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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아칸더스 (1)
“거긴 내 자리였어.
그렇지, 롤랑?
처음부터 내 자리라고 믿어왔던 자리였는데.”
“아, 아가씨.
잘, 잘못했…….”
“왜일까?
롤랑, 그깟 벌레가 뭐라고 나를 방해하는 건지 난 이해할 수가 없어.”
평온한 어조로 말을 하며 사랑스럽게 웃은 데이지 퀴니가 고개를 기울였다.
손에 들고 있는 채찍만 아니었다면 롤랑 역시 달콤한 그 미소에 넋을 잃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던 데이지 퀴니가 폭발하던 순간부터 그 앞에 무릎 꿇은 지금까지도 제 목숨이 어디에 달려있는지 확실하게 깨달은 그녀는 그저 울며 살려달라 빌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화가 난 데이지 퀴니의 곁에 있다가 죽어나간 사용인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이때까지는 어찌어찌 잘 살아남았지만 오늘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내가 밟으면 반항 한번 못 하고 죽어가던 그 벌레가 도대체 왜?”
해사한 미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독기가 그 눈에 가득했다.
그럴 때의 제 주인은 그 어느 때보다 패악을 부리며 사용인들을 매질하는 것으로 화풀이를 하곤 했다.
롤랑은 엎드려 빌면서도 저 채찍이 언제 제 몸을 내리칠까 두려워 벌벌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전부 다 가져야 한단 말이야!
그깟 년한테 빼앗길 수 없다고!”
분을 못 이긴 데이지 퀴니가 씩씩거리며 채찍을 내리쳤다.
기술 없이 힘으로만 내리친 채찍은 근처의 화병을 깨뜨리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깨진 파편이 튀며 몸을 긁었지만 롤랑과 데이지 퀴니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 인생을 망쳤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한 얼굴로 웃을 수가 있어!
이제 와서 무슨 권리로 내 것을 빼앗아 가!!”
채찍 끝에 매달린 징이 허공을 갈랐다.
채찍이 팔을 스치고 지나가자 롤랑이 아픔에 몸부림치며 살려달라 빌었지만 데이지 퀴니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롤랑은 공작 부인 레미아에 의해 채워진 이들로 가득한 공작저에서 데이지 퀴니가 겨우 매수한 시녀였던 만큼 여태껏 폭력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최근 들어 그녀의 시녀와 하녀 자리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그 곁에 롤랑밖에 남지 않았었다.
그러던 차에 오늘 화가 폭발한 데이지 퀴니의 눈에 평소처럼 실수하는 롤랑이 들어오면서 화풀이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건 다 내 거였어!
처음부터 내 거였다고!!”
발작하듯 외치며 이리저리 채찍을 휘두르는 통에 롤랑은 물론이고 그녀의 손과 팔 여기저기에도 상처가 남았지만 데이지 퀴니는 여전히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아무리 제가 날뛰고 그 때문에 상처를 만들어도 제 가치를 알고 있는 아버지가 사제를 불러다 흔적도 없이 지워준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아가씨!
잘못했어요.
제발…….”
엉엉 우는 롤랑의 울음소리가 비명 소리에 지워질 무렵 방구석에서 로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 여기저기 널려있는 파편엔 시선도 주지 않은 로커스가 데이지 퀴니에게 고개 숙이자 한참을 분풀이에 정신 팔려있던 데이지 퀴니의 시선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아, 로커스.
마침 잘 왔어.”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공녀님.”
“로커스가 해줄 일이 생겼거든.”
로커스를 보며 여유를 되찾은 데이지 퀴니가 채찍을 대충 던져버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평소처럼 소파에 앉으려던 로커스는 소파 위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을 발견하곤 엉거주춤 다시 일어섰다.
“저번에 내가 얘기했던 약 말이야.”
“저번의 약이라면…, 혹시 얼굴을 녹아내리게 하는 약 말씀이신가요?”
“맞아.
그때 재료만 구하면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잖아.”
“좀 비싼 재료들이 들어가긴 합니다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오래 걸리지도 않고요.
레시피를 가지고 올까요?”
로커스의 대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데이지 퀴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채찍을 휘두르며 화풀이할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난 본능적인 거부감이 데이지 퀴니를 향했지만 그녀가 맡아주고 있는 제 조카들을 떠올리며 꾹 참은 로커스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데이지 퀴니는 신이 난 듯 웃음을 터트리며 침대에 누웠다.
눈치를 보며 여태껏 엎드려 있던 롤랑이 쭈뼛거리며 일어나 문 옆에 가 섰다.
“그 독약을 받으면 로즈 나이트에게 곧바로 먹여버려야지.
평생 놀림받으며 다른 이들의 혐오 어린 시선 속에서 살아가도록.
그것이 절망하는 순간에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할 거야.”
꿈을 꾸듯 몽롱하게 중얼거리던 데이지 퀴니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향하려는데 아까의 그 구석에 로커스가 다시 나타났다.
“아가씨, 레시피를 가져왔습니다.
위에는 필요한 재료들이고 아래에는 만드는 법을 적어둔 것입니다.”
