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흑단
“…그래서, 아직도 로즈 나이트와 하르텐 엔데버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못 알아냈다고?”
“제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도로테아궁에 로즈 나이트가 몇 번 방문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입궁 허가서에는 상단의 일로 사신단의 그레이 경을 만난다고 되어있었고요.”
“쓸모없는 것!
네가 왜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널 살려낸 값을 하란 말이야!”
악을 지르는 데이지 퀴니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 로브의 인물은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숙였다.
“존명.”
“당장 꺼져!”
로브의 인물이 방을 떠나도 데이지 퀴니의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데이지는 구석에서 제 눈치를 살피며 벌벌 떨고 있는 여자에게 손짓했다.
흰색과 검은색이 조화로운 메이드복을 입고 있던 소녀는 엉거주춤 데이지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나이트가의 사용인들은 아직도 소식이 없어?”
“벼, 병환 깊은 노모를 위해… 돈이 급한 사용인이 이, 있다고 합니다.
벌써 1년 치 월급을 당겨 받았고 추가로 더 신청할 예정이라고…….”
“사흘 내로 내 앞에 데려와.
뭐든 쓸 만한 정보를 물어와, 뭐든!”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여자가 덜덜 떨면서도 대답하곤 부리나케 도망쳤다.
데이지 퀴니가 방 안의 폭군이 된 이래로 로브의 인물과 시녀 롤랑은 매일같이 들볶이는 신세였다.
부디 이번에는 폭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길 바라며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 * *
“아가씨, 타린이 건의서를 제출했어요.”
“건의서?”
“타린은 나이 드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시녀예요.
어머니가 병에 걸려서 월급 대부분이 약값으로 빠져나간다네요.
벌써 1년 치 월급을 받아갔는데…, 또 약값이 부족해진 모양이에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가넷이 내미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건의서에는 세 달 치 월급을 선지급해 달라는 요구가 적혀있었다.
“무슨 병이시길래?”
“의원들도 알 수 없다고만 한대요.
병명도 모르고…, 그러다 보니 정확한 치료법도 모른다고 하고요.”
“신전은?
거기도 모른대?”
내 질문에 가넷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씁쓸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까지 번지고서야 내가 철없는 소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민들에게 신관들이란 너무 먼 존재예요, 아가씨.”
“…내 생각이 짧았어.
타린에게 이 서류는 반려되었다고 전해줘.”
“네?”
“닷새 후면 내 축복의 날이야.
그때 타린의 어머니를 모셔와서 신관님께 진료를 받아보자.
혹시 모르잖아.
아, 물론 타린이 다른 이유로 돈이 필요한 거라면 건의서를 다시 작성해 달라고 해줘.”
가넷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뿌듯함과 기쁨이 어린 얼굴에 나 역시 마주 웃었다.
가넷은 신이 난 얼굴로 반려 도장이 찍힌 서류를 들고 방을 나섰다.
“아, 가넷!
서류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이 서류 좀 아버지 집무실에 가져다줘.”
“앗, 알겠습니다, 아가씨!”
집무실 문 앞에서 다른 사람을 부르는 가넷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류 옆에 놓인 찻잔을 들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의원들도 병명을 모르는 병.
치료 약도, 낫는 방법도 모른다.
나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이 되고 싶은데.
중세와 근대가 미묘하게 섞인 지금의 시대 상황으로는 위생 관념조차 올바르지 않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는 것은 귀족들의 전유물이고 평민들은 일주일에 한 번 씻을까 말까 하는 게 현실이었다.
게다가 의원이라고 해봤자 집을 개조하여 응접실을 마련해 병을 진찰하는 데 불과하다.
병원의 청결에 많은 신경을 쏟는 현대와는 다르다.
고아원이 완전히 자리 잡고 나면 그런 느낌의 병원을 설립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 * *
똑똑똑.
“공녀님.”
“들어와.”
날카로운 목소리에 여전히 몸을 움츠린 롤랑이 발을 들였다.
그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몸을 엎드려 데이지 퀴니의 발치에 자리 잡았다.
“무슨 일이지?”
“회유 중이던 나이트가의 타린을 완벽히 끌어들였습니다.”
“…뭐?
정말이야?”
