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아칸더스 (2)
“VIP 고객 대상으로 파티를?”
“그렇습니다.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해 VIP 고객 대부분이 참가 의사를 보였다고 합니다.”
“흐음…….”
데이지 퀴니는 사교계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다.
그녀와 얽힌 이들 대부분이 제국의 거물들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되기 위해 인맥부터 치장까지 뼈를 깎아내며 노력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가진 가치를 알았다.
로한의 둘뿐인 공녀 중 한 명이며 그녀와 신분으로 견줄 수 있는 록사나는 애당초 사교계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 그녀가 사교계를 주무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신을 위해 펼쳐진 무대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권력을 쟁취했다.
본디 그녀는 연약한 몸을 핑계 삼아 제가 가고 싶은 파티에만 참가해 왔다.
그러니 평소였다면 후작가에서 여는 파티라고 해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로커스에게 독약 제조를 맡긴 이후로 찾아온 첫 번째 기회였다.
오히려 자신을 위한 자리인 것만 같았다.
“좋은 소식이네.”
“독약도 완성되었으니 괜찮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옆에서 로커스가 의견을 덧붙였다.
빈말을 하지 않는 자이니 믿어도 될 것이다.
“나에게도 초대장이 와있겠지?
가져와, 롤랑.”
차 시중을 들던 롤랑이 자리를 비우자 두 걸음 다가온 로커스가 투명한 병을 탁자 위에 올렸다.
그녀는 한눈에 그것이 독약임을 알아챘다.
“이 약의 세 방울이면 곧바로 피부가 녹아내릴 것이고, 여섯 방울이면 사람을 즉사시킬 수 있습니다.
무색무취의 독이라 독을 먹었는지도 모르고 당할 겁니다.”
투명한 병 안의 액체는 얼핏 보면 물을 담아둔 병이라고 착각할 만큼 무색의 액체로 가득 차있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얼굴로 병을 살폈다.
“그런데 이 약은…, 어떻게 먹일 생각이신지요?”
“저번에 에메랄드 귀걸이를 받아갔던 그 시녀를 부를 거야.
한번 돈맛을 보면 헤어 나오기 힘든 법이지.”
한 번이 어려울 뿐 두 번째부터는 뭐든 쉬워지는 법이다.
그 대가가 돈이라면 더더욱.
주인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은 잠시일 거고, 돈이 주는 풍족함은 결국 그 죄책감마저 희미하게 할 테니.
데이지 퀴니는 이미 목표를 이룬 듯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녀가 이때껏 보아온 인간 군상이 그러했으므로 그 생각에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옆얼굴을 흘끗거리던 로커스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와 로즈 나이트를 비교하게 되었다.
굳이 무언가를 쥐어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사랑받던 로즈 나이트에 비하면 얼마나 불쌍하고 초라한 이인가.
누구라도 방금 그녀가 한 말을 들었다면 데이지 퀴니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금방 알아챌 것이다.
돈이면 해결되는 그 알량한 관계가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니.
“아가씨, 초대장을 가져왔습니다.”
“그거, 여기다 올려두고 내 보석함을 가져와.
내가 자주 쓰는 걸로.”
그녀는 고급스러운 봉투를 찢듯이 열어 초대장을 꺼냈다.
금가루를 뿌린 염료로 칠한 초대 문구에는 의외의 말이 적혀있었다.
“에메랄드…, 귀걸이?”
VIP 고객에게 선물이랍시고 보냈던 그 귀걸이를 지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황당해하며 몇 번이고 편지를 읽었으나 이미 적힌 문구가 바뀔 리 없었다.
이미 나이트가의 시녀를 매수할 때 줘버린 귀걸이를 어떻게 다시 돌려받을 것인가?
돈이 급하게 필요해 팔아버렸을 것이 분명한데.
“에메랄드 귀걸이라면 저번에…….”
“그래, 그때 시녀에게 줘버렸던 그거야.
어쩌면 좋을까, 로커스?”
“어차피 아가씨께서는 그날 독을 쓰실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주최자가 독에 당했는데 귀걸이가 무슨 소용일까요.”
“흠…… 그래, 맞아.
얼굴이 녹아내리는 와중에 귀걸이가 무슨 대수일까.”
고통에 몸부림치며 추악한 꼴을 보여줄 로즈 나이트를 떠올린 데이지 퀴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로커스 역시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데이지 퀴니는 알까, 이 모든 상황을 손 위에 올려두고 조종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아마 그녀는 끝까지 모를 것이다.
로커스는 데이지 퀴니가 끝의 끝에 이 모든 사실을 듣고서 절망하길 바랐다, 부디.
“도움이 됐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이만 연구실로 돌아가 봐도 될까요?”
“그래, 돌아가 봐도 좋아.
무슨 일 있으면 또 부르겠어.”
로커스가 남기고 간 마나 빛무리를 바라보며 시녀에게 어떤 보석을 쥐어줘야 할지 생각에 잠겨있던 데이지 퀴니에게 보석함을 가지러 갔던 롤랑이 돌아왔다.
“열어.”
반질반질한 보석함이 입을 벌리고 보석들을 내보였다.
원래는 보석함 세 개가 꽉 찰 정도의 보석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레미아 퀴니의 공간에서 자신의 수족이 되어줄 시녀들을 모으고 로커스의 연구비를 지원해 주다 보니 보석들을 하나둘씩 팔게 되었다.
지금은 사교계에 얼굴을 내보일 수 있을 정도로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보니 보석 하나하나가 다 고급품이었다.
그녀는 보석의 흠집을 찾아낼 듯 자세히 살펴보면서도 아까워 어쩔 줄 몰랐다.
“뭘 줘도 아깝단 말이지…….”