“당장 얼마나 만들 수 있어?”
“저에게 없는 재료가 많아 지금 당장은 제작이 불가능합니다.
대부분 비싼 약재들이라 제 돈으로는 살 수 없었습니다.”
“흠, 롤랑, 보석함을 가져와 봐.”
제 이름이 불려 흠칫 놀란 롤랑이 재빨리 보석함을 찾아 그 앞에 대령했다.
롤랑이 제게 겁을 먹었든 안 먹었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데이지 퀴니가 보석함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요즘 보석을 좀 많이 썼나?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보석이 없는 것 같은데…….
아, 맞아.
정보 길드에 보석으로 미리 대금을 치러뒀으니 거기에 의뢰해서 재료를 수급해 가도록 해.
이 인장을 가지고 가면 알아서 해줄 거야.”
“알겠습니다, 공녀님.”
레시피를 챙겨든 로커스가 다시 자리에서 사라지자 데이지 퀴니는 옷을 갈아입으려던 걸음을 돌려 침대에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롤랑.”
“네?
네, 네네, 아가씨.”
“아버지께 사제를 불러달라고 전해줘, 오늘 당장.”
저녁을 먹고 시간이 꽤 지났기에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이런 시간에 사제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은 귀족일지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데이지 퀴니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미 그렇게 몇 번이나 치료를 받았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제 쓸모를 알고 있는 아버지가 부리는 재롱을 지켜본 지도 벌써 몇 년째였으니.
어서 그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던 롤랑은 곧바로 데이지 퀴니의 방을 나섰다.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 겨우 살아나온 탓에 온몸에 힘이 빠져 걷기도 힘들었지만 늦었다고 또 화풀이 당할 것이 무서웠던 롤랑은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데이지 퀴니가 정보 길드에 갈 때 호위의 역할로 몇 번 따라와 봤던 만큼 길드 건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내를 맡고 있는 길드원에게 인장과 함께 재료 리스트를 넘긴 로커스가 한숨 돌리는 순간 길드원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내미는 대로 받아든 로커스가 의아한 눈으로 되돌아보자 어깨를 한번 으쓱한 길드원이 짧게 설명했다.
“저번에 맡기고 간 의뢰인데 생각보다 정리가 빨리 끝났어.
언제쯤 찾으러 올까 했는데 마침 왔기에 맡기는 거니 그 귀족 아가씨한테 잘 전해드려.”
“전해드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내용이야 그 종이 안에 다 있으니 따로 필요한 건 없을걸.”
종이 전달쯤이야 지금 제가 맡은 일에 비하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로커스가 품 안에 종이를 갈무리해 넣는데 길드원이 은근한 얼굴로 그를 쿡쿡 찔렀다.
“그래서 그 귀족 아가씨가 애들은 왜 찾는 거야?
찾으러 다니는 애들이 그 귀족 아가씨 딸들인가?
혹시, 사생아?”
딸들이라는 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로커스의 등 뒤를 싸하게 만들었다.
그가 알기로 데이지 퀴니의 주변에 딸들이라고 불릴 법한 나이의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보 길드에 의뢰를 넣어 찾아야 할 정도의 아이들은 더더욱.
설마 하는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그는 품에 갈무리했던 종이를 다시 꺼내들고 정신없이 읽기 시작했다.
배에서 내린 뒤 실종된 두 자매에 대한 정보가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정리되어 있는 보고서를 빠르게 읽어 내린 로커스는 두 아이가 인신매매 당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을 읽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망연자실 종이를 읽어 내리는 로커스의 얼굴이 심상찮아 보였던지 그에게 정보를 넘긴 길드원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뭐야, 형씨.
무슨 일 있어?”
“이 아이들 정보, 어디서 나온 거지?”
“여자애 둘, 그것도 자매인 아이들이 그렇게 같이 붙어있는 경우는 드물어서 말이지.
VIP 고객인 만큼 추가적으로도 알아보고 있었거든.
인신매매 거래 건은 혹시나 하고 말한 거였는데 빙고였어.”
“토네이도…, 클로버?”
로커스가 종이를 읽으며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리자 길드원이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보니 자네도 그 아이들과 연관이 있었나 보군.
그의 위로 아닌 위로에도 전혀 반응이 없는 로커스에 길드원은 이내 어깨를 으쓱하더니 카운터 너머로 자리를 옮겼다.
“토네이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외곽에 있지.
서북쪽 외벽으로 가는 길 중간에 산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있는 걸로 알고 있어.
길 정비는 되어있으니 길만 잘 따라가면 있을 테지.”
그 말을 기억해 둔 로커스는 그 팁으로 은화 하나를 던져놓고 길드를 나섰다.
얼떨결에 제 일급보다 많은 팁을 받게 된 길드원이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신이 나 제 동료들에게 달려갔다.
서북쪽 외벽으로는 전혀 갈 일이 없어 텔레포트할 좌표도 두지 않았던 로커스는 시장 근처의 아무 마차나 잡아타고 토네이도로 향했다.