데이지 퀴니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몇 달 동안 공을 들였음에도 쉽사리 넘어오지 않아 속을 끓였던 상대였다.
드디어 마음을 돌리다니!
데이지 퀴니가 의자 손잡이를 꾹 쥐며 고개를 기울였다.
“자세히 말해.”
“나이트가에 세, 세 달 치 월급을 추가로 신청했으나 바, 반려라는 걸 당해서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아가씨가 미리 시, 심어두었던 도로시가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
“로즈 나이트의 저, 전속 시녀가 타린의 건의서를 반려…, 하는 이유를 도로시에게 설명했지만 저, 전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타린은 단순히 건의서가 반려되었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멍청한 것들.
뭐, 그 덕에 일이 쉽게 풀렸지만.”
만족스레 미소 지은 데이지 퀴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로즈 나이트를 한 방 먹일 수를 틀어쥘 수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언제나 고고하게 굴던 그 얼굴을 또 한 번 짓뭉갤 수 있는 기회.
헤일로 카르트도 충분히 좋은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시시해졌다.
끝의 끝까지 로즈 나이트를 고통스럽게 괴롭힐 것이다.
“내일 타린을 데려와.
보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하겠다고 전해.”
“네, 알겠습니다, 공녀님.”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롤랑에게 신경을 끈 그녀는 방금까지 보고 있던 드레스로 시선을 돌렸다.
메리안 백작가의 파티에 참석한다고 했던가.
꿀처럼 빛나는 그 금빛에 어울릴 만한 드레스는 이미 맞춰뒀으나 어째서인지 상대는 파트너 신청을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 곁에 서기만 하면 그를 제게 함락시킬 자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우선순위는 확실히 해야지.
“우선 로즈 나이트부터 처리하고…….”
눈엣가시가 돌아다니는 것만큼 신경 쓰이는 일이 없으니.
하르텐 엔데버는 그다음으로 미뤄도 괜찮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밤이었다.
* * *
“아가씨, 베로에게서 편지가 왔네요!”
“베로가?
나한테 온 거야?”
의아해하며 묻는 나에게 가넷이 냉큼 편지를 건네주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봉투에 적은 이름은 내 이름이 맞았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밀랍을 떼어냈다.
“베로가 갑자기 왜……?”
“아이 참, 당연히 아가씨가 좋아서 보내는 편지지요!
아가씨도 예전에 유모에게 써보셨잖아요?”
부끄러운 이야기에 볼이 붉어졌다.
아직 어렸던 어느 날 휴가를 내고 집에 돌아가는 유모에게 울며 매달리다 쓰게 된 편지였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고 어찌나 서러웠던지 집 안이 떠나가라 울었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 유모는 사탕과 초콜릿을 잔뜩 사 와 내 기분을 풀어주었었지.
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자 마찬가지로 그 전말을 알고 있는 가넷이 미소 지었다.
“그때 아가씨 이야기를 듣고 꼭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제가 전속 시녀가 될 줄은 몰랐지만!”
“정말 옛날이야기네.”
옛 기억의 향수로 편지를 펴는 손이 느릿해졌다.
그때는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라 내가 이토록 복잡한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는 줄 몰랐지.
알았더라도 뭐가 달라졌을까 싶긴 하지만.
“…뭐라고 써있어요?”
편지에 집중하는 나에게 가넷이 슬금슬금 다가오며 물었다.
베로의 편지 내용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귀여운 거, 예쁜 거에 사족을 못 쓰는 가넷의 특성상 겉봉투에 쓰여진 삐뚤삐뚤한 글씨만 보고도 흐물흐물 녹아내렸을 게 분명했다.
나는 마지막 마침표까지 읽어 내린 후 무의식중에 솟아오른 입꼬리를 문질렀다.
아이를 키우는 기분이 이런 걸까.
어째서 부모님들이 아이에게 약해지는지 알겠다고 생각하면서 편지를 내려놨다.
가넷이 금세 편지를 기웃댔다.
“읽어봐도 좋아.
네 얘기도 있어, 가넷.”
“앗, 정말요?”
반색한 가넷이 재빨리 편지를 집어 들었다.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용한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나도 내내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처음엔 가넷도 아닌 나에게 편지를 왜 보냈나 했더니 텐의 편지가 베로에게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레일라 아주머니에게 몰래 전해주면서 아무도 모르게 해달라고 했는데, 아이의 직감인 걸까 아니면 텐이 편지에 써둔 걸까?
