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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검은 장미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둑했던 사위는 어느새 환하게 밝아있었다.
내리쬐는 아침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셨다.
이런 식으로 허비할 시간이 아니었는데.
하르텐은 소파에 늘어졌던 몸을 일으키며 자신을 책망했다.
새벽달이 지는 것을 보며 잠시 쉴 요량으로 소파에 앉았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잠잘 시간도 아까워 밤새워 처리하던 서류 더미가 여전히 책상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해가 뜰 때까지 다 처리하지 못했으니 오늘은 정말 잠도 못 자고 일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렸다.
책상은 새벽에 내팽개친 그대로였다.
대충 내려놓았던 만년필은 잉크가 굳은 채 서류 위를 뒹굴고 있었고, 잠을 깨려 마시고 있던 차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는 환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등지고 자리에 앉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그레이가 오늘 치 서류를 들고 오기 전에 하나라도 더 처리해야만 했다.
엔데버 황실의 예산안, 황족들의 품위 유지비 내역, 귀족들의 세금 징수서까지, 그레이가에서 보내온 서류답게 대부분 자본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서류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 내리다가 그 사이에 파묻혀 있던 나이트 상단의 분기별 매출표를 발견했다.
그는 읽고 있던 서류들을 다 제쳐놓고 그 서류를 집어 올렸다.
우아한 글씨체로 이런저런 숫자들을 늘어놓은 그 서류는 분명 그의 아가씨가 작성한 문서임이 틀림없었다.
하르텐은 로즈를 떠올리며 서류 모서리를 애틋하게 만지작거렸다.
‘저는 도박 따윈 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단호한 눈을 하고서 그렇게 말했다.
그 어떤 위험조차 무릅쓰지 않겠노라고, 가장 안정적인 방법을 찾아서 그 방법대로만 실행하겠노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단단하게 세워진 벽처럼 그가 감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마치 이미 한 번 실패해 본 사람처럼.
그의 아가씨는 안정적인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확률을 건 도박, 혹시 모를 기적 같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자신이 확실히 해낼 수 있는 일에 더욱 집중했다.
요령보다는 노력이라는 단어가 더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시도한 첫 일탈이 그였다.
그를 나이트가에 들이는 것.
물론 그녀는 데이지 퀴니를 향한 복수심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가 보기에 로즈는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그를 이용하겠다 선언해 놓고도 단 한 번도 그를 도구처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하르텐은 클로버도, 복수할 수단도 아닌 그저 하르텐일 뿐이었다.
그의 존재가 그녀에게 유일하다는 확신은 이때껏 그를 받쳐오던 원동력이었다.
그는 그녀의 선택을 받았고, 그리하여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런 존재는 그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녀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 사실은 언제나 상처 입은 그의 위안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그런 존재가 저 하나뿐이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의 곁을 떠나는 일을 기꺼이 감수했으니까.
그녀를 온전히 제게 옭아맬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다른 놈들이 그 옆자리를 탐내지 못하게.
그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햇살이 그의 등을 향해 내리쬐고 있었다.
* * *
“오늘이 축복의 날이었던가?
그렇지, 가넷?”
“네, 아가씨.
사제님께서 오후 3시에 저택으로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나는 시계를 흘긋 살폈다.
배가 좀 고프다 생각했는데 벌써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나는 남은 서류를 한 번, 텅 빈 다과 접시를 한 번 보고는 점심시간을 앞당기기로 했다.
“가넷, 타린에게는 오늘인 거 말해뒀어?”
“앗, 아니요.
타린에게는 아직 전하지 않았어요.”
“그럼 타린한테 얘기하고 마차를 붙여줘.
어머님이 아프다고 하니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고.”
가넷의 입가에 예의 그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쑥스러워 얼른 가넷을 집무실에서 쫓아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내 예상에 맞게 가넷은 금방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넷의 옆에는 어딘지 초조해 보이는 기색의 타린이 어깨를 떨며 서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 타린은 사제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가씨께 급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얼굴의 가넷이 타린을 바라봤다.
나와 가넷의 시선을 받은 타린은 불안정해 보이는 얼굴로 시선을 여기저기 두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무슨 일이지?”
“아, 아가씨…….”
정말로 당황스럽게도, 긴장한 듯 움츠러들어 있던 타린이 울음을 터트렸다.
서럽게 우는 그녀를 위해 가넷이 재빨리 손수건을 꺼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괜찮니?
타린, 대체 무슨 일이야?”
그녀는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지만 훌쩍거림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슬퍼서 울음을 터트렸다고 하기보단 공포와 두려움에 질식된 감정이 순간적으로 터진 것 같았다.
나와 가넷은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한 채로 타린은 더듬더듬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중간중간 목이 멘 듯 이야기가 끊어지기도 했지만 10분에 걸쳐서 그녀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누군가 내 뒤를 캐고 있다는 뜻이네?”
“네, 네…….
아가씨의 이야기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었고, 대가라며 보석도 주었어요.”
그녀는 천으로 돌돌 싼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꾸러미를 풀어 헤치자 에메랄드 귀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귀걸이를 자세히 살피다가 그 모양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넷, 내 방에 가서 에메랄드 장신구함을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가넷이 옆을 비우자 타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어디 한 군데에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동공을 움직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그녀는 나를 배신했다.
그리 생각하니 속 깊은 곳에서 왈칵 감정이 끓어올랐으나 어떻게 보면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스파이의 함정에 빠져 그런 선택을 했으니까.
게다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도 아니고, 아픈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서라는 사정도 있었다.
그 모든 게 그녀의 면죄부는 되지 않지만 정상 참작해 줄 정도는 됐다.
“타린, 지금 저택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뭐지?”