라엔, 다이엔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절실하게 붙들고 마차에 올라탄 그는 토네이도로 향하는 길에 짧지 않은 그 글을 두 번 세 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제 조카들이 제가 모르는 곳에서 그런 고생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길거리를 전전하던 로커스와 그의 형은 서로가 각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로커스가 마나 보유자임을 알았음에도 그의 손을 놓지 않았던 형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로커스는 형의 아이들인 라엔, 다이엔 자매를 애틋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그 아이들에게서 저를 보았기 때문인지,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형의 아이들이어서인지, 혹은 둘 다인지 그 본인도 몰랐지만 그가 라엔, 다이엔 자매를 아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아이들이라도 보호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의 희생쯤이야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그가 모르는 곳에서 그보다 더한 위험을 겪으며 살아남은 자매의 이야기가 그의 눈시울을 시큰하게 했다.
아이들을 만나려 할 때마다 공부나 낮잠, 피크닉을 구실로 거절하는 데이지 퀴니를 보며 먼저 눈치챘어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자주 찾지 않았던 자신이 멍청했었다.
로커스는 이 모든 사실을 여태껏 몰랐던 자신에게 환멸이 나고 저를 속인 데이지 퀴니가 증오스러웠다.
저를 이용할 대로 이용하면서 약속했던 것 하나 지키지 않았다니.
사무치는 후회와 밀려드는 분노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 * *
“아가씨, 토네이도에서 토라 아저씨가 오셨어요.”
“응?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이때껏 토네이도 밖으로 잘 나오지 않던 토라 아저씨가 저택에 직접 찾아왔다고?
평소 시장에도 잘 나가지 않던 그가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소식에 나와 가넷이 그를 맞으러 응접실로 향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네, 아가씨.
저희도 아이들도 다 잘 있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차를 대접했다.
급히 왔는지 얼굴이 땀범벅인 아저씨를 위해 손수건을 내밀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든 아저씨가 숨을 고르며 땀을 닦아냈다.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오셨어요.
편지를 보내셨으면 마차를 보내드렸을 텐데.”
“아가씨께 빨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기사님들이 계시지만 혹시 몰라서…….”
황실 기사단이 움직일 정도의 일이 생겼다고?
그 외진 곳에 그럴 만한 인물이 왔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토라 아저씨의 얼굴에 불안이나 초조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의아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기사분들이 움직일 정도의 일이라면 내가 직접 가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가넷에게 눈짓하자 그 의미를 눈치챈 가넷이 마차를 준비시키러 자리를 비웠다.
“마차가 준비되면 함께 가도록 해요.
급한 일인가요?”
“기사님들이 아가씨를 모셔와 달라고 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와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도 하셨고요.”
“정확히 무슨 일인가요?
습격인가요?”
토네이도에서 마나를 가진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게 들통난 건가?
그래서 누군가 습격을 지시했다거나…….
허황된 소리 같지만 제국민들의, 그중에서도 귀족들의 마나를 향한 두려움과 혐오감은 상상을 초월해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만약 습격이라면 토네이도의 주변에 추가로 파견할 기사들은 누가 좋을지 가늠해 보고 있는데 토라 아저씨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습격이라니요.
그럴 리가요.
모르는 남자가 토네이도에 왔는데 기사님들이 그 사람이 못 들어오게 막는 중이십니다.”
“남자……?”
토네이도는 수도의 외곽 지대에 지어져 있었다.
주변의 숲과 산이 토네이도를 둘러싼 탓에 토네이도를 목적지로 하고 길을 따라오지 않는다면 찾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랬기에 아이들을 데려와 숨길 수 있었는데, 그런 곳에 모르는 사람이 찾아왔다니.
만에 하나라도 산길을 잘못 들어 찾아온 이라면 기사분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셨을 테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토네이도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나요?”
“그걸 묻긴 했는데, 대답을… 안 했습니다.
지금은 못 할 거고요.
기사님들이 기절시켜 묶어놨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토라 아저씨의 눈은 기사들을 향한 무한한 신뢰로 빛나고 있어서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황실의 기사인 만큼 이런 부분에는 그 누구보다 잘 대처할 이들인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구나, 싶었다.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토라 아저씨에게 차를 권하고 가넷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도착했어요, 아가씨.”
“으으, 역시 달리는 마차 안에서 서류 보는 건 곤욕이야.”
“멀미 나신 건 아니시죠?
혹시 속이 안 좋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가넷의 걱정스러운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꼭 다섯 살짜리 아이가 된 것만 같아 배시시 웃고 말았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 테란 경이 내민 손을 잡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 영애.”
“이번에는 못 뵈고 갈 줄 알았는데 좋지 못한 일로 뵌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침입자를 제압했음에도 정말로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라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뒤로 나무에 묶여있는 남자가 얼핏 보였다.
“경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그게, 사실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저희가 제압을 하긴 했는데, 저자의 정체를 알고 나니 저희들끼리 저자의 처분을 결정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정체요?”
오는 길에 토라 아저씨에게 따로 들은 말이 없었던 것을 보면 토라 아저씨도 모르는 일이라는 건데, 정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가?