…그러고 보니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네.
미리 좀 물어봐 둘걸.
“어쩜,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편지네요…….
아가씨의 어릴 적을 보는 것 같아요!”
“나?
난 그렇게 귀염성 있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릴 땐 내가 잘난 줄만 알았다.
망해가는 보석상 하나를 기지로 구해냈었고, 매일같이 붙어있던 모든 학자들이 내가 최고라며 떠받들어 주었으므로, 나는 점점 우물 속 개구리의 왕이 되어 살아갔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데뷔탕트 때였다.
그곳에는 나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나보다 고귀한 사람도, 유일한 자랑이었던 명석함조차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가득했다.
그곳에서 나는 처참하게 부서진 내 자만심을 그러모아 숨기기에 급급했다.
몇 안 되는 뼈아픈 경험 중 하나였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에 그 이후로 말수가 줄었지.
“아니에요, 아가씨는 정말정말 귀여우셨어요!
제가 본 아이들 중 제일로!”
“가넷이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렇지.”
무심하게 대답하자 가넷이 과하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하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편지도 읽어봤으니 나가봐도 좋아, 가넷.
답장은 나중에 쓸게.”
“네, 아가씨.
아 참, 다음 주에 고아원에 방문하실 예정이신가요?”
“응?
…그건 갑자기 왜?”
설마 벌써 들켰나 싶어 다시 되묻자 가넷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편지 마지막에 다음 주에 오실 거냐고 묻길래요.
다음 주는 원래 가는 날이 아니잖아요.”
“아…, 그냥 와달라는 의미가 아닐까?”
대충 애매모호한 말로 얼버무리자 가넷은 나름대로 수긍한 듯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나는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주에는 텐과 토네이도에 방문하기로 했다.
토네이도의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내가 제안한 것이다.
로한에 오자마자 고아원 소식을 들어 걱정되지는 않지만 못 본 지 꽤 오래되었으니 그리울 만도 했다.
그래서 어제 텐의 편지를 고아원으로 대신 보내주었고 다음 주에 가겠다는 약속도 잡아뒀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켜서 좋을 게 없으니 비밀리에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벌써 가넷에게 들킬 뻔했다.
물론 가넷이 나를 배신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비밀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지 않은가.
“로브를 미리 구해놔야겠네.”
하르텐의 키에 맞추려면 길이가 긴 로브를 따로 구해야 할 것이다.
여성용으로 가려질 만한 키가 아니니.
내일 상단에 나가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깃펜을 들었다.
* * *
“…아가씨, 타린이 도착했습니다.”
“이 방으로 데려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했지?”
“마차에 태울 때부터 눈을 가리고 있었고 별장 주변을 멀리 둘러서 왔습니다.”
“좋아.
호칭 조심하고, 데려와.”
단호한 명령에 여자는 깊게 고개를 숙인 뒤 뒷걸음질로 방에서 나갔다.
데이지 퀴니는 곧 들어올 타린을 기다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타린을 데이지의 맞은편에 앉혀놓고 방을 떠났다.
“여, 여긴 어디죠……?”
“알 것 없어.
네가 준비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곱게 돌려보내 줄 테니.
아 참, 이야기가 얼마나 쓸모 있느냐에 따라 보수가 달라질 거야.”
“아, 저, 저는…….”
타린은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나이트가의 시, 시녀입니다.
일한 지는 9년이 되었어요…….”
“나이트가의 비밀, 아는 대로 다 털어놔.”
조급해진 데이지가 닦달하자 타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택의 본관 2층, 가장 구석진 곳의 항아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면 창고로 갈 수 있는 문이 열린다고 했습니다.
차, 창고에는…….”
“누구의 창고지?”
“첫째 도련님의 창고라고 들었…….”
“됐어.
그거 말고 다른 거.”
“그, 그러면…….”
타린은 더듬대며 여러 이야깃거리를 풀어놓았으나 데이지의 성에 차지 않는 잡소리에 불과했다.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던 데이지 퀴니가 참지 못하고 의자를 내리치려던 순간, 타린의 소심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로, 로즈 아가씨에게는…, 클로버가 있었습니다.”