“저, 저는, 손님방을 청소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타린이 저택에서 일한 햇수는 적지 않다.
손님방 청소라면 연차에 맞는 쉬운 일에 속했다.
“타린, 넌 영지로 내려가 하녀 일부터 시작하도록 해.”
타린을 지금 당장 쫓아낼 순 없었다.
그녀의 사정상 지금 쫓아내면 다시 돈이 필요해질 테고, 그럼 데이지 퀴니의 접근을 더 쉽게 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저택의 중책을 맡기는 것도 좋지 못한 생각이었다.
내 처분을 들은 타린은 고개를 숙이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월급은 지금의 반으로 줄이겠어.
대신 약값이 부족해서 월급을 추가로 신청하게 되면 그 서류는 받아줄게.
사제님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도 해줄 거야.”
하지만 예전의 상태로 다시 복귀되진 않을 것이다.
이때까지 일했던 시간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지금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내가 용서할 때까지 영지에서 함부로 나올 수 없어.
그만두는 것도 안 돼.
이해했어?”
“그, 그럴게요.
그러겠습니다!
감사해요, 아가씨.
감사합니다…….”
내가 그녀에게 베풀 수 있는 연민과 동정은 여기에 모두 쏟아부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신뢰하지 못할 것이고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가 충분히 죗값을 치를 때까지는.
그녀의 자유를 꽤 억압하는 처사였음에도 타린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눈물 젖은 얼굴에는 미안함과 죄책감, 감사함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타린을 내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넷이 돌아왔다.
에메랄드와 아쿠아마린 장신구만 담아둔 함을 손에 든 가넷이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에메랄드 귀걸이만 전부 꺼내줘.”
“네, 아가씨.”
에메랄드와 아쿠아마린만 담아뒀던 탓에 함 내의 장신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넷은 금방 에메랄드가 달린 장신구만 골라냈고, 그중 얼마 없는 귀걸이를 또 골라냈다.
내 앞에 놓인 에메랄드 귀걸이는 세 점뿐이었다.
“…이거네.”
가넷이 두 번째로 골라낸 귀걸이는 방금까지 내가 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와 똑같았다.
상단의 VIP 고객에게 보냈던 에메랄드 귀걸이였다.
“내가 보낸 선물을 이런 식으로 써먹었다고?”
의도했든 아니든 꽤 악질적인 행태임이 틀림없었다.
주인을 배신한 시녀에게 주인의 물건을 대가로 주다니.
내내 침착했던 나조차도 순간적으로 열이 뻗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데이지 퀴니가 이것을 보수로 내리며 느꼈을 저열한 만족감은 구역질 나지만, 이게 내 손으로 들어왔으니 그 정도는 넘겨줄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예상치 못했으리라.
이 선물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이 선물이 어떤 식으로 저 자신의 목을 조를지.
“가넷, 도로시를 체포해.”
“네!”
“지하 감옥에 가둬야…….
아,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알아서 해주실 거야.”
가넷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똑같은 빛깔을 띤, 그러나 미묘하게 세공이 다른 두 쌍의 귀걸이를 손에 쥐었다.
몇 년 전 망해가던 보석상을 살렸던 내 의견은 보석 꽃다발을 만드는 것이었다.
금으로 줄기와 꽃받침을 만들고 세공이 된 보석들을 꽃받침에 끼워 만든 보석 꽃다발은 하나 만드는 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꽃다발을 만드는 데 필요한 꽃잎의 수가 적지 않아 세공에 시간이 많이 들기도 했지만 꽃받침과 보석을 동시에 작업해야만 보석의 세공이 망가지지 않도록 끼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보석 꽃다발을 이루는 보석들을 고객들에게 나누어 줬다가 기념 파티를 열어 한꺼번에 모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기념 파티에 참가하는 고객들을 만족시킬 만한 구경거리가 필요했고 보석 꽃다발은 나이트 상단의 대표 제품이었으므로.
장난스럽게 제의했던 이 의견은 의외로 많은 이들의 찬성을 얻었고, 최고 결정권자인 아버지가 직접 세공사를 수배해 오기까지 해서 진행된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전해줘.
오늘 점심 식사를 함께하는 것도 좋겠어.”
계획의 일부분을 수정해야 할 듯싶었다.
데이지 퀴니를 한 방 먹일 기회가 생겼으니 충분히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준비 다 됐어, 가넷?”
“네, 아쉽지만 우유는 다음에 챙겨야 할 것 같아요.
낮 시장이 닫혀서 더 이상 구할 수가 없네요.”
벌써 오후 5시였다.
시장에서 원하는 물건을 다 구하기엔 때가 지난 시간이었다.
구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더 늦으면 시간 맞춰 도착하지 못할 터다.
“지금 출발해도 저녁 시간이야.
아쉽지만 그건 포기하자.”
“네!
아예 못 구한 건 아니니까요.”
짐을 실은 마차가 토네이도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와 가넷은 마주 보고 앉아 창밖의 풍경을 지켜봤다.
느린 속도로 지나가는 풍경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어지럽기만 한 내 마음과는 다르게.
내일 텐이 토네이도에 들를 것이다.
그의 일정상 비는 시간이 내일뿐이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그와 함께였겠지만…….
텐에게 선을 그은 게 불과 저번 주였다.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했는데, 그를 다시 마주할 용기가 있을 리 없었다.
오늘만 해도 아버지의 부탁만 아니었으면 가지 않았을 거였다.
“노을이 지고 있네요.
곧 어두워지겠어요.”
“…그러게.
호위 기사들과 같이 오길 잘했어.
밤이 어두우면 위험할 테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며칠 새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죄책감이 토네이도에 가까워질수록 나를 더 압박했다.