데이지 퀴니가 적당한 것을 찾으려 보석함을 뒤지고 있자니 눈치 보던 롤랑이 식은 찻잔을 비우고 새로운 잔을 내주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는 주인의 곁에 오래 있으면 불똥이 제게 튄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실감한 탓이었다.
그러나 너무 서둘렀는지 찻잔 옆에 있던 보석함을 건드려 떨어뜨리고 말았다.
“뭐 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얼른…, 얼른 치우겠습니다……!”
안 그래도 보석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빴던 데이지 퀴니의 기분이 더 급강하했다.
하필 제가 가장 자주 하고 다니는 보석들이 들어있는 함이었다.
티 테이블에서 떨어지면서 흠집이 생기면 어떡할 것인가.
새로운 보석을 살 수도 없으니 그 흠집 난 것을 달고 사교계에 나가야 할 텐데!
그녀는 벌떡 일어서 다급히 보석을 주워드는 롤랑의 손을 밟았다.
“꺄아악!”
“감히 그 더러운 손으로 뭘 만지는 거야?”
발밑에서 손을 꺼내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이 마치 발악하는 벌레의 그것과 닮아있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픔에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는 꼴을 보자니 누구라도 들어와 그녀를 말려주었으면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버려지다시피 한 사생아에게 호위 기사란 사치와도 같았다.
롤랑이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관심을 가질 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네가 그렇게 비명 질러봤자 여긴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단다.”
이미 이 집안에서 그녀는 도구로써의 쓰임밖에 하지 못하니 딱 그만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되레 짜증이 치솟은 그녀는 발을 잠시 들어 올렸다가 더 세게 내리찍었다.
손뿐만 아니라 여기저기를 하이힐로 찍어 내리고 나니 분노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꺽꺽거리며 울고 있는 롤랑을 지나치며 도도하게 말했다.
“기분이 더러워졌으니 정원을 산책해야겠어.
너, 니 손이 닿은 보석 전부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아놔.
네가 만졌으니 더러운 게 묻었을지 누가 아니.”
말을 마친 데이지 퀴니는 혀를 끌끌 차며 방을 나섰다.
나중에 보석함을 다시 열어보고 가장 상태가 안 좋은 것으로 골라야겠다, 생각하면서.
“그 시녀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이곳으로 데려와, 롤랑.
저번에 했던 것처럼.”
“네…, 아, 알겠습니다.”
롤랑이 시녀를 데리러 사라지자 여태껏 필요한 말 외의 말은 일체 하지 않고 있던 로커스가 입을 열었다.
“시녀가 많이 긴장한 듯 보이는군요.”
“흠, 저번에 보석함을 엎은 일로 혼을 냈더니 그 이후부터 저 꼴이야.”
안 그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는데 유독 눈치를 보며 긴장한 기색을 보이자 더 못마땅해졌다.
겁을 먹었으면 그만큼 일을 잘해야 할 텐데 오히려 안 하던 실수마저 하고 있으니.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불만을 터트리는 그녀를 로커스가 응시했다.
데이지 퀴니가 눈치채지 못할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 시선에는 분명한 혐오와 경멸이 곁들여져 있었다.
“저 시녀는 이번 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전부 다 알고 있지.
이 저택에서 내가 마음 놓고 부릴 수 있는 시녀는 저것밖에 없으니.”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왜 묻지?”
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시녀가 뭘 하든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던 이가 갑자기 관심을 보인다고?
한껏 예민해져 있던 데이지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가 여전히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는 로커스를 날카롭게 훑어 내리자 그가 피곤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시녀의 앞에서 어디까지 얘기해도 될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큰일인 만큼, 주의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흠…, 그럴 수 있지.”
마땅한 답이 제시되고 나니 그녀의 눈초리가 누그러졌다.
그녀는 식어가는 찻잔을 들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다시금 곁눈질해 살펴본 로커스는 언제나 그랬듯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로 충혈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어딜 봐도 연구에 미쳐 밤을 새운 마법사 꼴이었다.
흥미로운 주제를 찾으면 저런 꼴로 가끔 찾아오곤 했던 카리브를 떠올리며 데이지는 의심을 완전히 풀었다.
똑똑.
“들어와.”
롤랑의 뒤로 눈을 가린 시녀가 들어섰다.
시녀를 끌어 맞은편에 앉힌 롤랑이 눈을 가린 천을 풀어내는 사이, 데이지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시녀를 바라보았다.
“고, 공녀님…….”
“어서 와.
오는 길이 힘들었겠구나.”
친절을 가장한 미소를 그려내자 시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에 데이지 퀴니의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중요한 일을 맡기기 위해 환심을 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노골적인 표정에 기분이 잡쳤다.
“왜 그런…….”
“공녀님께서 특별히 부탁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데이지 퀴니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쏘아붙이려는 순간 로커스가 끼어들었다.
스트레스로 열이 오른 듯 머리가 뜨겁게 끓고 있는 기분이었다.
로즈 나이트와 사사건건 부딪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이런 조그마한 일에도 짜증과 두통이 몰려와 한껏 예민해져 있던 데이지 퀴니였다.
평소였다면 감히 제 말을 끊은 로커스에게도 성질을 부렸을 그녀이지만 로즈 나이트를 제거할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긴 아까웠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려 노력했다.
“부탁이라면, 어떤 종류의……?
저번처럼 정보를 드리면 될까요?”
확실히 저번에 봤던 돈맛을 기억하는지 시녀의 태도가 달라졌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제가 얻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새군.
데이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미소를 그려냈다.
“이번엔 좀 달라.
그래서 네 역할이 중요하단다.”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내가 병을 줄 테니 그 병에 든 약을 며칠 뒤 파티에서 로즈 나이트의 잔에 넣으면 된단다.
그렇게만 하면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다이아몬드 반지……?”
“그것을 팔면 네 어미의 병을 고칠 수 있을 테지.
아, 그래.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신관 또한 파견해 주마.