솟구치던 그녀의 화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타린이 꺼내려는 인물이 누구인지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2년 전, 헤일로 카르트와 참석한 샴록에서 마주쳤던 은안의 클로버.
저보다 깨끗한 색의 눈을 가지고 있어 탐냈던 물건이었다.
지금은 더 좋은 대체제가 생겨서 흥미가 떨어졌지만.
“그 클로버는…, 어째서인지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모습을 보는 게 허락되었던 사람은 대부분 나이트가에 10년 이상 근무한 이들뿐이었지요.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처럼요.”
데이지 퀴니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눈이 가려진 타린은 알지 못했으나 방구석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로브의 인물은 데이지 퀴니가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 클로버를 만나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어 보니 꿀과 같은 금발에 신비로운 은안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덜미에 점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금발에 은안, 그리고 점?”
“네.
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들 ‘천사의 실수’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흰 도자기에 새겨진 얼룩 같다고…….”
데이지 퀴니는 그 순간 며칠 전 파티에서 만났던 엔데버의 황자를 떠올렸다.
금발 머리에 은안을 가지고 있던 황자.
알 수 없는 친분으로 로즈 나이트를 연회에 대동하고 나타났었지.
파트너를 신청하는 내 편지는 전부 다 무시하고서!
편지에 뿌려진 ‘미혹의 향수’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녀는 재빨리 향수의 발동 조건을 떠올려 보았다.
향수가 무효화되는 조건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되도록 몇 번의 개량을 거쳐 탄생한 향수였으므로.
그녀는 그 조건들을 세 번쯤 떠올리고 나서야 확신했다.
‘틀림없어.
엔데버의 황자에게 향수가 통하지 않았던 것은 황자와 로즈 나이트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기 때문이야.’
그게 맞다면 황자가 여태껏 제게 빠지지 않은 게 이해되었다.
연회 날에는 조급한 마음에 직접 접근까지 했는데도 통하지 않아 조마조마했는데.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향수를 맡았음에도 통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마지막 조건이 거의 확실했다.
가장 까다롭고도 가장 중요한 조건.
‘서로를 마음에 품은 상대가 같은 공간에 있을 때는 미혹이 통하지 않는다.’
…이거 재밌게 됐는걸.
데이지는 포식한 사자처럼 웃었다.
“괜찮은 이야기네.
그거 말고 더 있어?”
“아, 아뇨.”
데이지 퀴니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를 두 번 쳤다.
뒤에 서있던 로브의 사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너, 다음에 또 돈이 필요하면 정보를 가져와.”
“네?
아, 네!
그럴게요!”
“보수는 곧 가져다주지.
나가있어.”
타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얼굴을 힐긋 바라본 데이지의 얼굴에 경멸이 어렸다.
늙어 죽어가는 어미 따위를 살리려 애쓰다니.
어미가 기적적으로 살아난대도 그녀의 인생에는 하등 쓸모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데이지는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찌 되었든 그 점이 나를 도왔으니 부러 티를 낼 필요는 없지.
로즈 나이트를 완벽하게 무너뜨리기 전까지는 필요할지도 모르니.
안내를 받으며 방을 나서는 타린에게 신경을 끈 데이지 퀴니는 고개를 기울이며 무엇을 보상으로 줄까 생각에 잠겼다.
다음에도 이곳으로 달려오고 싶을 만큼 두둑한 보상이 좋을 것이다.
저만한 경력의 시녀를 다시 매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
게다가 시녀가 물어온 정보가 생각보다 쓸 만해 보인 탓에 너그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온 롤랑을 불렀다.
“롤랑, 보석 상자를 가져와.”
롤랑은 한 치의 의문도 품지 않고 명령을 수행하러 떠났다.
그것은 데이지가 공포로 새겨 넣은 복종심 때문이었다.
롤랑은 채찍을 든 주인의 악귀 같은 얼굴을 떠올리며 발을 재게 놀렸다.
“헉, 허억, 가, 가져왔…습니다.”
숨이 차 헐떡거리는 롤랑이 데이지에게 보석 상자를 건넸다.
데이지는 상자를 열고 이리저리 뒤적이며 고민에 빠졌다.
데이지에게는 두 개의 보석함이 있었다.