나는 가볍게 차려입은 원피스 자락을 정리하며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마차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레일라였다.
텐이라는 장성한 아들을 뒀을 거라곤 짐작하기 힘든 고아한 얼굴이 반가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선 나는 곧바로 레일라의 손을 맞잡았다.
“밤이라 추운데 언제부터 나와 계셨어요?
손이 차요.”
“혹시라도 길을 잃으실까 염려되어서요.
나이가 드니 걱정만 늘어서.”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 다정했다.
우리는 반갑게 웃으며 짐을 하나씩 들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우리의 그림자가 노을을 만드는 태양 빛에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가 닿은 마당에는 아이들이 놀다가 던져둔 장난감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흐뭇한 시선으로 마당과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모래 놀이터를 훑어보고 있으니 레일라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요즘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는 연습을 하더군요.
어쩜 그리 재밌어하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논답니다.”
뿌듯함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해변 도시에서부터 이곳까지 입자 고운 모래를 옮기느라 든 수백 골드가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모래 놀이터를 만든 것은 최근이었다.
매일 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다쳐 오는 날이 잦아져 그 해결책으로 나온 게 놀이터였다.
정확히는 ‘마당에서 놀 곳’이라는 토라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놀이터로 발전시킨 것이지만.
내 기억을 기반으로 시소나 철봉, 그네 같은 것만 겨우 재현해 낸 공간이었지만 입자 고운 백사장의 모래 덕에 놀이터는 꽤 그럴듯해졌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레일라.”
“이미 충분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니 장담드릴 수가 없네요.”
토네이도를 바라보는 레일라의 얼굴엔 애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어렵게만 대하던 레일라였지만 이제는 이런 농담도 곧잘 하곤 했다.
시간의 흐름이 우리 사이에 신뢰를 쌓아준 것이다.
그들은 내가 고아원을 설립한 것이 단순한 유희가 아님을 이해했고 나 역시 아이들을 정성껏 돌봐주는 그들을 존중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끝까지 말을 놓지 않았다.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보다는 후원이라는 관계가 그들을 존중하는 처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 언니!
왔어요!”
“왔어요가 아니야!
오셨어요, 해야지.
에리르 바보!”
“치이, 모를 수도 있지.
테라 오빠 나빠!”
에리르와 테라가 투닥투닥 말싸움을 시작했다.
조그만 아이들이 폴짝거리는 게 귀여워서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아이들은 사랑스럽다.
토네이도에서 맡고 있는 아이는 총 일곱 명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열두 살의 베로, 그보다 한 살 어린 테라, 열 살로 동갑인 에리르, 라엔, 프제와 라엔의 동생인 다이엔이 여덟 살이고 가장 막내는 여섯 살 시온이었다.
고아원이 제대로 운영되기 시작하고 1년 동안 베로를 제외한 여섯 명의 아이가 들어왔다.
태어날 때부터 토네이도에 있었던 베로는 아이들의 언니, 누나 역할을 잘 해냈다.
경계심 높은 아이들의 벽을 허문 것도 베로였고, 낯선 공간을 아이들의 집이라고 알려준 것도 베로였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늘 베로의 주변에 붙어있었다.
벨라가 몰래 알려주기를, 아이들이 베로가 공부하러 가는 시간을 제일 싫어할 정도라고 했다.
테라와 에리르, 프제, 시온은 시장에서 구걸하던 아이들로 가넷과 마리의 눈에 띄어서 토네이도로 왔다.
처음엔 어른들에 대한 거부가 너무 심해서 아이들이 진정할 때까지 토네이도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내야만 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다시 거리로 나가겠다고 할까 봐 얼마나 신경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그때는 가넷과 나도 여기서 먹고 자며 아이들을 달래는 데 전념해야만 했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서야 아이들은 손을 내밀었다.
그때의 기쁨과 감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마음 약한 마리와 토라, 가넷은 울음을 터트렸었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눈물을 참느라 고생이었다는 건 나만의 비밀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라엔, 다이엔 자매는 다른 아이들과 사정이 달랐다.
자매는 외국에서 인신매매단에게 잡혀 로한으로 들어온 케이스였는데 클로버로 팔릴 뻔한 걸 벨라가 구해내 이곳에 오게 된 거였다.
그게 반년 전이던가?
자매는 혈육이 함께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적응이 빨랐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앗, 로 언니!”
“베로, 오랜만이야.”
“언니, 언제 왔어요?
공부한다고 베로가 늦은 건가요?”
막 공부를 마친 베로가 와다다 달려와 내게 안겼다.
해맑게 웃는 얼굴이 언제 봐도 귀엽다.
통통한 젖살이 차오른 볼이 은은하게 홍조를 띠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토실토실한 볼을 한번 콕 찔렀다.
“오셨습니까, 나이트 영애.”
“짐이 많으십니까?
저희가 미처 몰라 마중을 나가지 못했군요.”
부엌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벨라와 기사들이 다가왔다.
내 건 별로 안 무거워서 괜찮은데.
짐을 가져가려는 기사들을 만류했으나 어느새 손이 가벼워진 뒤였다.
“짐을 가지러 다녀오겠습니다.
오느라 힘드셨을 텐데 쉬고 계시지요.”
“도와드릴게요, 경들.
이번엔 자잘한 짐들이 많아서 번거로우실 거예요.”
“아닙니다.
이런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단장님께 혼이 날 겁니다.
편히 쉬세요, 영애.
짐은 저희 둘로 충분합니다.”
두 사람은 장담대로 왕복 두 번 만에 모든 짐을 옮겼다.
보따리가 한둘이 아니어서 나였다면 열댓 번은 왔다 갔다 했을 텐데.