기절한 채 나무에 꽁꽁 묶여있는 남자의 외관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제국인 중 하나여서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까 봐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저자는 마법사입니다.”
“마법사요?”
내가 이때껏 만나본 마법사는 마탑주 카리브가 유일했다.
본디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존재인 마법사들은 일생에 단 한 번만 마주치게 되더라도 무척이나 운이 좋거나, 운이 없다고 평가받는데 이렇게나 금방 또 다른 마법사를 만나게 될 줄이야.
황실 기사단원들은 개개인이 황실의 시험을 거쳐 뽑힌 인재들로 그들이 그를 마법사라고 이야기했다면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저 마법사가 왜 토네이도에 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저번의 카리브처럼 아이들의 마나가 느껴져서 찾아온 건가?
“상태가 어떤가요?”
“잠시 기절만 했을 뿐입니다.
마법사긴 하나 실력이 뛰어난 자는 아니어서 쉽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마법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처분에 대해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마법사가 왜 무슨 목적으로 토네이도에 왔는지 알아내고 싶은 마음 반, 이대로 황실에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오늘 같은 일이 한 번뿐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이렇게 붙잡은 김에 그 목적에 대해서 듣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마법사가 구속을 풀고 마법을 써대기 시작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저 마법사는…, 왜 이곳으로 온 걸까요?”
“몇 번 대화를 시도하긴 했습니다만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저희도 알아낸 바가 없습니다.”
“마치 토네이도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저희를 아예 무시하더군요.”
“흠…….
지금 그를 깨우면 위험할까요?”
두 기사는 시선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는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로 일격에 기절당한 듯 아무런 상처 없이 깔끔하게 묶여있었다.
입에 물린 재갈이 꽉 끼여 아파 보이긴 했지만 마법사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입을 막아 캐스팅도 불가능하고 손도 펼 수 없도록 추가로 더 묶어뒀습니다.
사실 완벽한 구속을 위해서는 이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구속 장치를 다는 편이지만…….”
“토네이도에 있을 리는 없겠죠?”
“네, 그렇기도 하고, 공격성이 없어 보여서 토네이도와 떨어진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기만 했습니다.”
나는 기절해 있는 마법사를 찝찝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기사들에게 그를 깨워달라고 부탁했다.
가넷이 겁을 먹은 듯 나를 자꾸만 멀리 데려가려 했으나 나는 자리에 버티고 서서 그가 눈을 뜨는 광경을 지켜봤다.
억지로 깨워진 그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하더니 나를 발견하곤 눈을 홉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만만해 보이는 귀족 영애가 여기 있어서 놀란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니 다른 이들의 경계가 더 삼엄해졌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영애.
위험합니다.”
마법사와 직접 대화해 보고 싶었지만 마법사의 반응에 기사들은 물론이고 가넷까지 내 앞을 가로막은 터라 굳이 고집부리지 않고 물러났다.
그러나 마법사의 시선은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마법사,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지?”
“마탑에 등록된 마법사인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황, 아니 경비대에 고발하겠다.”
그러나 여태껏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마법사는 두 기사가 아무리 그를 겁박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나서자니 기사들에게 부담을 얹어주는 것 같아 미안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에는 이대로 마법사의 목적도 알지 못하고 황실에 넘겨야 할 것 같아 찝찝했다.
내 앞을 막아선 가넷의 등을 바라보며 어쩔까 고민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벨라 아주머니.”
“오셨다는 얘길 듣고 왔습니다, 아가씨.
여기 계시지 말고 저희와 함께 토네이도로 가시지요.
위험합니다.”
그 말에 가넷이 반색했다.
저 마법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차라리 기사들에게 맡기고 자리를 뜨는 게 낫다는 가넷의 말은 틀린 점이 없지만 지금이 아니면 내가 저 마법사를 직접 심문할 기회가 없을 것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마법사가 먼저 나를 불렀다.
“혹시 로즈 나이트 영애님이십니까?”
재갈 때문에 발음이 심하게 뭉개지긴 했으나 대충 그렇게 해석하면 될 듯했다.
내가 대상이 되자 나와 마법사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있던 기사들의 기세가 사나워지고, 화들짝 놀란 가넷이 내 팔을 잡고 어디로든 도망갈 것처럼 굴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맞아.
그러는 그대는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인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저는 그저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 왔을 뿐입니다.
마나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마나를 걸고 맹세한다고……?”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재갈 때문에 여러 번 되물어가며 이루어낸 의사소통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대화는 가능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사들의 틈바구니로 마주친 마법사의 눈은 결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를 다짐한 듯 단단하게 굳어진 눈빛을 마주하자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찾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해를 끼칠 의사는 없어 보였다.
“황실 기사단이 있어 경계할 수밖에 없었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이곳에 제 조카들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게 해주십시오……!”
“조카들……?”
토네이도에 들인 아이들은 대부분 마나를 가졌다는 이유로 버려져 길거리를 떠돌던 아이들이라 친인척이 아이들을 찾으러 오는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벨라 아주머니와 가넷의 얼굴에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조카들이라면, 라엔과 다이엔 자매를 이야기하는 거겠군.”