지금 데이지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두 번째 보석함으로, 제 취향에 맞지 않거나 값싼 보석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따로 모아두는 함이었다.
공녀로 태어나 단 한 번도 금화를 쥐어본 적 없는 그녀가 제시할 수 있는 보상은 보석뿐이었기 때문에 공작저를 나서며 챙겨왔던 것이었다.
“아, 이게 좋겠네.”
“…….”
“나이트가의 상단이 고객을 대상으로 보냈던 에메랄드 귀걸이.”
그 로즈 나이트의 가문에서 보낸 거라 보석함에 처박아 두고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게다가 일정 금액 이상 사용한 고객 모두에게 보내다 보니 세공이 비슷비슷하다는 단점도 있었고.
받은 이래로 한 번도 끼지 않고 넣어만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나이트 가문을 배신한 시녀가 나이트 가문의 선물을 보상으로 받다니, 재밌는 광경이지 않아?”
데이지 퀴니다운 발상이라고 로브의 인물, 로커스는 속으로 생각했으나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의 주인은 분명 그 말을 달가워하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보수로 전해줘, 롤랑.
그리고 다시 마차에 태워서 보내주도록 해.”
“네, 아가씨.”
데이지의 명령에 복종한 롤랑은 금세 자리를 비웠다.
데이지가 시킨 대로 타린을 마차에 태우러 간 것이 분명했다.
로커스가 착잡한 얼굴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을 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데이지가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란 건?”
“말씀하신 ‘미혹의 향수’를 더 만들었습니다.
화장대 왼쪽 서랍장 안에 넣어두겠습니다.”
“좋아.
그만 가봐.”
데이지 퀴니의 축객령에 로커스는 더 깊이 고개를 한 번 숙인 후 빛무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잔상조차 남지 않은 공간을 바라보는 데이지의 얼굴에 희열이 맺혔다.
로즈 나이트를 깎아내리고 엔데버의 황자를 손에 쥘 수 있는 정보를 얻었다.
벌써부터 모든 게 제 발 아래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일의 파티가 기다려졌다.
* * *
“블라세 로한 황태자 저하와 데이지 퀴니 공녀님 입장하십니다!”
쩌렁쩌렁한 시종의 목소리가 울리자 파티장 안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엔 비슷한 색감의 옷을 맞춰 입은 황태자와 데이지가 입장하고 있었다.
황태자와 데이지가 계단을 내려와 연회장에 입장하자 그 근처에 서있는 이들부터 하나둘 예를 차리기 시작했다.
나까지 예를 취하고 나자 연회장에서 유일하게 목을 세우고 있는 것은 황태자와 텐뿐이었다.
그 모습이 시선을 끌었는지 황태자가 텐을 향해 다가왔다.
텐은 주눅 들지 않은 태도로 시선을 맞받아쳤다.
“오랜만이군요, 하르텐 황자.”
“블라세 황태자.”
황태자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텐이 응대했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퍼져나가며 귀족들이 하나둘씩 예를 거두기 시작했다.
나도 적당한 텀을 둔 뒤에 고개를 들었다.
“나이트 영애,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황태자의 파트너 자리에 서있던 데이지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순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다정한 영애의 탈을 쓰고 있는 그녀를 응시하던 나도 그 인사를 맞받아쳤다.
“이리 인사 나눈 것은 오래되었죠?”
누가 봐도 사랑스러울 정도로 볼에 홍조를 띤 그녀가 상냥하게 속삭였다.
고개를 기울이는 각도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완벽했다.
“황태자 저하와 황자 저하께서 담소를 나누고 계시니 우리 둘도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어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그 이면에 무슨 꿍꿍이가 있나 의심부터 생길 정도로.
애써 억누르고 있던 경계심이 금세 몸을 키워 그녀와 나 사이에 벽을 세웠다.
나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으나, 견고한 가면처럼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얼굴은 조그만 틈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지요.”
결국 거절할 빌미를 찾지 못한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귀족들이 적지 않은 데다가, 상황조차도 그녀에게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근처의 테라스에 발을 들였다.
“걸어오는 내내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있더군요.”
“……?”
테라스 문을 닫다 말고 데이지 퀴니가 입을 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엔데버의 황자, 그가 나에게 저지른 무례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일국의 황자가 예의를 배우지 못한 건지.”