짐으로 산을 만드는 그들을 신기하게 지켜보는 사이 순식간에 일이 끝나버렸다.
역시 기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또 한 번 느낀 날이었다.
아, 배부르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부담스럽게 불렀다.
너무 적게 먹는다는 레일라의 걱정 어린 말에 아이들마저도 나를 못 먹여서 안달이 났었다.
정성을 거절할 수 없어 주는 대로 받아먹었더니 평소의 두 배쯤 먹은 것 같다.
이대로 마차에 탔다간 멀미를 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즐겁게 놀고 있는 그들을 두고 혼자 산책을 나왔다.
멀리 갈 수도 없으니 마당을 빙빙 도는 정도지만.
“와, 예쁘다.”
예전에 친구가 그랬던 것 같다.
지구는 네온사인과 가로등의 광공해 때문에 별이 잘 안 보인다고.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광공해라곤 전혀 없는 세계에 와보니 실감이 났다.
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자연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탄성이 흘러나왔다.
“안녕, 아가씨.”
적막을 깨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누구지?
목소리의 주인은 철봉 위에 앉아있었다.
어둠이 그의 주변에 내려앉아 누군지 식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토네이도의 그 누구도 그와 같은 목소리를 갖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누구?”
그는 주춤주춤 경계심을 내보이며 뒷걸음질 치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달이 구름에 가려서 그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경계할 것 없어.
나쁜 짓 안 해.”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내 뜀박질이 빠를지 저 남자가 빠를지 가늠해 봤다.
오늘 신은 게 구두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흐음.
뭐, 좋은 자세긴 해.
남을 쉽게 믿지 않는 거.”
“…….”
“소개가 늦었네.
내 이름은 카리브, 마탑주야.”
카리브?
마탑주?
나는 그제야 그를 천천히 다시 훑었다.
때마침 구름 사이에서 달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달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물빛의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단정하게 흔들렸다.
속눈썹이 드리운 그늘 속 눈동자 색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머리색은 내가 아는 카리브의 묘사와 일치했다.
“마탑주……?”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나무 그네로 옮겨가 있었다.
마나의 흔적이 빛무리가 되어 희미하게 남아 주변을 밝혔다.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온 건가?”
그가 마탑주임을 확신하자 아까보다 더한 경계심이 곤두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데이지 퀴니에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을 시기였다.
그래서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곳에 왔지?
어떻게 여기에 아이들이 있는 것을 안 거야?
“뭐?
하하!”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하게 그는 나를 털 세운 고양이 보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기가 스민 얼굴은 내 말을 농담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럴 리가.
재밌는 이야길 하네.”
“이런 곳에 갑자기 마탑주가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걸.”
“흠, 그런가?
뭐, 마나가 느껴져서 와본 건 맞아.”
“…마나라면, 아이들의 마나를 느낀 건가?”
“그래.
이래 봬도 마탑주니까 말이야.”
마탑주라는 단어에 은근한 강세가 있었다.
자랑이라기보단 별로 탐탁지 않은 것을 주제에 올린 것처럼.
내 착각인가?
“참고로 아가씨의 목에 걸린 칼라일의 목걸이에도 꽤 관심 있어.
마탑으로 회수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못 했거든.”
“돈……?”
의외의 말이었다.
마탑주가 돈이 부족했던가?
소설 속에선 마탑을 멋지고 아름다운 공간이라고만 묘사했었다.
그래서 보석이 방 가득 쌓인 곳이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멋지고 아름다운 공간을 돈으로 환산해 버린 물질주의적인 생각이었네.
“물론이지.
내가 돈이 있었으면 마나의 축복을 받은 아이들이 길거리를 헤매도록 두지 않았을 거야.”
“…….”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이들이 모여있는 게 느껴지길래 혹시라도 인신매매단 같은 곳에 붙잡혀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어서 찾아온 거거든.”
그의 목소리와 말투에는 진심이 있었다.
그 확고한 진정성에서 나는 그의 염려와 걱정, 희미한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여긴 인신매매를 하는 곳이 아니야.”
“물론.
그런 곳에서 아이들이 웃을 리가 없으니까.
온전히 아이들만을 위한 공간이잖아, 이 구조물부터 시작해서.”
그는 아이처럼 발을 휘저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그네가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점점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우세해졌다.
이때껏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강제하지 않았다.
다정한 말투와 태도 그 어디에서도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고.
게다가 그는 나를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
저 긴 설명은 오로지 그의 호의였다.
“나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네, 아가씨.
대단한걸.”
“표현이 너무 거창한데.”
“아니, 맞아.
귀족들 중에서 마나에 거부감 없는 사람은 드물거든.”
“…….”
“귀족들이야말로 역사를 가장 편협하게 보고 있다는 거 알아?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거기서 벗어나는 걸 무서워하거든.
그래서 그들의 관념은 변함이 없어, 200년째 말이야.”
“…다른 이들이 그 말을 들으면 당신을 경계할걸.”
“알고 있지, 물론.
하지만 넌 그러지 않을 거잖아?”
그의 말투에 다정한 기운이 깃들었다.
그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는 호감이었다.
“아이들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
“나도 저런 아이들 중 하나였거든.
마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게 알려지자마자 거리로 내몰렸지.”
“하지만 당신은… 마탑주잖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전대 마탑주가 나를 거뒀기 때문이야.
그가 마실 나온 거리에 내가 서있었다는 행운 덕에.”
그의 시선이 제가 앉아있는 그네를 지나 시소, 철봉, 그리고 모래에까지 옮겨갔다.
아이들을 위한 내 노력이 그의 시선을 받고 있는 기분은, 꽤 묘했다.
