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다.
발가락 끝이 곱아들며 쾌감이 나를 한 층 한 층 위로 밀어 올렸다.
그사이에 그가 몇 번이고 입술을 맞대어 왔으나 전부 숨이 차 헐떡이며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예뻐요, 아가씨.”
무자비하게 이어지는 쾌감과는 달리 달게 절어있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쾌감에 겨워 흘러내리는 눈물을 모조리 핥으며 다정스레 웃는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하르텐은 우는 얼굴이 취향인가?
“…딴생각인가요?
질투 나는데.”
잠시 생각이 옆길로 샌 걸 어찌 알았는지 그는 조금 더 거칠게 파고들었다.
방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이,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정확하게 쾌락점만 문질러 오는 감각.
눈앞에서 별이 터져나가며 머릿속이 과부하되어 가는데 그는 둔부를 다시 고쳐 쥐며 더 세게 안쪽을 파고들기만 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와 가장 내밀하게 맞대고 있는 부위에서 흐르는 액체가 마찰하는 살덩이와 내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