무슨 의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노골적으로 텐을 모독하는 언행에 내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데이지 퀴니가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클로버일 적의 기억을 잊지 못한 건지.”
“……!”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치고 가는 느낌이었다.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가고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입 안쪽 살을 깨물어 가며 표정을 숨겼다.
겨우 이성을 되찾았을 땐 데이지 퀴니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애쓰는군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그게 진실인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고 있을 텐데.”
“…….”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것과, 진실을 진실로 만드는 것 중 뭐가 더 쉬울 거라 생각해요?”
방금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속삭이던 목소리는 금세 독기를 드러내고 내 귓가에 쑤셔 박혔다.
맹렬한 증오를 감출 생각도 없는 데이지 퀴니가 이를 드러낸 독사처럼 나를 위협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발뺌할 생각 말아요.
이미 다 알고 왔으니까.
…아니면 뭐, 나이트가에 고용된 시중인들 아무나 붙잡아 고문해 보면 되지 않겠어요?”
“……!”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고문, 내 가족 같은 이들이 고문당한다고?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내가 입 다물길 원해요?”
“…….”
“그렇다면 좋은 말로 할 때 내 눈앞에서 꺼지는 게 좋을 거예요.
옛날처럼 사람을 무서워하면서 도망쳐 다녀요.
네가 내 눈에 띌 때마다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으니까.”
선명한 악의가 폭언과 함께 쏟아졌다.
나는 나를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토록 나를 증오하죠?”
그 순간 금방이라도 대답할 것 같던 데이지 퀴니가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선명했던 적의는 어딜 가고 초점 흐린 눈이 내 얼굴을 응시했다.
한참 조용하던 데이지 퀴니가 문득 대답했다.
“…너의 존재.”
“…….”
“너의 존재 자체가 나를 불행하게 했어.”
아까 전의 흐릿한 시선을 벗어던진 데이지 퀴니는 다시금 적의를 내보이고 있었다.
본인의 목표가 오로지 그것인 양.
“…그래서, 나를 괴롭히려고요?”
“하, 물론이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너의 약혼자에게 왜 관심을 뒀겠어?”
“…….”
“헤일로 카르트를 내 곁에 두지 않아도, 황태자비가 되어 너를 내 발아래에 둘 수 있을 텐데.”
마찬가지로 충격적인 이야기이긴 했으나 앞선 충격이 너무 강했던지라 비교적 담담하게 넘길 수 있었다.
헤일로 카르트와 관련된 옛 기억은 이제 나와 아무 상관 없으므로.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는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면 저를 이용하셨다는 소리로군요, 데이지 퀴니 영애.”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을 한 채 나타난 것은 헤일로 카르트였다.
그는 테라스가 반쯤 가린 구석진 정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사람이 있을 거라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법한 곳이었다.
“…….”
당황한 데이지 퀴니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마찬가지로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나의 시선이 데이지 퀴니를 떠나 그에게 닿았다.
그는 우리 두 사람의 반응을 무감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훑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서리가 끼는 듯했다.
“카, 카르트 영식, 이건…, 방금 이야기는…….”
데이지 퀴니가 수습하려 입을 열었으나 헤일로 카르트는 과하게 단호한 어투로 그 말을 막아섰다.
데이지 퀴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 이해한다며 나설 줄 알았는데 의아할 정도로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원작대로라면 분명 데이지 퀴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헤일로 카르트는 이런 식으로 데이지 퀴니의 시선을 끌게 된 걸 기꺼워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따지자면…….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이는군요.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퀴니 영애.”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한 반응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관계의 단절을 통보한 헤일로 카르트는 여전히 무심해 보이는 시선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나이트 영애,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나는 잠시 의아해져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와 도움이라는 단어가 너무 어울리지 않았던 탓에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생각해 보니 지금 나는 데이지 퀴니에게 협박당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대화 내내 나를 향한 적의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보기에 나는 피해자였을 것이다.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나와 데이지 퀴니의 문제다.
그 곁가지에 헤일로 카르트와 하르텐 엔데버라는 존재가 있었을지언정 뿌리는 나와 데이지 퀴니가 유일했다.
과거의 나는 그걸 몰라서 텐을 끌어들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풋 미소 지으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헤일로 카르트에게 다시 확답했다.