“맞습니다.
그 아이들은 제 형의 아이들로 제 조카가 되지요.”
“그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왜 그 아이들을 이제 와서 찾는지는 모르겠군.
그 아이들은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혀 다른 곳으로 팔려갈 뻔했었어.
보호자가 있는 아이들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은 그것이었다.
이렇게 직접 아이들을 찾아올 정도면서 어째서 아이들이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혀 팔려나갈 때까지 몰랐는가.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출중한 연기력으로 우리 모두를 속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건, 제가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저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일해주면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제가 희생하면 아이들만큼은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 정말로 몰랐습니다…….”
말을 하다가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그에게는 여전히 거짓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벨라 아주머니의 귀에 라엔과 다이엔에게 마법사에 대해서 물어보고 이곳으로 데려와 달라고 속삭였다.
손이 묶여있어 흘러내리는 눈물도 닦지 못하고 울고 있는 그를 보던 기사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시선을 교환했다.
너무도 서럽게 울고 있는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아이들을 찾으며 울고 있으니 인간 된 도리로 마음이 약해질 법도 했다.
그를 보는 가넷의 시선에도 측은함만이 남았을 때쯤 저 멀리서부터 풀을 헤치는 소리와 조잘조잘 떠드는 라엔, 다이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벨라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숲 너머에서 나타난 자매는 기사들에게 가려진 마법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신이 난 얼굴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로즈 언니랑 가넷 언니다!”
“와, 언니들 언제 왔어요?
오늘도 같이 놀아요?”
나와 가넷에게 각각 달라붙은 아이들의 볼을 쓰다듬어 주며 기사들을 바라보자 그들이 양옆으로 갈라서며 마법사로부터 물러섰다.
놀러 온 듯이 신이 난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법사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라엔, 다이엔, 저분이 너희 삼촌이셔?”
나무에 묶인 채로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그 얼굴은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에게 보여줄 꼴은 아니었지만 라엔과 다이엔은 곧바로 제 삼촌에게 달려가 목을 끌어안았다.
“삼촌!
삼촌, 엄청 보고 싶었어…….”
“어디 갔었어, 삼촌…….
우리 삼촌 보고 싶은 거 꾹 참고 백 밤 기다렸는데 왜 안 왔어!”
감격스러운 상봉의 장면에 가넷이 두 손을 맞잡고, 그 옆에 들러리처럼 서있던 기사들이 눈치 빠르게 마법사를 결박했던 밧줄과 재갈을 풀어주었다.
마법사는 양팔로 아이들을 꼭 껴안고 미안하다는 말만 하염없이 되뇔 뿐이었다.
마법사를 토네이도로 들이는 문제에 대해서 기사들과 의견이 충돌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들은 아무런 제지 없이 그를 토네이도에 들였다.
“혹시라도 이 일로 경들에게 피해가 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죠?”
“전혀 아닙니다.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희가 이곳으로 파견될 때부터 저희의 목적은 영애와 아이들의 호위였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저희 기사단을 직접 불러 영애를 도우라고 하셨었습니다.”
고아원의 설립 당시부터 있었던 기사님들이니 예전부터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황후 폐하의 말씀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나는 록시와 황후 폐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짧게 웃었다.
“저녁 드세요, 아가씨!
기사님들도 얼른 오세요.”
주방에 일을 도우러 갔던 가넷이 대화를 나누는 우리를 이끌어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이미 자리에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고 라엔과 다이엔의 사이에 앉은 마법사 로커스도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에게 적응하지 못한 듯 자꾸만 끼긱거리는 로커스를 라엔과 다이엔이 재밌어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괜찮아 보여?”
“라엔과 다이엔의 삼촌이라서 그런지 괜찮았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경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걱정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혹시나 이번에도 아이들에게 무리가 갈까 봐 걱정했는데 라엔, 다이엔과 함께 지내며 생긴 믿음이 로커스에 대한 경계도 무너뜨린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며 한숨을 돌리는 내게 마리가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마리.”
“뭘요, 맛있게 드시고 부족하면 말씀해 주세요!”
토네이도의 요리를 책임지는 마리의 솜씨는 언제든 일품이라 나는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그릇을 깨끗이 비운 나를 보며 가넷 역시 만족한 기색이었다.
“차를 드릴까요, 아가씨?”
“그럴까.
아직 서류가 좀 남았을 텐데, 그거 처리하면서 마시면 되겠다.”
또 서류 이야기를 꺼내는 내게 가넷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늘 있던 일이라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이런 데 와서도 쉬질 않으신다며 들으라는 듯이 꿍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뻔뻔한 얼굴로 서류를 모을 뿐이었다.
시끌벅적한 식당을 떠나 응접실로 쓰는 방에 들어서자 문 너머로 소음이 차단되며 평화가 찾아왔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
일단 들어와요.”