이렇게 마탑주를 만나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해봐서 그런가.
“마나를 배척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그 생각에 변화는 없지만…….”
그의 얼굴에 희미한 고통이 어렸다.
…그는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불쑥 궁금증이 일었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것을 지적하는 순간 지금 우리 둘 사이의 가벼운 분위기가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흠, 너무 내 이야기만 했나?”
“아니, 괜찮아.”
“아이들을 돌봐줘서 고마워.”
“…당신에게 감사받을 이유는 없어.”
나는 곧바로 선을 그었다.
고아원을 설립하게 된 것은 이루지 못한 내 꿈 때문이었지 그에게 감사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아이들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것까진 내가 막을 수 없겠지만, 그가 은근슬쩍 아이들과의 관계성을 세우는 것은 곤란하다.
안 그래도 황궁의 감시를 받고 있는 처지에 의심의 눈초리만 늘 것이다.
“음, 너무 단호한데.”
“무안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근데, 여길 세우면서 걸린 제약이 좀 많아서 말이야.”
“아아,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 둘 사이에 가벼운 웃음이 오고 갔다.
자연스럽게 눈웃음치는 그의 얼굴에서 달빛이 거둬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의 인영을 바라봤다.
“궁금증도 풀었으니 이만 돌아가 볼까.”
모래와 풀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그의 존재감이 코앞에서 느껴졌을 무렵 차가운 손가락이 내 손을 잡아 펼쳤다.
얼음장 같은 온도에 내 손이 움츠러들었지만 그는 기어이 내 손에 무언가를 올려놨다.
가벼운 무게감.
슬쩍 문질러 보니 반지인 듯했다.
“이건 선물.”
“내가 이런 걸 받을 이유는 없어.”
“너무 잘라내지만 말고.
거창한 것도 아닌데.”
부르고 싶을 때 불러, 한 번쯤은 와줄게.
폭탄 같은 말을 남기고 인기척은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벽한 퇴장이었다.
희미하게 남은 빛무리와 반지만 아니었다면 꿈인가 착각했을 정도로.
달빛이 다시금 땅을 내리비췄을 때 올려다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방금 전의 아득한 어둠이 마치 거짓인 듯이.
멀리서 호위 기사들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들에게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반지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의 만남이 꿈이 아니었다는 흔적이었다.
* * *
“마차는 준비시켜 놨지?
아 참, 내가 돌아올 때까지 로커스를 여기다 잡아두고 있어.”
“로, 로커스 님을요?”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은 롤랑을 데이지 퀴니가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공작가를 휘어잡은 레미아의 눈을 피해 겨우 매수한 시녀건만 롤랑은 매우 쓸모가 없었다.
겁이 많고 생각이 모자라 이런 식의 되물음이 일상일뿐더러 그녀의 일을 망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롤랑 말고 제 손 위에 올릴 수 있는 이가 없어서 그런대로 부리고 있지만 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바로 내칠 생각이었다.
못마땅한 그녀의 시선이 롤랑에게 내리꽂혔다.
“그래.
내가 기다리라고 했다고 하든지, 핑계 정돈 알아서 대.”
“네, 네에…….”
말끝이 뭉그러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런 데 일일이 신경을 썼다간 제 기분만 상할 뿐이었다.
데이지 퀴니는 도도한 얼굴로 현관으로 향했다.
미리 대기시켜 둔 마차가 데이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작 그 꼬마 둘이 뭐라고 저를 움직이게 하나 싶어 짜증이 목 끝까지 솟았지만 당장 아쉬운 것은 그녀였다.
그녀의 실수로 헤일로 카르트를 놓쳤고, 황태자는 어떤 확언도 해주지 않는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그녀의 일에 가장 도움이 되는 로커스마저 떠나버린다면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져 버린다.
그녀가 짜증을 감수하면서도 오늘의 외출을 고집하는 이유였다.
제 신분을 숨기고 움직일 생각이었기 때문에 준비된 마차는 아무 문양 없이 깔끔했다.
언제나 퀴니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다른 이들의 시선을 즐기던 그녀로서는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롤랑은 그때도 되물음을 멈추지 않아 데이지 퀴니의 분노를 샀다.
“시내로.”
“네, 아가씨.”
공작저에서 일한 지 오래된 마부는 가타부타 더 묻지 않고 마차를 이끌었다.
데이지 퀴니는 미리 준비해 둔 로브를 걸친 뒤 짜증스럽게 바깥을 응시했다.
“후우.”
한참을 걸은 후에야 목적지에 도달한 데이지 퀴니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사당한 다리가 욱신거렸다.
혹시라도 마부가 따라붙을까 봐 한 시간 가까이 인파 속에서 걸어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익숙한 문을 열어젖히고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서 오세요.
정보 길드 ‘라달’입니다.”
“의뢰 결과를 확인하고 싶군.”
“의뢰인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마리.”
급한 대로 댔던 이름이라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 간격을 카운터 직원은 의심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데이지가 의뢰한 정보가 적힌 양피지를 건네주었다.
“확인해 보니 반년 전부터 같은 의뢰를 갱신해 오셨네요.
이번 정보는 일주일 전에 완료되었습니다.
혹시 갱신을 원하시거나 새로운 의뢰를 하시려면 따로 말씀해 주세요.”
데이지 퀴니는 제 손에 올려진 종이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항만 도시 리넬에서 실종된 자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양피지엔 자매가 탄 배의 선원과 리넬 잡화점 상인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배표를 사러 온 것은 중년 여성이었으나 산 표는 아이 두 장뿐이었소.
배에 올라탄 것도 아이 둘뿐이었고.