“제가 영식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나는 오히려 그의 등장이 너무 절묘해서 데이지 퀴니가 판 함정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나를 궁지로 몰아 헤일로 카르트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놓고 뒤통수를 때리려는 심산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의심이 갈 정도로 완벽한 상황이 아닌가, 나를 휘두르기 위한.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데이지 퀴니는 이유조차 모호한 적의를 위해서 헤일로 카르트에 이어 하르텐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다.
내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기 위해 나를 억누르며 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데이지 퀴니는 반항하지 못하는 나를 비웃듯이 또 다른 무기를 집어 든 것이다.
나는 내 방식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카르트 영식,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시간을 좀 내주시겠어요?”
“…지금 당장은 영애와 나눌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은은한 미소와 함께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 해야 할 일이 여럿 생각났지만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달콤한 목소리로 달래려는 데이지 퀴니와 완강하게 버티는 헤일로 카르트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그럼 먼저 실례하도록 하죠.”
끝내 헤일로를 설득하지 못한 데이지가 입술을 질근 물며 자리를 비웠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례 없는 낭패스러운 기색이 깔려있었다.
나는 이 상황이 함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하기로 했다.
“…카르트 영식,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내가 먼저 말을 붙이자 헤일로가 즉시 반응했다.
아까 단호하게 거절당했던 사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변화가 찜찜했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이곳에서 소리를 높인 제 잘못도 분명 있지만, 기척이 없었던 영식의 잘못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영식은 대화의 어느 부분부터 들었나요?”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들은 부분은 퀴니 영애가 저를 이용했다는 그 부분뿐입니다.
그 전의 대화 내용은 맹세컨대, 듣지 못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히 입꼬리는 매끄럽게 움직여 꽤 그럴듯한 미소를 완성했다.
귀부인들을 보고 배운 ‘이상한 걸 눈치챘지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시치미 떼는 얼굴’이었다.
“…….”
“그렇다면야 영식과 제가 더 나눌 이야기는 없는 것 같네요.”
헤일로 카르트는 정말 그 이상 아는 건 없는 듯했다.
당혹스러운 기색이 더 짙어지긴 했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정말 티끌만큼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쪽은 경계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영식.”
나는 마지막 예의를 다해 그에게 인사하고 테라스 문을 열었다.
헤일로 카르트는 정리된 것 같으니 다음은 데이지 퀴니다.
물론 이쪽은 직접 찾아가서 정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직접적인 타격이 있을 텐을 찾아가서 상황을 알리는 게 먼저였다.
테라스를 벗어난 발걸음이 목적지를 정했다.
중간에 록사나를 마주쳤지만 텐을 만나는 게 더 급했기 때문에 짧은 손 인사만 남기고 발을 재촉했다.
“황자 저하, 여기 계셨군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주변의 귀족들이 호의적으로 나를 맞아주며 대화를 이어나갔으나 텐은 피곤하다는 말로 그들에게서 벗어났다.
잠시 후 우리는 휴게실이 늘어진 복도를 함께 걸었다.
“이야기는…….”
“덕분에 잘 나눴습니다, 저하.”
아직 연회장의 음악이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내 부드러운 거절을 읽어낸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괜찮나요?”
휴게실 문이 닫히자 복도를 울리던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방음은 확실하군.
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발코니의 커튼을 친 후 고개를 저었다.
“아뇨, 황자 저하.
이제부턴 더 이상 괜찮지 않을 거예요.”
“…주변엔 아무도 없어요.”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이건 내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갑작스럽게 벽을 세우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의 눈동자가 짙은 색으로 가라앉았다.
“데이지 퀴니가 황자 저하의 예전 신분을 알아냈어요.
어디서부터 정보가 새어나간 건지 모르니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예전 신분을, 공녀가 어떻게?”
그가 미간 사이를 좁히며 턱을 두드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정보가 샐 만한 구석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일 테다.
나는 차분히 테라스에서 데이지 퀴니와 나눴던 이야기를 전했다.
“데이지 퀴니 공녀가 아가씨를 탐탁잖게 여긴다곤 생각했지만,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군요.”