한창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며 바쁠 줄 알았던 로커스가 방 안으로 들어서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서류를 옆에 대충 정리해 놓고 그와 마주 봤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아까 경황이 없어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제 아이들을…, 라엔과 다이엔을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애님이 아니었다면 저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지…, 상상만 해도 두렵습니다.
아이들을 구해주신 은혜는 평생 동안 갚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평생씩이나요…….
라엔과 다이엔이 무사히 가족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서로 예의 차린 겸양의 말을 늘어놓느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단절될 찰나, 로커스가 손을 매만지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어딜 봐도 말을 머뭇거리는 기색이라 내가 먼저 말을 붙였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거 같은데, 편히 하세요.”
“…무척 염치없는 말이지만…….”
말을 하다 말고 멈춘 그의 표정에서 진심 어린 미안함, 죄책감이 엿보였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 표정에서 눈치챘다.
“라엔과 다이엔이 원한다면, 그리고 로커스 씨가 동의하신다면 토네이도는 언제든 아이들을 보호할 거예요.
아이들이 안전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하시는 것 같은데 토네이도도 나쁜 선택지는 아닐 거예요.
저희도 아이들이 안전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데리고 있어도 되고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염치없지만, 아이들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집을 자주 비우다 보니 아이들만 집에 남게 되어서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별말씀을요.
라엔과 다이엔이 토네이도에 온 그 순간부터 아이들은 제 식구였는걸요.
둘 다 이곳에 잘 적응해서 지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로커스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벨라 아주머니가 몰래 귀엣말로 전해준 소식에 의하면 그가 이 공간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마당에 설치된 놀이터부터 곳곳에 걸려있는 아이들의 그림까지, 어딜 봐도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리고 드릴 말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번의 그는 앞서 말할 때와는 달리 조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들을 토네이도에 부탁할 때보다 더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색해져 짧게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지만 굳어진 그의 표정은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까, 제가 배신당했다고 말씀드린 것은 전부 사실입니다.”
“아이들을 멀리 보냈다던 그 이야기 말이군요.”
“제가 아이들을 부탁했던 사람은 데이지 퀴니였습니다.
영애님께서 아는 퀴니 공작가의 공녀 데이지 퀴니 말입니다.”
나는 흔들릴 뻔한 표정을 겨우 다잡고 찻잔을 들어 떨리는 입가를 가렸다.
이것은 데이지 퀴니의 함정일까?
아니면 데이지 퀴니의 실수일까?
생각이 뒤죽박죽 섞이다 보니 표정을 관리하기 힘들었다.
로커스는 찻잔에 가려진 내 얼굴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제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데이지 퀴니와 거래했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일한다면 아이들은 편안한 곳에서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죠.”
“…라엔과 다이엔은 외국의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혀 여기까지 왔어요.”
“그 사실도 알고 왔습니다.
데이지 퀴니는 애초부터 저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더군요.
곧바로 외국으로 향하는 배에 태워서 보내버렸으니까요.
아이들이 어찌 되든 신경 쓸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천사 같은 얼굴로 손쉽게 다른 사람의 호감을 얻어내고 그것을 무기로 휘두르던 데이지 퀴니.
그녀의 추악한 속내를 알아차린 그를 향한 묘한 동질감이 생겨났다.
그도 나도 데이지 퀴니에게 휘둘리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라엔과 다이엔을 구해주신 보답으로 영애님께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영애님을 도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의 도움은 물론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가 넘길 데이지 퀴니에 대한 정보 역시도.
그럼에도 내가 망설이는 이유는 이것이 데이지 퀴니의 함정이면 어떡하지, 하는 마지막 의심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만약에라도 이 모든 것이 연기라면?
라엔과 다이엔이 이곳에 있는 걸 알아차린 데이지 퀴니가 로커스를 이용하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그러나 그런 내 망설임을 읽은 것처럼 로커스는 제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망설이는 내게 그는 소매를 걷어 보여주었다.
“영애님이 믿음이 가지 않으신다면 마나를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아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목숨이었으니 맹세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믿는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그동안 데이지 퀴니에게 당한 게 있다 보니 쉽게 믿기는 힘드네요.
맹세를 하시겠다면야 말리진 않겠어요.”
“제가 도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로커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제 오른 손바닥에 왼쪽 검지를 대고 꾹 눌렀다.
“제 마나에 맹세하건대, 로즈 나이트 영애님께 단 한마디의 거짓도 말하지 않겠습...
그의 손목에 푸른 마나 고리가 생겨났다.
영롱하게 빛나는 마나 고리가 아름다워 홀린 듯 쳐다보고 있으니 로커스가 제 검지를 마나 고리에 가져다 댔다.
마나 고리에 벤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피를 머금은 마나 고리는 붉게 빛나며 그의 손목에 문장을 남기고 사라졌다.
“맹세의 문장입니다.
만약 제가 맹세를 어긴다면…….”
“문장이 로커스 씨의 마나를 터트리겠죠.”
원작의 카리브가 친절히 설명해 준 덕에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숨 줄을 쥐고 거래를 하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데이지 퀴니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이 내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잘 알고 계신다니 이제 말씀을 드릴 수 있겠군요.