그 여자가 선실 값을 내지 않았는지 아이들은 갑판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잤소.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첫 번째 경유지인 리넬에 도착했고 아이들은 거기서 내렸지.
내 알기로 아이들의 표는 세 번째 경유지인 젤단이었는데 말이오.
뭐, 그다음엔 나도 모르오.
배에서 내렸으니 어디로든 갔겠거니 했지.’
‘리넬은 그다지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닙죠.
사실 매일같이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니 그만큼 범죄가 많지 않겠습니까요?
예에, 요새는 뭐, 나라님이 병사를 보내주신다곤 하지만, 귀족 나리들이 아닌 경우에야 눈감고 넘어가는 게 대다수고.
아고고, 어디 가서 이런 말씀은 마시고…….
아무튼 그런 와중에 아직 어린 여자애 둘이 어른도 없이 리넬에 덩그러니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요.
애들 행색을 보아하니 집에서 쫓겨났거나 가출을 한 성싶은데 뭐, 알 길이 없습죠.
쪼끄만 것들이 어찌나 발이 빠른지 금세 이 골목에서 사라져 버렸거든요.
…사실 이건 비밀인뎁쇼.
그즈음에 리넬의 인신매매단 중 하나가 한탕 크게 했다며 주점에서 파티를 한 적이 있습지요.
저는 그것들이 그 아이를 납치해 가지 않았나… 하고.
아하하하, 뭐 이건 제 생각이니 너무 진지하게 듣지 마십쇼.’
“의뢰를 갱신하겠어.”
“네, 알겠습니다.”
데이지는 그 꼬맹이들이 인신매매단에 납치를 당했건 바다에 빠져 죽었건 내가 알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친족인 로커스를 지금처럼 수족으로 부리기 위해선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혈육의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본 적 없는 데이지로서는 위선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인상을 찌푸린 채 서있는 데이지 퀴니는 누가 봐도 심기가 상해있는 모습이었지만 얼굴을 완전히 가린 후드 때문에 카운터 직원은 눈치채지 못했다.
직원은 널려있는 양피지 조각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반년 전에 마리 님이 말씀하신 나이의 자매가 시장에 나온 적이 있었다는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리넬 도시가 아니라서 의뢰서에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인상착의는 모두 일치한다는군요.”
“…그럼 그 아이들에 대한 조사도 추가로 해봐.
얼마 뒤에 오면 되지?”
“리넬 도시는 저번처럼 한 달이 걸릴 것 같지만, 추가로 요청하신 정보는 열흘이면 될 것 같습니다.”
데이지는 추가로 값을 치르지 않고 정보 길드를 빠져나왔다.
처음 방문했을 때 보수로 내놨던 다이아몬드가 아직도 정보 값을 치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가리면 뭐 하나, 명령조의 귀족식 어투와 경제 관념이 없는 태도에서 귀족 냄새가 나는데.
카운터 직원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의 여자를 비웃었지만, 데이지 퀴니는 눈치채지 못했다.
허탕을 쳤다는 생각에 짧게 혀를 찬 그녀가 라달을 나서자 카운터 직원은 재빨리 방금 전의 상황을 정리해 상부에 보고했다.
그녀가 로커스를 만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녀와 마탑주 카리브 간의 친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이다.
마탑주 카리브가 전(前) 마탑주에게 거둬지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좌표 설정을 실수해 데이지의 앞에 나타났다.
당시 아버지에게 호통을 듣고 정원에 숨었던 데이지는 갑자기 나타난 소년을 향해 관심을 보였다.
일생을 학대당하며 당연히 배워야 할 사실마저 배우지 못한 그녀에게 갑자기 나타난 소년은 신기한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때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자유를 부러워했다.
애정이 고팠던 소년과 자유가 고팠던 소녀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것은 사는 세계가 다른 두 사람의 우연적인 만남에 불과했지만, 그 만남이 지속되자 두 사람의 인생도 송두리째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마탑주 카리브는 데이지 퀴니의 친절을 애정이라 착각하고 그녀에게 빠져들었으며, 데이지 퀴니는 저를 향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마탑주 카리브의 가치에 빠져든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그녀는 사랑이었고, 그녀에게 그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탑주의 마나를 쫓던 로커스라는 마법사가 퀴니 공작가의 문을 두드렸다.
로커스는 마탑주에게 전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며 데이지 퀴니는 그를 이용할 생각에 그를 집 안으로 들였다.
로커스는 자신을 은둔 마법사라고 설명하며 마탑주에게 자신의 두 조카를 맡기고 싶다고 했다.
어린 시절 마나를 가진 아이들이 얼마나 혹독한 경험을 하는지 직접 겪어봤기 때문에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마탑으로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이지 퀴니는 카리브가 아이들을 맡게 되면 제게 기울이는 관심이 줄어들 거라 생각했다.
카리브도 어릴 적의 경험으로 아이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자신이 책임져야 할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데이지 퀴니는 로커스에게 카리브에 대한 거짓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제가 대신 아이들을 맡아주겠노라 꾀었다.
마나를 증폭시키기 위해 어린아이들의 피로 목욕한다는 마탑주 이야기를 들은 로커스는 의심할 새도 없이 데이지 퀴니와 계약을 맺어버렸다.
그러나 일이 터졌다.
고용한 평민 보모에게 아이들과 함께 소국 레타넬로 넘어가 살라고 돈주머니를 쥐여준 것이 문제였다.
돈주머니를 탐낸 보모가 아이들만 배에 태우고 도주해 버린 것이다.