제국의 공녀인 나에게 그 정도쯤은 간단하지.
네가 내 부탁만 이행한다면 네 어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신관과 병을 고친 후에도 일하지 않고 먹고살 수 있는 돈이 생기는 거란다.
끌리지 않니?”
역시나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시녀를 구슬리고자 데이지 퀴니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신관과 돈, 가장 유혹적인 미끼를 쥐고 흔드는 데이지 퀴니를 응시하던 타린이 불안한 듯 로커스를 흘끗거렸다.
“알겠습니다.
공녀님의 말씀대로 할게요…….”
시녀가 겁먹은 표정을 하면서도 제안을 수락하자 역시, 하는 얼굴을 한 데이지 퀴니가 로커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뒤에서 이 모든 상황을 관찰 중이던 로커스가 투명한 병을 데이지 퀴니의 손 위에 올렸다.
“아까 말한 게 이 약이란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혹시라도 독성분이 날아가지 않았는지 검사를 하겠다며 들고 간 독약 병이었다.
저번과 같은 병에 들어있는 독약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뒤 여전히 시선이 분주한 타린에게 그것을 건넸다.
“이 약을 세 방울 이상 음료 잔에 섞어 넣으렴.
이왕이면 모두의 앞에서 그 효과를 보고 싶으니 서너 방울만 넣으면 좋겠어.”
“이, 이건 위험한 약인가요……?”
“아니, 이 약은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거란다.”
예전의 로즈 나이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행복했던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로즈 나이트가 숨죽이고 눈치 보던 그 시절에는 모든 게 그녀의 마음대로였으니.
그녀는 그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제가 주인공인 날 모두의 앞에서 얼굴이 녹아내린다면 어떨까.
그 끔찍한 모습을 모두의 앞에서 보이고 나면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그녀를 짓밟을 수 있으리라.
그러니 무슨 일이 있든 로즈 나이트는 그날의 주인공일 것이다.
아마 본인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 * *
“파티 준비는 어때?”
“잘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집사님이 기간 맞추는 건 문제없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다행이네.”
준비가 순조로우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서류의 산에 파묻혀 있던 집사의 퀭한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했지만,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건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로커스 씨도 아까 들렀다 가셨어요.
계획대로 잘되어 가고 있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 옆에 있느라 고생이 많겠네.
히스테리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던데.”
“말도 마세요.
듣기로는 거의 미친 사람인 것 같다니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기분이 오락가락한대요.”
그 말을 하는 가넷이 진심으로 질색하는 표정을 해서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 며칠간 로커스의 하소연을 들어주다 보니 그의 사정에 진심으로 공감을 하게 된 것 같았다.
시녀로서 절대로 모시기 싫은 조건을 모두 갖췄다나.
“제 뜻대로 일이 안 풀리니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에까지 손을 대는 거겠지.”
“그게 다른 사람한테 독약을 먹이는 거라니, 말로만 들어도 끔찍하네요.”
가넷이 진저리를 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 주제에 대해 더 언급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지나가듯이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 흘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파티의 드레스 코드는…….”
“아, 맞아요, 아가씨!
안 그래도 그날 드레스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을 했는데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날 에메랄드 보석으로 보석 꽃다발을 만드실 생각이시라면서요?”
“그렇긴 하지.”
“그래서 빨간색과 초록색의 원단으로 만든 장미꽃 드레스가 어떨까 생각 중이었어요!
아니면 붉은 원단에 초록색으로 잎사귀 자수를 넣어 포인트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눈까지 빛내며 열변을 토하는 가넷에게는 미안했지만 ‘로즈’가 ‘로즈’
드레스를 입는다면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고 말았다.
내 표정에도 거부감이 묻어났는지 가넷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인가요……?
아가씨를 위해, 어떤 원단에 어떤 자수를 놓는 게 좋을지도 다 생각해 뒀는데…….
그 드레스와 어울릴 보석 장신구도 이미 골라뒀는데…….”
…도대체 언제 거기까지 일을 진행시킨 거야?
파티가 코앞이니 이미 맞춰둔 드레스 중 적당한 걸 입고 가려 했는데 가넷은 내가 새 옷을 맞출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웬만하면 그녀를 달래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최근 가넷이 일과 마카롱에만 빠져있는 나를 위해 휴식 시간도 반납하고 근무했던 일로 쌓인 마음의 빚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분명 아가씨가 그날의 주인공이 되실 텐데…….
드레스도 엄청 아름답고… 보석 중에는 텐이 고른…….
아앗!”
텐?
잠시 딴청을 피우던 내가 곧바로 시선을 던지자 가넷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누가 봐도 말실수를 했음이 분명한 제스처라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더더욱 짙어져만 갔다.
“텐이 왜?”
“아… 아니, 그게요, 아가씨…….”
“응, 그게 뭐?”
“제가 이걸 말하면…….”
“말하면?”
“…으앙, 어떡해.”
부러 말꼬리를 잡자 가넷의 얼굴은 점점 더 울상이 되어갔다.
대충 보니 텐이 가넷에게 뭔갈 줬고, 그걸 비밀로 하라고 한 모양인데.
나는 혀를 끌끌 차며 가넷이 어디 가서 돈을 뜯고 다니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 오히려 뜯기고 다닐 테니 걱정을 해줘야 하나.
“그래, 말로 못 하겠으면 들고 와봐.
뭔지 한번 보자.”
“…제가 들킨 거 텐한테는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그래그래, 뭐든 좋으니 일단 들고 와봐.”
그제야 가넷이 문제의 물건을 가지러 자리를 비웠고 나는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방금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일까, 머릿속이 자연스럽게 텐의 생각으로 흘러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가 저택에 들렀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만나지 않고…….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웃음을 날리고 말았다.
“내가 먼저 밀어내 놓고 찾아와 주길 바라는 심보라니…….”