저는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데이지 퀴니가 요구하는 마법 시약을 만들었습니다.”
“…마법 시약이라면?”
“데이지 퀴니가 저에게 가장 많이 요구했던 것은 ‘미혹의 향수’였습니다.
이름 그대로 다른 이가 자신에게 미혹되도록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죠.”
“…그렇다면, 데이지 퀴니에게 반한 남자들은…….”
“전부일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미혹의 향수에 중독된 경우입니다.
미혹의 향수를 오래 맡을수록, 그리고 대상과 오래 있을수록 효과가 좋으니까요.”
그녀를 향했던 그 격렬한 감정들이 사실은 조작된 것이었다니, 그 누가 알았을까.
데이지 퀴니에게 눈이 멀어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관심을 구걸하는 남자들이 사실은 마법사의 물약에 중독된 약물 중독자일 뿐이었다니.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지켜봐 온 세계가 뒤집히며 또 다른 추악한 진실을 드러냈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최근 황태자비 자리에 대한 강박 관념으로 계속 스트레스를 받는가 싶더니 오늘 저에게 독약을 만들어 오라고 하더군요.”
“독약이라…….
데이지 퀴니도 궁지에 몰렸나 보군요.
그녀가 선택할 만한 수가 아닌데.”
“근래 들어 영애님과의 마찰이 잦아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 때문에 고용인들 여럿이 죽어나갔다고 하더군요.”
데이지 퀴니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추악한 모습에 경악하게 된다.
사람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전부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말을 전하는 로커스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혐오감이 드러났다.
그녀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만큼 더 아는 것이 많을 그이니 더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데이지 퀴니가 영애님께 먹이려고 하는 독은 무색무취로 쉽게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세 방울 이상 흡수될 경우 얼굴을 녹여버릴 정도로 독성이 강하죠.”
“얼굴을…, 녹여요?”
“네, 무척 강한 독이라 여섯 방울이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먹어도 치명적이겠군요.”
그런 독을 나에게 쓰려고 했다니,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이런 소식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독에 당했더라면…….
원작의 데이지 퀴니가 미친 마법사에게 빌던 소원이 떠올랐다.
‘로즈 나이트가 평생을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도록 얼굴이 녹아내리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녀의 유혹에 넘어간 미친 마법사는 로즈 나이트가 저택 밖을 나선 때를 노려 마법으로 그녀를 죽였다.
정확히는 데이지 퀴니의 부탁대로 얼굴이 녹아내리도록 할 생각이었지만 정신적으로 몰려있던 로즈 나이트의 연약한 몸은 그 정도 충격도 버텨내지 못하고 스러지고 말았다.
원작이 틀어진 탓인지 로커스는 미친 마법사도 아니었고 데이지 퀴니에게 유혹당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라엔, 다이엔의 일로 데이지 퀴니와 틀어져 내게 도움을 주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곧 다가올 데이지 퀴니의 몰락을 의미하는 듯해 한 편의 희극을 지켜보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데이지 퀴니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한 비극이 없겠지만.
“혹시 그 독약을 제게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얼마든지요.
재료는 이미 구해뒀으니 제조만 하면 바로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혹시 재료가 추가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구해다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슬슬 데이지 퀴니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던 차였다.
데이지 퀴니가 입을 열 경우 위험해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르텐이고, 그녀의 위협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으므로.
참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 이제는 확실히 칼을 뽑아 들어야겠지.
“나는 데이지 퀴니의 본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줄 생각이에요.”
“계획이 있으신가 봅니다.”
“데이지 퀴니는 너무 오래 권력을 잡아왔어요.
그 때문에 점점 방심하기 시작했죠.
그녀의 손에서 빼앗아 온 패를 다 모아보면 그럭저럭 쓸 만한 이야기가 하나 나올 것 같은데 말이에요.”
관심을 보이는 로커스에게 계획을 대강 설명하자 만족스럽게 웃은 그가 얼마든지 협력하겠다며 장담했다.
이번 계획에는 그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후에 또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마침 곧 파티를 열려고 준비 중이었거든요.”
“좋은 타이밍이로군요.”
“데이지 퀴니의 말로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네요.”
로커스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같은 길을 걸을 동지로서의 시작이었다.
* * *
“가넷, 타린을 잠시만 여기로 불러올 수 있을까?”
“타린은 갑자기 무슨 일로요……?
혹시 타린이 영지에서 뭔가 잘못을 저질렀나요?”
“아니, 필요한 일이 있어서.
영지로 내려갈 때처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와야 해.
부탁해도 될까?”
“저만 믿으세요, 아가씨.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아가씨 말씀이라면 당연히 따라야죠.”
가넷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 가슴을 툭툭 쳤다.
저만 믿으라는 듯 한껏 콧대를 높인 모습이 귀여워 피식피식 웃으며 구경하고 있는데 방의 구석, 책장과 벽 사이의 공간에서 로커스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로커스에게 익숙해지지 못한 가넷은 오늘만 세 번째로 놀라 주저앉았고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반겼다.
“또 오셨네요.
차라도 드릴까요?”