돈이야 보석 한 개 값도 되지 않으니 아깝진 않았으나 그 이후 아이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가 로커스를 계속 부려먹으려면 아이들의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실종되고 8개월이 지났음에도 아이들의 소식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데이지 퀴니로서는 그 8개월간 로커스에게 들키지 않도록 막으면서 뒤로 몰래 찾아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늘도 허탕을 쳤다는 생각에 불쑥 화가 치밀었으나 로커스만큼 쓸 만한 도구가 없어 겨우 내리눌렀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롤랑을 잡고 화풀이하겠단 생각으로 그녀는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 * *
“로지.”
“네?
무슨 일이세요?”
흘러가는 구름에서 시선을 뗐다.
아버지가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지?
나는 의아해하며 아버지를 소파로 안내했다.
가넷이 눈치 빠르게 차를 준비했다.
“올라온 서류를 봤는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다.”
“방금 올려보낸 거요?
그럴 만한 서류는 없었던 것 같은데.”
고작 열 장 남짓한 서류에는 엔데버에 세울 예정이었던 상단에 대한 정보밖에 없었다.
새로운 사실이 있을 때마다 보고를 했으니 오늘 올린 서류는 형식적인 중간보고에 불과했다.
거기에 아버지가 모르시는 내용은 전혀 없을 텐데.
“엔데버에 세우기로 한 상단 말이다…….
예정대로 진행되는 거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그레이 경과 이야기가 잘 안 된 것도 아니고,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다 세웠는걸요.
이제 와서 뒤집을 리가요.”
내 확답에도 아버지는 어딘가 찜찜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 멈출 만한 이유가 있나?
내 단호한 대답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문가에 서있던 가넷마저 눈치를 보기 시작할 즈음 아버지가 다시 말문을 트셨다.
“황자 전하와…, 싸웠니?”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분이 요즘…….”
나는 슬쩍 눈썹을 추켜올렸다.
텐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런 의미를 담아 빤히 쳐다보니 슬쩍 시선을 외면하셨다.
“흠흠, 뭐… 사랑싸움이라는 게 말이다.
나중에 돌아보고 나면 왜 그런 걸로 싸웠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단다.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딱 어울리지.”
그 말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귀담아들었을 테지만, 내 앞에 계신 분은 아버지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의 관심 부족을 이유로 투정을 부리시는 아버지.
두 분의 사랑싸움은 늘 아버지의 투정으로 시작했으니, 방금 전의 충고가 신뢰성을 잃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차갑게 식은 눈을 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가 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니, 나는 로지 네 편이란다, 하하!
우리 딸이 다 옳지, 물론.”
“…….”
“다만, 이 아버지의 사정도 조금 알아달라는 의미에서…….”
“아빠.”
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르르 녹았다.
급한 일이 있거나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써먹는 ‘아빠’
카드는 오늘도 효과가 직방이었다.
“저는 당분간 황자 전하를 안 만날 생각이에요.
그러니 아빠도 이해해 주세요.”
아빠, 라는 단어에 은근한 강세를 두었다.
스물 세살이나 되어서 이러고 있는 모습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으나 이보다 효율적인 방법도 없다.
마찬가지로 두 오라버니들에게도 직방이고.
“그, 그래, 알겠다.
로지가 원한다면야.”
점심 즈음 배달된 편지 한 통은 집 안을 뒤집어 놨다.
황궁의 편지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고급스러운 봉투와 황족만 쓸 수 있는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실링까지.
게다가 편지를 전하러 온 이의 신분도 만만찮았으니, 휴식을 취하고 계시던 어머니, 아버지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현관으로 뛰쳐나가셨다.
그러나 편지의 수신인이 나였기 때문에 늦은 아침을 먹고 집무실로 가던 나 역시 뒤늦게 그 무리에 합류했다.
모두를 불러 모았던 편지의 정체는 ‘황태자비 간택전 초대장’이었다.
황태자의 혼기가 찼으니 또래의 영애들을 불러 모아 간택전을 치르겠다는 이야기가 고급지게 포장되어 있었다.
로위나 영애의 말과 원작의 기억으로 대충 감을 잡고 있던 나와 달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스라칠 듯 놀라서 편지를 두세 번이나 읽어보셨다.
“이런 중요한 일을, 이제야 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분명 회의 시간에 졸거나 딴생각을 한 게 틀림없군요!”
“아, 아닙니다, 여보.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회의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던 일인 것을…….”
쩔쩔매는 아버지가 불쌍했지만, 내가 굳이 끼지 않아도 저녁쯤이면 다시 알콩달콩 계실 분들이다.
나는 가출한 가넷의 넋을 수습해 방으로 끌고 왔다.
“아, 아아아, 아가씨는, 알고 계셨어요?!
어쩜 그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으세요!”
나는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여기서 내가 그 결과까지 알고 있다고 하면 가넷은 더 놀라겠지?
나는 이미 반쯤 떨어진 것 같은 가넷의 간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녀의 정신이 쏠릴 만한 이야기를 던져주었다.
“어떤 드레스를 입을까?
나름 황궁의 행사인데.”
“앗, 그러네요!
지금부터 드레스를 맞추려면 빠듯하겠는걸요.
다른 영애들께서도 참석하실 테니…….”
예상대로 가넷은 금세 드레스에 빠져 떨어지려는 간을 지켜냈다.
나는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맞춰둔 드레스 중에 아직 안 입은 게 있잖아.”
“으음, 유행에 맞는다면 수선해 볼 수 있겠지만요.
이미 지났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가넷은 단호했다.
아니, 그 유행이라는 거 나는 관심 없는걸.
그러나 가넷이 드레스에 관해서 내 의견을 들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므로 내 말은 간단히 묵살당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
“네!
물론이에요!
저만 믿으세요, 아가씨!”
가넷의 미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그로 인해서 시달릴 내겐 무섭기만 한 열정이었다.