먼저 선을 긋고 모진 말을 뱉은 건 나였다.
그게 그를 위한 일이라고 알량한 자기만족에 빠져있었으면서 이제 와서?
염치도 없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씁쓸함에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가넷이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저예요, 아가씨!”
“응, 들어와.”
가넷의 손에는 함이 들려있었다.
나무 상자였으나 재료가 되는 나무의 재질이나 섬세하게 조각된 겉면에서 보통 고급품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함을 만지작거리며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나를 지켜보던 가넷이 말했다.
“왜 상자만 보고 계세요?”
“응?
그럼 상자 말고 뭘 봐야 하는데?”
“당연히 그 안이죠!
포장에만 관심을 보이고 계시기에 설마 했는데…….”
“…으응?”
당연히 이 함이 선물이었던 거 아니야?
그저 보기에도 고급품인 것이 느껴져서 이 함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얼른 열어보세요, 아가씨!
저도 보고 감탄했답니다.”
가넷이 또 한 번 재촉하자 나도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열기 쉬운 구조의 함을 열자 그 안에서 장신구 세트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너무 예쁘지 않나요?
텐이 말하기로는 레드 다이아몬드와 자수정만 썼다고 해요!
그 비싼 다이아몬드가 이렇게나 많이 들어가 있다니…….”
보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봐도 보석들의 세공은 섬세했고 장신구의 디자인도 아름다웠다.
내가 한참 보석 장신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흐뭇한 얼굴을 하던 가넷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요.
이 비싼 장신구 세트를 텐은 어떻게 구했던 걸까?”
알 수 없는 떨림과 설렘으로 들떠있던 기분이 순식간에 현실로 되돌아 왔다.
그러고 보니 가넷은 아직 텐의 진짜 신분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지…….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데 레드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이렇게 선물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재력을 마땅히 변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말이 궁했다.
나의 흔들리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가넷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앗, 어쩌면…….”
“…응?”
“어쩌면, 그런 거 아닐까요?
알고 보니 텐의 친아버지가 엄청난 부자여서 이런 걸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든가!”
“아…하하……?”
“아, 그럼 레일라 아주머니가 토네이도에 계실 이유가 없네.
흐음, 뭘까?”
가넷의 날카로운 추리에 내 어깨가 위로 튀어 올랐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가넷에게는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걸치며 상황을 부드럽게 넘겨보고자 노력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뭐.”
“아가씨도 아시는 게 없으신가 보네요.
텐의 이야기라면 다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다행히 가넷은 ‘각자의 사정’에 대해 더 파고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금 보석에 시선이 팔린 가넷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그러게.”
“게다가 레드 다이아몬드와 자수정이라니, 텐이 얼마나 아가씨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데요?”
잠시 진정 상태였던 심장이 그 말에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포기라는 말은 모르는 것처럼 진지하게 마주쳐 오던 그의 눈.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 뜨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밀어냈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은 걸까?
저 먼 제국 엔데버에서 다시 돌아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너는 다시 내게 돌아올 생각인 걸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떨리는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성이 머리를 차갑게 식히려 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아릿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무시하려 해봐도 그 낯선 고동이 저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만 같아서 더더욱 무시할 수 없었다.
이게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인 걸까, 텐.
더는 무시할 수 없는 답이 내 앞에 내밀어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 내 옆에 텐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언제나 그를 향해 칼을 휘두르던 것은 나였음에도.
파티를 위해 치장을 돕는 가넷의 손이 분주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준비했음에도 가넷의 성에 차기엔 부족했었나 보다.
파티 직전까지도 가넷은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정신이 없어 보였다.
“드레스를 어제 미리 입어보셔서 다행이에요.
오늘 처음 입어봤으면 시간이 모자랐을지도 모르겠어요.”
“들인 시간이 얼마인데 모자라다니…….”
“원래 아름다움이란 시간을 투자할수록 완성되는 법이랍니다.
아가씨께서도 보고 깜짝 놀라실 정도로 아름다워지실 거예요!”
가넷이 저리 장담을 하니 나도 모르게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가넷이 마음먹고 치장을 해줄 때마다 그 결과가 언제나 놀라웠으므로.
“게다가 오늘은 그 여자도 파티에 참석해 아가씨를 보고 계실 테니까요.
오늘만큼은 아가씨께서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 되어야 해요.”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이겨 무얼 하겠니.”
이미 그 추악한 내면을 보고 나니 그녀와 무언가를 경쟁하는 것조차 꺼림칙해졌다.
그녀와 비교당할 바엔 그저 그녀에게 정신 승리라도 안겨주고 싶을 정도였으니.
“물론 그렇지만요.
하지만 사람들은 특히나 시각적인 것에 약하답니다.
그 여자가 제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아 아가씨께 조그마한 흠결이라도 잡으려 드는 것, 저는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이렇게나 아름다운 분이신데 시간을 좀 덜 들였다고 비교 상대가 되어야 한다니요.”
그러나 치장에 있어서만큼은 가넷의 굳은 심지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수긍하는 척하며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부디 내가 파티에 늦지 않기를 바라면서.
“로즈 나이트 후작 영애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의 눈부신 조명이 나를 향해 쏟아지는 듯했다.
내가 걸어온 복도에도 적지 않은 샹들리에가 자리하고 있었으나 파티를 위한 연회 홀만큼 밝지는 않아 순간적인 명도 차이에 눈이 부셨다.
나의 등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파티 홀을 울리자 적지 않은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그리고 그들이 무의식중에 흘린 감탄의 한숨이 더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태로 뚜벅뚜벅 걸어 댄스홀이 내려다보이는 계단에 도착하자 모여있는 사람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귀부인들이나 영애들이 드레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귀족 남성들이 보석에 주목하는 틈을 타 나는 간단한 인사말로 참석해 준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여, 이번 파티는 저희 상단의 VIP 고객들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 상단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는 만큼, 저희 또한 그 관심에 보답해야 하겠지요.”