“아뇨, 금방 다시 가봐야 해서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작업은 어떻게 되어가나요?”
“독약 제조가 끝나서 들렀습니다.
저번에 만들어 달라고 하셨던 약입니다.”
“이게 그 독약인가 보군요…….
데이지 퀴니에게 줄 액체에는 독성이 없겠죠?”
“그쪽은 애당초 물만 넣어서 줄 생각이었습니다.”
무색무취의 액체라면 물도 빠질 수 없긴 하지…….
여섯 방울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액체를 고작 물로 대체해 버리겠다는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진지해 보였다.
물을 받아들고 독약이라고 착각할 데이지 퀴니의 얼굴을 떠올리니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계획을 위해선 조금 더 극적인 상황이 필요했다.
“데이지 퀴니에게 전해줄 액체에 대해서는 따로 부탁할 부분이 있어요.
아직은 계획뿐이니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가넷, 타린이 타운 하우스까지 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오는 거라면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네요.”
“그럼 일주일 뒤에 제가 미끼를 던져보겠습니다.
대어가 낚이길 기대해야겠네요.”
“이건 낚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자신만만하게 웃는 나를 보며 가넷은 동의한다는 듯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로커스 역시 한숨처럼 웃었다.
“데이지 퀴니가 영애님께 열등감을 가진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번 파티 준비에만 영애님이 맡고 계신 일이 몇 개인지 셀 수가 없을 정도네요.
그 누구보다 큰 그림을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가 책임자니 가장 큰 도화지를 꺼내야 하는 것도 저죠.
일국의 공녀를 끌어내리는 일이니 가볍게 나설 일도 아니고요.”
“마법사님이 보시기에도 저희 아가씨가 좀 대단하긴 하죠?”
제가 칭찬을 들은 듯 가넷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금방 가봐야 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로커스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내려놓고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로커스의 등장으로 놀란 가슴을 충분히 진정시킨 가넷이 로커스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며 툴툴거렸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로커스가 가넷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VIP 고객들만 초대하는 파티니 다른 이들의 시선을 모을 만한 이벤트가 필요한데, 뭐가 좋을까…….”
VIP 고객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내 그 희소성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파티의 내용에도 특별함이 있어야 다음 파티에도 많은 이들이 참석해 줄 터다.
메인이벤트로 무엇을 내세워야 할지 며칠째 고민 중이었지만 마땅한 것이 없어 머리가 아팠다.
“가넷, 가넷은 시장에서 어떤 일이 있을 때 기분이 좋아?”
“시장이라…….
시장이면 역시 할인이죠!
뭔가를 싸게 사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은걸요.”
그러나 상대는 귀족이었다.
그들은 값이 쌀수록 물건을 경시하는 특성이 있어 가격을 낮추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았다.
내가 실망한 얼굴을 하자 가넷이 이런저런 말로 나를 도우려 애썼다.
“가게 앞에서 홍보를 하는 것도 재밌었어요!
광대 아저씨를 처음 봤는데 춤을 엄청 잘 추시더라고요.”
“…….”
“그, 그리고… 아, 맞아.
신제품 체험 행사를 하는 곳도 자주 가는 편이었어요.”
신제품이라……?
처음엔 가볍게 흘려 넘겼는데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좋은 의견인 것 같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상단에서 내놓을 새로운 상품을 VIP 고객에게만 미리 선보이는 것은 메인이벤트로 밀기 괜찮았고 파티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역할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물론 이것도 완벽한 답이 아니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나…….
“의견 고마워, 가넷.
이번에 상단에서 내보일 물품 중에 하나를 발표해야겠어.”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그런데 무엇을 발표하실 생각이신가요?”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지.
파티에서 발표할 물품이니 사치품류가 좋을 것 같은데…….”
만년필의 끝을 물고 생각에 빠진 내게 가넷이 마카롱을 내밀었다.
“그거 물지 마시고, 단 거 좀 드시면서 하세요.
오늘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요.”
“파티 준비가 한창이니 어쩔 수 없지.
책임자인 내가 쉴 순 없잖아?”
마카롱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던 고민들을 일순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달았다.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마카롱도 집었다.
“그래도 이번만큼 일하는 게 즐거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아.
반쯤 의무감에 하던 일들이라서 그런지 즐겁다기보다는 쌓이는 일거리에 걱정부터 들었는데.
역시 사람이 즐기면서 하면 뭐든 재밌는 법인가 봐.”
“확실히 근래 아가씨의 기분이 좋아 보이긴 했어요.
그래서인지 서류를 보시는 시간도 더 늘었고요…….
그렇지만 너무 몸을 혹사시키시는 건 아닐까 걱정되네요.
주무시는 시간도 줄어드셨잖아요.”
“괜찮아, 괜찮아.
요즘 잠도 푹 잘 자고 있고 몸 상태도 아주 좋아.”
데이지 퀴니를 끌어내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니 늘 하던 일임에도 즐겁기만 했다.
기분이 좋으니 서류 처리 속도도 빨라져 요즘은 보좌관들이 나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 자신만만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투력이 상승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