부디 이번에는 열 벌 정도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반가워요, 두 사람.”
“오랜만이야, 록시.”
“잘 계셨어요, 록사나 영애?”
오늘도 우리는 연회장의 구석에서 만남을 가졌다.
황태자비 간택전이라는 명목 덕에 영식들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 사람 수는 적었으나 평소보다 더 힘써 치장한 영애들이 과하게 부풀린 드레스를 뽐내며 서있는 통에 연회장의 중심에는 발 디딜 곳도 없어 보여서 자발적으로 밀려 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기품을 돌려 까며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는 영애들을 질린 듯이 지켜봤다.
주인공인 황태자가 오지 않아서인지 그들은 살기등등하게 서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공작새도 꼬리 접고 도망가겠는데?”
“뭐라고요, 로즈 영애?”
혼자 중얼거린 말에 로위나 영애가 답해왔다.
나는 웃으며 혼잣말이었다고 얼버무렸다.
록사나는 지루한 눈빛으로 황태자가 누구에게 관심을 보일지 내기해 보자고 했다.
“적어도 중앙에 몰려있는 저 영애들은 아닐 것 같은데.”
“저 영애들, 본인이 하는 말이 황족 모독죄인 건 알까 모르겠네요.”
“시종장이 땅을 치고 울겠는걸요.
그러라고 보낸 초대장이 아닐 텐데.”
심드렁한 만담이 웃겼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그래, 저들 중에는 데이지 퀴니가 없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는 파티장 제일 안쪽, 저를 돋보이게 해줄 들러리들 사이에서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마시지 않을래요?
저기 샴페인이 있어요.”
“전 괜찮아요, 로위나 영애.”
“저랑 가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로지?”
로위나 영애와 록시가 샴페인을 가지러 자리를 비웠다.
두 사람이 몇 잔을 들고 올지 추측하고 있는데 황태자가 입장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공작새도 쫓아버릴 드레스들은 온갖 보석을 달아 샹들리에 아래에서도 반짝거림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위에서 보면 눈부셔서 눈도 뜨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드세요.”
“…….”
“갑작스럽게 열린 파티로 다들 당황스러우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오늘은 그저 황태자비 간택전이라는 이름보다는 친목을 쌓는 자리 정도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단상에 선 황태자의 어조는 담담했다.
이미 내정자가 있어서인지 그는 이 행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나는 다시금 데이지 퀴니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붙잡았다.
헤일로 카르트와 텐은 원작의 흐름에서 벗어났지만, 다른 이들은 운명대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데이지 퀴니는 이대로 황태자의 청혼을 받고 황태자비가 되겠지.
그녀가 내 인생을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앞길은 꽃만 피어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남의 인생을 망치려 들어도 제 미래는 해피엔딩이 예정되어 있다니, 얼마나 불공평한지.
이때까지는 조용히,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만을 위해 설정된 다섯 남자가 그녀의 발치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이야기 속.
어떻게 봐도 이 세계는 그녀를 위한 곳이었으므로.
텐을 내 곁으로 데려온 것을 빼면 원작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곳이었다.
헤일로 카르트는 데이지 퀴니의 유혹에 빠졌고, 지금은 황태자 블라세 로한의 청혼을 받으면서.
곧 마탑주 카리브가 그녀를 위해 제국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기사단장 벨로프 케를란도 이 무리에 끼어들 것이다.
그 사이에서 내 존재감은 더없이 미미했다.
데이지 퀴니에게 복수하겠다는 이유로 텐을 데려왔지만, 나 때문에 운명이 바뀐 텐을 생각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없는 줄 알았던 양심이 자꾸만 나를 쿡쿡 찔렀고, 나에게 호의를 보이는 텐이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결국 복수를 포기하고 데이지 퀴니를 외면하면서 의도적으로 나를 누르며 살아왔다.
데이지 퀴니가 마지막 선을 넘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대로 나를 누르며 살아갔을 테지.
이유 모를 적의가 텐을 위협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토록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움츠러들면 움츠러들수록 데이지 퀴니는 더더욱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말뿐인 복수가 아니라 진정한 복수를 해볼 생각이었다.
2년 전의 몫까지 합해서 완벽하게.
“로즈 나이트 영애.”
“네?”
록시와 로위나 영애의 사이에서 끝을 향해가는 연회를 둘러보는 내게 시종 하나가 다가왔다.
우리 셋 중에서도 정확히 내 이름만 불러 의아해하고 있는 찰나 고개를 깊게 숙인 그가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황후 폐하께서 보내신 티 파티 초대장입니다.
확인해 주십시오.”
깜짝 놀라서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린 뒤 편지를 받아 들었다.
볼일이 끝난 듯 시종은 인사를 올리고 사라졌고 나는 록시와 로위나 영애 사이에 편지와 함께 남겨졌다.
먹잇감을 찾은 듯 날카롭게 빛나는 두 쌍의 눈이 무서울 정도로 나를 압박해 왔다.
지금 당장 편지를 펼쳐보길 원하는 모양새였다.
“3일 후 오후 2시, 유리 온실에서……?”
“세상에, 무슨 일이야.
간택전에서 티타임 초대라니……!”
“아무래도 후보들을 뽑은 뒤 다시 간택전을 치를 건가 보네요.
저기 티타임 초대장이 또 온 모양이에요.”
사람들 사이가 내키지 않아 연회장 구석 쪽에 있었던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아니었다면 분명 나도 저 꼴을 면치 못했을 테니.
시종의 편지를 받아드는 데이지 퀴니의 주변을 영애들이 감싸고 있었다.
시샘, 경악, 분노 등등 온갖 감정의 도가니 사이에서 데이지 퀴니는 평온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데이지 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