다행히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긍정적이었다.
상단주가 아닌 내가 나서서 파티를 이끌어 가는데도 별다른 의문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미 상단주를 대신해 맡고 있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는 VIP 고객들께 먼저 저희의 신상품을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고자 이 파티를 열었습니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저희 상단은 반년에 한 번 연회를 열어 신상품에 대한 소개와 설명을 위한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좀 급박해 여러 종류의 상품을 보여줄 순 없지만 앞으로 이 파티가 정기적으로 열린다면 더 많은 상품이 이곳을 거쳐 유통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신상품을 일찍 접해보실 수 있는 것은 물론, 다른 이들보다 더 빨리 물건을 구매할 수 있으실 겁니다.”
생각대로 이쪽을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지루해하는 기색이 섞였다.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나타내는 이들도 적잖았다.
‘이벤트’라는 단어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으나 독창성이나 참신함에서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파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파티를 충분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속마음을 숨기며 웃음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상단에서 취급하는 품목 대부분이 사치품이다 보니 VIP도 대부분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굳이 이런 파티에 참가하지 않아도 많은 상단에서 신상품이라며 그들에게 카탈로그를 보내거나 방문 판매를 시도했을 것이다.
이미 높아진 그들의 콧대에 이런 연회는 부족했던 거겠지.
“…괜찮으신가요, 아가씨?”
“물론이야.
처음부터 흥미를 끌 거라곤 생각 안 했어.
하지만 내가 앞으로 내세울 물품들을 보면 그런 생각도 싹 사라지고 말걸?”
내 자신 있는 말투에 잠시 위축되어 있던 가넷도 웃음을 되찾았다.
내 근처에 서있다 보니 사람들의 표정 변화를 직접적으로 봤던지라 내가 상심할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가넷의 어깨를 토닥이다가 제일 중요한 일에 대해서 물었다.
“타린은 어디에 있어?”
“지금 연회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연회 홀을 비우면 타린이 들어와서 아가씨 근처에 잔을 내려놓을 거랍니다.”
“좋아.
난 이제 기다리면 되겠군.”
파티장의 한가운데에는 보석 꽃잎의 자리를 비워둔 꽃다발의 뼈대가 있었다.
저곳에 그들이 가져온 보석을 끼우고 나면 꽃다발이 완성되겠지.
이미 눈치 빠른 몇몇 이들은 보석의 자리가 비워진 뼈대를 보며 에메랄드 귀걸이의 쓰임새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들이 재밌어하는 표정으로 꽃다발의 일부를 채워 넣으니 다른 이들도 그 뒤를 이어 하나둘씩 꽃잎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저걸 만드느라 장인들이 고생을 좀 했다지?”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꽃잎들의 위치를 전부 바꿨으니까요.
이미 틀이 정해져 있는 상태라 더 힘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서류와 씨름하는 동안 휴가와 쉬는 시간도 반납하고 저택 밖의 일을 처리해 준 가넷이었기 때문에 나는 새삼 고마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언제나 고마워, 가넷.”
“…아가씨를 위해서라면야.
언제든 맡겨만 주세요.”
잠시 쑥스러워하던 가넷은 금방 자신감 있는 모습을 되찾고 힘차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보다 나이 많은 가넷이 귀여운 동생처럼 보인다는 것은 나만의 비밀이었다.
계속 상석을 지키며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지켜보고 싶었으나 이 자리 역시 사교계의 장이었으므로 나 역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든지, 무시하는 시선을 보내든지 하나하나 무난하게 넘겨가며 그들을 응대하고 있으니 가넷이 천천히 다가와 다른 귀족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에메랄드 귀걸이가 꽤 채워진 것 같아요, 아가씨.”
“그러네, 슬슬 타린을 불러와야겠어.”
슬슬 일이 진행되어 가는 듯하니 가넷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긴장으로 굳어있는 그 얼굴이 혹시라도 데이지 퀴니의 눈에 띌까 가넷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무언의 응원을 보냈다.
“그럼, 다녀올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금방 올 테니까요.”
먼 곳에 가는 듯 비장한 어조로 말하는 가넷이 웃겨서 짧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로커스에게 독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가넷이 얼마나 겁을 먹었었는지 알고 있던 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가넷은 분명 얼마 걸리지 않고 돌아올 것이다.
타린이 내 잔에 뭔가를 탈 때까지만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뿐이니.
가넷이 연회장을 떠나고 나선 나 역시 부러 내 자리에 놓인 잔에 신경을 끄고 파티 홀 한가운데 서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본 데이지 퀴니는 타린에게 노골적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을 아는 입장에서 그녀를 보니 그 모든 움직임이 한 편의 희극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손 아래에 움직이는 줄 알았던 마리오네트가 사실 줄이 끊어진 상태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그 마리오네트가 너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글쎄, 과연 네가 그걸 스스로 알아챌 순 있을까…….”
시녀 타린이 자신에게 완전히 매수되었을 것이라 믿는 멍청함이나, 로커스가 자신의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아둔함.
……왜 이제야 알았을까?
데이지 퀴니는 그저 미혹의 향수로 얻어낸 관계로 다른 이들을 휘두르고만 있었을 뿐이라는 걸.
그녀에게서 그것을 앗아가 버리면 저런 저열한 수밖에 쓸 줄 모르는 어린아이일 뿐인데.
저런 이를 상대로 겁먹고 숨기만 했던 과거의 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타린이 음료 잔에 뭔가를 흘려 넣고, 그 모든 상황을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던 데이지 퀴니는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즐기고 있으렴.
잠시 후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이제 이 끈질긴 악연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이제 이 꽃다발의 완성도 코앞이로군요.”
나는 가장 가운데, 비어있는 틀을 매만지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자리가 비어있네요.