헤일로 카르트와 나의 파혼에 대한 뒷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헤일로 카르트가 데이지 퀴니에게 안녕을 고했다는 이야기에서는 짧은 비소가 그의 입가를 스쳐갔다.
“데이지 퀴니가 그 정보를 쥐자마자 저를 겁박해 온 것만 봐도 그녀의 목적은 확실해요.”
“…확실히 그렇죠.”
“그러니 앞으로는 저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됩니다.”
예상대로 텐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차갑게 식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아뇨, 그래야만 해요.”
나 역시 단칼에 그의 부정을 쳐냈다.
냉랭한 말투에 잠시 멈칫한 그였지만 넘어가 주진 않았다.
타협할 의사가 없는 우리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런다고 해서 데이지 퀴니에게 약점 잡힌 사실이 없어지진 않아요.
결국 데이지 퀴니가 살아있는 한 계속 위협이 될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그녀를 자극하는 게 옳진 않죠.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뿐이니 이 상황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는 수긍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의 말도 틀리지 않다.
만약 데이지 퀴니가 약점을 잡은 상대가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그랬겠지.
그러나 텐은 다르다.
“황자 저하가 잠시만 시간을 벌면 충분히 수습할 수 있어요, 예정대로라면.”
“…….”
그는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것 같았다.
내가 함부로 입에 올려선 안 되는 주제지만, 역설적으로 내가 아니면 쉽게 하지 못할 말이었다.
“…머지않은 이야기죠.
타국의 황족까지는 추문에 휩싸이게 할 수 있겠지만,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분에게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니...
그가 황태자만 되더라도 데이지 퀴니의 입을 틀어막을 수단이 생긴다.
적어도 다음 대 황제가 될 거란 보장만 있다면.
“…그게 아가씨의 곁을 벗어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이트가는 이미 황자 저하를 돕고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제가 아닌 다른 귀족들을 포섭해야지요.”
황족이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이끌어 내는 방법 중 가장 쉬운 방법은 결혼이다.
텐은 엔데버의 유일한 직계 혈통이니 그와 결혼한다면 황후, 못해도 황비의 자리는 차지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엔데버의 황제는 텐을 완벽하게 비호하지 않는다.
엔데버의 귀족들이 황제의 눈치를 보며 텐에게 먼저 손 내밀 일이 많지 않을 거란 뜻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로한에서 세가 강한 외척을 얻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텐은 전의를 잃은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도 알 것이다.
이게 가장 좋은 선택지라는 것을.
그 과정을 그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높은 확률로 그럴 테지만, 최선책과 차선책도 아닌 최선책과 차악책이 주어진 상황이라면 선택지의 필요성은 모호해진다.
결국 그는 최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에게는 부러 호의를 보이실 필요 없어요.
아니, 오히려 관련 없는 사람처럼 대해주시면 더 좋아요.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 까지요?”
그의 온몸으로 음울한 기색이 퍼졌다.
나를 응시하는 눈은 여러 가지 감정을 담고 떨리고 있었다.
나는 심장을 따끔하게 찌르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 저하께서 어떤 방법을 떠올리시든 이보다 안정적인 방법은 없을 거예요.”
데이지 퀴니를 만난 이후부터 계획을 다듬었다.
단순하게 정리해서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라는 거지, 실제로 따져보면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방법을 선택했다, 일부러.
“…다른 이들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쓴다고들 하죠.”
“…….”
“그러나 황자 저하, 잃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효율과 타협해야 하는 법이에요.”
도박은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의 수단이다.
그들보다 더 절박한 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의 흐릿한 시선이 내 얼굴을 배회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초점을 잃은 눈이 내 얼굴을 더듬거리더니 이내 바닥을 향했다.
“저더러 아가씨의 존재를 두고 양보하라고 하시는 거군요.”
“…저는 도박이 싫으니까요.”
“그렇다면 저는 아가씨를 잃고 무엇을 얻는 건가요?”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눈동자는 여전히 싸늘하게 식어 일말의 웃음기조차 없었다.
나는 그의 눈이 그의 진심임을 알아챘다.
그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심장을 쑤셔대던 감각이 점점 더 심해졌다.
“…가장 고귀한 자리를 얻을 거예요.”
고작 나 하나만 버리면 엔데버 제국을 그의 손에 쥘 수 있을 텐데.
그는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올곧게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