이 자리의 보석은…….
아, 그래요.
데이지 퀴니 공녀님의 에메랄드 귀걸이겠군요.”
처음부터 꽃다발에 관심을 보였던 몇몇 이들이 데이지 퀴니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노골적으로 책망하는 이는 없었으나 왜 보석의 자리를 채우지 않았는지 궁금한 기색이었다.
파티장에 배치해 둔 시종이나 시녀들을 통해 보석 꽃다발의 완성을 위해 에메랄드 귀걸이를 제공해 달라 부탁했으니 그 말을 여태껏 무시한 그녀에게 궁금증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 제가…….”
갑작스러운 관심과 질문에 부채를 펴 얼굴을 가린 데이지 퀴니의 말이 궁해졌다.
내가 잔에 든 음료를 마시고 파티가 아수라장이 되면 해결될 문제라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녀의 불안한 시선은 자꾸만 내 잔을 한 번씩 스쳐 지나갔다.
내가 그사이에라도 음료를 마셔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요?”
“제가…, 에메랄드 귀걸이를 잃어버린 것 같군요.”
“어머나, 어쩌다 그런 일을?”
“제가 분명 오늘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파티를 즐기다 어디선가 떨어뜨린 것 같아요.”
급조한 변명치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귀걸이를 챙겨왔다가 잃어버렸다니.
누구라도 수긍할 만한 변명이지 않은가.
“그게 정말인가요?”
“네.
안타깝네요, 영애.
꽃다발이 완성되었으면 더욱 아름다웠을 텐데.”
변명이 먹혀들어 가는 것 같자 데이지 퀴니는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붙였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건대, 아마도 나를 도발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에메랄드 귀걸이가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배정되어 있었던 만큼 이 자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꽃다발의 완성은 기대할 수 없겠지.
나는 그녀의 대답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미완성의 꽃다발을 들었다.
“정말로 안타까우신가요, 퀴니 영애?”
“…네?”
“꽃다발을 완성하지 못한 게 정말로 안타까우신지 물었어요.”
“…물론이죠.”
생뚱한 질문에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부채를 펼치며 그려낸 미소가 완벽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가 무엇인지 잘 안다는 듯이.
이때껏 그녀가 쌓아온 시간이 그녀에게 신뢰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을 깨버릴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대신 완성시켜 드려도 불만이 없으시겠네요.”
“…네?”
“퀴니 영애가 잃어버렸다는 에메랄드 귀걸이를, 제가 들고 있거든요.”
나는 찰나의 당황이 스쳐 지나간 데이지 퀴니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천천히 에메랄드 귀걸이를 그 자리에 꽂아 넣었다.
데이지 퀴니의 변명을 철석같이 믿은 이들은 잘됐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몇몇 귀족들은 데이지 퀴니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 귀걸이가 왜 제 손에 있는지 궁금해할 분이 많으실 것 같네요.”
“…….”
“분명 퀴니 영애께서는 이것을 잃어버렸다고 하셨는데… 제가 들은 이야기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데이지 퀴니와 로즈 나이트, 한때 치정 문제로 얽힌 적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족들은 흔한 이야깃거리였음에도 관심을 보였다.
오히려 지루하던 파티에 재밌는 볼거리가 생겼다는 눈치였다.
“제가 이 귀걸이를 발견한 것은…, 우리 가문에 오래도록 몸담고 있는 시녀에게서랍니다.”
“호오…….”
많은 귀족들이 재밌다는 눈길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퀴니 공녀가 잃어버렸다는 귀걸이가 나이트가의 수족에게서 발견되다니 흥미가 동하겠지.
“얼마 전 시녀가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더군요.돈에 눈이 멀어 충정을 판 자신을 벌해달라면서요.”
“저런!”
귀족들의 반응이 더욱 열렬해지고 있었다.
데이지 퀴니가 이때껏 쌓아온 완벽한 이미지에 금을 내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그들은 고고하던 데이지 퀴니에게 흠집이 될지도 모르는 이 자극적인 소문에 기꺼이 휩쓸렸다.
그러나 데이지 퀴니는 이 모든 소란에도 잔잔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의 당황은 어느새 완벽히 갈무리된 뒤였다.
마치 이런 소문 따위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 차분한 얼굴로.
“그녀는 병든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고자 이런저런 일에 손대다 못해, 결국 자신의 충성심마저 팔아버렸던 것이죠.”
“아, 저런…….”
“그러나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제게 잘못을 고백하며 벌을 내려달라 간청했습니다.그동안의 신의에 보답하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요.”
무슨 이야기든 약간의 신파가 섞이면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법이다.
그들은 데이지 퀴니를 힐끗거릴 새도 없이 이야기에 집중한 듯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잘못을 빌면서 말하기를…….”
“…….”
“은발의 영애가 자신에게 귀걸이를 주며 정보를 요구했다 하더군요.”
이미 대충의 스토리를 짐작하고 있었을 텐데도 그들은 그 대목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을 쏟아냈다.
믿을 수 없다는 말과 사실이 아닐 거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섞이며 파티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대부분 데이지 퀴니가 그랬을 리 없다는 데 무게추가 기울어졌다.
그녀에게 흠집이 생기길 바라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쌓아온 이미지가 그만큼이나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들은 이 이야기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퀴니 영애.제 시녀의 말이 사실인가요?”
“안타깝게도…….”
여전히 고고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데이지 퀴니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의 소란에서 한 발짝 멀어져 있는 듯 고요한 낯이었다.
이때껏 지켜온 사교계의 꽃이란 자리에 걸맞게, 그 누구보다 우아한 가면이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인 것 같네요.”
“…그러신가요?”
“네.제 귀걸이를…, 시녀가 가지고 있었다고요?”
데이지 퀴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정말로 그녀는 모르고 있었구나, 생각했을 정도로 맑은 표정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내게는 그저 천연덕스러운 그 연기에 본능적인 거부감만 치솟을 뿐이었지만.
“행실이 옳지 못한 시녀가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내 불찰이에요.제 물건이니 저라도 잘 챙겼어야 했는데…….그 탓에 좋은 자리를 망치게 되었군요.미안해요, 나이트 영애.”
고상하게 돌려 말했으나 직설적으로 풀이해 보자면 ‘시녀가 훔쳐 가놓고 나에게 뒤집어씌우고 있구나.
마음씨 넓은 내가 넘어가 줄 테니 나에게 감사하렴.’
정도겠군.
“행실이 옳지 못한 시녀라…….”
“물론 나이트가에서 그런 것을 가르치진 않았으리라 믿어요.하지만 저로서는…….”
거기까지 말한 데이지 퀴니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가련한 표정의 데이지 퀴니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나저나 그 와중에도 우리 가문의 시녀 교육이 왜 그 모양이냐는 이야기를 저렇게나 고상하게 돌려 말하다니, 과연 쉽지 않은 상대였다.
물론, 이렇게 쉽게 해결될 거라곤 나 역시 예상하지 않았지만.
“퀴니 영애의 말씀으로는, 시녀가 착각을 했고 영애께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거군요.”
“그래요, 영애.오랜 기간을 함께한 시녀의 말을 더 신뢰할 수도 있으시겠지만…, 저는 정말 그런 적이 없어요.”
호소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많은 이들이 동화된 듯했다.
그들은 어느새 데이지 퀴니에게 넘어간 듯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렇군요.퀴니 영애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게 사실이겠죠.”
“물론이에요.”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서 햇빛이 떠오르는 듯 후광이 비쳐 보였다.
저 아름다운 외모를 고작 저런 곳밖에 쓰지 못하다니.
“그렇다면 저와 잔을 나누어 주시겠어요?”
“…네?”
또 한 번, 데이지 퀴니의 얼굴에 당황의 기색이 묻어났다.
이야기를 겨우 잘 수습했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겠지.
예법에 능통한 그녀인 만큼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반응이었다.
“제 아랫사람의 문제를 너그러이 덮어주시는 영애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부디 제 잔을 함께해 주시겠어요?”
귀족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자신이 완벽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귀족적으로’사과를 하곤 했는데 자신의 잔을 상대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나의 요청도 그런 관점으로, 내 잘못을 인정하여 잔을 나누어 달라 부탁한 것이었다.
그녀가 내 시녀의 잘못이라고 ‘귀족적으로’
몰아갔으니 나 역시 ‘귀족적으로’
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퀴니 영애는 사교계의 꽃이죠.흔쾌히 그 잔을 받아주실 거랍니다.”
“잘되었군요, 영애.”
데이지 퀴니의 감쪽같은 연기에 속아 넘어간 몇몇 이들이 데이지 퀴니의 등을 떠밀었다.
내가 먼저 실수를 인정한 꼴이 되었으니, 이번에도 데이지 퀴니가 나를 이겼다 생각하는 거겠지.
어차피 그들에겐 씹고 뜯을 소문이 필요할 뿐이니 이 정도 마무리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데이지 퀴니든 로즈 나이트든 맛난 먹이였으니.
“잔을 가져오렴.”
나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종 중 하나를 시켜 새로운 잔을 가져오도록 했다.
모두의 앞에서 잔을 나누어 그녀에게 내밀 생각이었다.
아까 전부터 하얗게 질린 안색을 숨기지 못하는 데이지 퀴니를 보고 있으니 그럴 타이밍이 아님에도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그러나 끝나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는 법이었다.
나는 평소의 미소 띤 얼굴을 완벽하게 유지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잔을 가져왔습니다.”
“좋아, 영애와 내게 잔을 나누어 주렴.”
시종은 진지한 낯으로 내 잔에 담겨있던 음료의 반을 새 잔으로 옮겨주었다.
나는 시종이 데이지 퀴니에게 잔을 바치는 모습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저의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영애.”
“…저, 저는…….”
데이지 퀴니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어물거렸다.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 보고 싶은 모양인데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어 어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퀴니 영애에게 축복이 깃들기를.”
“…나이트 영애에게…, 축복이 깃들기를…….”
꺼질 듯한 목소리로 속삭인 데이지 퀴니가 여전히 잔을 잡고 망설이는 사이 나는 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머금었다.
데이지 퀴니의 흔들리는 동공이 나를 향하고,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모르는 척 빙긋 미소를 그려 보였다.
“…퀴니 영애?왜 잔을 들고만 계시는지.”
“영애, 이제 음료를 드시면 된답니다.”
그녀의 편을 들어주던 이들이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챈 듯 은근슬쩍 무게를 실었다.
예법에 대해 누구보다 엄격하던 이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들로서도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데이지 퀴니가 내 잔에 독을 탄 이상, 그녀의 이상 현상은 그걸로 끝이 아닐 것이다.
‘로커스의 말로는, 세 모금을 마시면 잠이 들 거라고 했었지…….’
파티가 시작하기 전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찾아왔던 로커스를 떠올렸다.
혹시라도 내 몸에 악영향이 갈까 봐 파티가 시작되기 전까지 약물 분석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그였다.
그런 그가 한 말이니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 음료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퀴니 영애?”
두 모금째 음료를 마시며 천연덕스럽게 묻자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데이지 퀴니는 이제라도 나를 말려야 하는지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제 안위에 대한 걱정뿐인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겨우 내리눌렀던 혐오감이 불쑥 치솟았다.
“저와 잔을 나누기…, 싫으신 걸까요?”
“그, 그건…….”
“그게 아니라면 역시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신다는 소문이 사실이신가 보군요.”
“그게 무슨…….영애,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데이지 퀴니가 절박하게 말했다.
나에게 주목하고 있던 시선들이 또 다른 호기심을 가지고 데이지 퀴니에게 향했다.
평소 나긋나긋한 꽃의 역할을 잘해오던 그녀가 드물게 큰 소리를 내고 있으니 이 역시 그들에게는 즐거운 흥밋거리일 터였다.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함께 잔을 들어주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데이지 퀴니는 잔을 들지 못했다.
저 잔에 자신이 한 짓을 알고 있으니 두려움에 잔을 들지 못하는 게 당연하겠지.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점점 뾰족해지기 시작했다.
데이지 퀴니와 내가 잔을 나눴다는 사실을 두고 어떤 입방아를 찧을까 고민 중이던 그들에게 데이지 퀴니의 망설임은 쓸데없는 시간 끌기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테니.
귀족들이란 인내심이 존재하지 않는 족속들이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귀부인 중 하나가 데이지 퀴니의 태도를 지적하려 들자 부들부들 떨리고 있던 데이지 퀴니의 손이 잔을 놓치고 말았다.
언제나 완벽한 예법을 구사하여 모든 귀부인과 영애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그녀답지 않은 실수였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이 내가 기다려 온 타이밍임을 알아챘다.
나는 세 모금째의 음료를 삼키며 약효가 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고민해 보았다.
“…영애?”
그러나 내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음료를 마시자마자 기울어지는 시야를 알아챈 후였다.
“로즈 나이트 영애가 쓰러졌다!”
“영애……!누, 누가 의원을…….”
“세상에, 이게 무슨…….”
파티의 주최자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방금까지도 음료를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도.
데이지 퀴니는 제가 원한 그림 그대로 실현이 되고 있음에도 하얗게 질린 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예상과는 많은 게 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것이다.
‘왜 이렇게 약효가 늦게 돌았지?’
게다가 독이 든 잔을 나누자는 말에 그것을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았는가.
그런 순간에 로즈 나이트가 쓰러졌다고……?
“의원이 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길을 비켜주십시오.”
나이트가에 상주하는 의원과 나이트 가문의 내외까지 직접 행차했다.
이런 순간에 로즈 나이트가 독에 중독되었음이 알려진다면?
“아, 아무래도…….”
“우리 로지가 왜 갑자기 쓰러진단 말인가.어서 말해보게!”
주변의 모든 소리가 귀를 찢을 듯 파고들었다.
데이지 퀴니는 귀를 틀어막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땅에 발이 붙어버린 듯 한 발자국도 떼기 어려웠다.
“실례지만 영애께서는 독에 중독되신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로지가 중독을……?!”
그 자리에서 날뛰기 시작하는 후작과 그를 말리기 위해 달라붙는 시종 시녀들, 그리고… 데이지 퀴니를 향해 쏟아지는 의혹 어린 시선들.
“그러고 보니…, 퀴니 영애가 잔을 받지 않았었죠?”
“누구보다 예법에 철저한 영애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렇다면 퀴니 영애가……?”
시작은 작은 수런거림이었으나 이미 데이지 퀴니와 로즈 나이트의 실랑이를 목격한 귀족들이 많았다.
그 말을 입 밖에 내든 내지 않든 이미 모두의 마음속에 데이지 퀴니를 향한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귀족이 귀족을 해하다니.”
“그것도 파티 연회에서 그런 일을 꾸미다뇨.세상에, 그렇게 안 봤는데…….”
“한동안 사교계가 떠들썩해지겠군.”
그들의 속삭임은 칼날처럼 데이지 퀴니를 스치고 지나갔다.
애시당초 그들이 목소리를 낮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까까지는 씹고 뜯을 소문 거리가 필요한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귀족이 귀족에게 해를 입힌 상황이었다.
로한에서 귀족이 귀족을 해하는 것은 중범죄에 해당했으니, 아무리 태생부터 고귀한 공녀라고 해도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귀족들의 수군거림에 변명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그녀가 텅 빈 눈동자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아무리 변명하고 부정해도 그들의 귀엔 들리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아 버렸기 때문에.
“데이지 퀴니 공녀, 나와 함께 가주셔야겠소.”
겨우 진정한 나이트 후작이 데이지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순간 그 자리의 모든 귀족들은 목도하고 말았다.
억누르지 못한 경멸과 분노로 입술을 떨고 있는 나이트 후작의 얼굴을.
* * *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된 건데?”
“파티장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더니 재판에서는 자신이 아니라고 끈질기게 호소하더군요.그날 파티장에서도 봤지만 연기 하나는 일품이더라구요.퀴니가를 수색해서 발견해 낸 ‘미혹의 향수’와 독약이 아니었으면 또 속아 넘어갔을지도 몰라요.”
“그럴 줄 알고 이중, 삼중으로 덫을 놓은 거잖아.어쨌든 생각한 대로 풀렸으니 다행이야.”
겨우 안심하고 침대에 기대니 골 난 표정의 가넷이 볼을 부풀렸다.
어딜 봐도 마음에 안 든다는 걸 온몸으로 표출하는 모양새였다.
“왜?”
“잘됐다뇨!그날 수면제 때문에 잘못 넘어지셔서 멍까지 드셨잖아요.”
피부가 희어서 시퍼렇게 멍든 부위가 너무도 잘 보였던 게 문제였다.
어떻게든 감추려고 애를 써봤지만 하루가 되기도 전에 가넷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가넷이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집무실에서 일을 하시던 아버지와 연무장에 계셨던 어머니까지 놀라서 달려오실 정도였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효과가 그렇게 빠를 줄 몰랐던 내 실수지.”
게다가 그 덕분에 데이지 퀴니가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있었으니 이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처럼 확실히 하지 않았으면 퀴니 공작가가 수를 써서 데이지 퀴니를 빼냈을 테고, 그러면 이렇게 깔끔하게 일이 마무리되기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