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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로즈마리
“…안녕하십니까, 영애.”
“오랜만이네요.그레이 경이 직접 찾아올 줄은 예상 못 했어요.”
카네르바 그레이와 응접실에 마주 앉아있으려니 어색함보다는 의아함이 먼저였다.
그를 통해 편지를 전달하고자 하기는 했지만 그가 저택을 직접 방문하다니?
이때껏 그랬듯이 토네이도를 통해 연락해 올 줄 알았던 내게 카네르바 그레이의 방문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편지를 보내주시기에 받아보긴 했습니다만…….”
“……?”
“저보단 황자 전하께 전달해 드려야 할 내용인 것 같더군요.제 생각이 맞습니까?”
“네, 맞아요.텐에게 직접적으로 편지를 보내는 건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요.물론 이미 눈에 띌 일은 다 하긴 했지만…….제가 사교계에서 큰일을 하나 일으킨 시기인지라.”
이미 소식이 전해졌던 듯 카네르바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미안함도 담고 있는 채였다.
“제 이야기에만 바빠 영애께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군요.몸은 좀 어떠신지요.독에 당하셨다 들었습니다.”
“금방 나았을 정도로 별문제 없었어요.중독 상태도 그다지 심각한 게 아니었구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고 답한 카네르바 그레이는 망설임이 남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표정 관리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인지 한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질렀음에도 기색이 가려지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나 보군요.”
“사실, 이 이야기를 영애께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 황자 전하께 충성을 바친 몸이지만 황자 전하께서는 저에게 충분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셔서요.”
나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겠다는 뜻으로 그에게 몸을 조금 기울였다.
카네르바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응접실을 한번 둘러봤다.
“비밀은 지켜주시겠습니까?”
“장담하죠.지금 이곳엔 경과 나 둘뿐이에요.그리고 경이 원한다면 언제든 비밀을 엄수하겠어요.”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된 카네르바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번 사신단은 황자 전하를 보필하기 위해 꾸려져 있습니다.로한 제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신단의 명단이 공개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죠.황자 전하가 사신단과 함께 움직이고 계신다는 소식이 전해진다면 전하를 노릴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요.”
“…….”
“지금 엔데버는 오랜 황위 다툼으로 어지러운 상태입니다.황자 전하가 자리를 채 잡기도 전에 둘째 황자가 죽어버려서 손쓸 틈도 없었지요.황자 전하는 황위를 노리는 귀족들의 음모로 하루하루를 지새워야 했습니다.눈을 뜨면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형편이었죠.”
나는 카네르바 그레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될 거라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곳에 가면 텐이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가 어떤 고생을 하건 간에 그는 주인공이었고 누구보다 빛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누구보다 상냥하고 아름다웠던 여주인공은 내게 독을 쓰려다 들켜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녀를 사랑해 모든 것을 바칠 듯이 굴었던 이들은 그저 약에 취해 제 진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용당한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이곳은 더 이상 소설 속이 아니었으니 그들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만 펼쳐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이제 내 현실이었다.
“겨우 황자로서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아가나 싶었는데 황제 폐하는 단 한 번도 그분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둘째 황자가 죽기 며칠 전부터 침전에 박혀 두문불출하시는가 싶더니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니까요.”
“…….”
“가끔 중요한 업무에 대한 서류를 내려 보내시긴 했지만 그 이후로 황제 폐하를 뵌 분은 시종장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얼마 전까지는요.”
나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가 그에게 저지른 일이 그에게 어떤 여파를 미쳤는지 나는 알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참다못한 황자 전하께서 폐하께 독대를 청하셨습니다.낮에는 시종장의 거부로 뵐 수 없으니 야심한 밤에 몰래 침전 앞을 찾아가셨다더군요.그때 폐하를 뵙고 난 후 전하는 이곳으로 사신단을 꾸려 오신 겁니다.”
“…텐은 이곳에 온 이후에 무엇을 했나요?”
“대부분 영애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영애가 참석한 파티에 참석하신다든가, 영애가 세우셨다는 고아원에 들른다든가 하면서요.”
나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카네르바의 시선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그가 나를 비난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도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아, 가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몇 가지 하시긴 했습니다.”
“그게 뭔가요?”
“로한 제국의 황실 마법사들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신 모양이었습니다.
언제 한번 나이 지긋한 남자가 도로테아궁에 찾아와 황자 전하를 알현하고 갔었거든요.
나중에 황자 전하께서 황실 마법사였다고 알려주셔서 알았습니다.”
마법사를 만나고 있었다고……?
텐이 마법사를 만나야 할 이유가 뭐였을까?
엔데버의 황제를 만나고 사신단을 꾸리더니 로한으로 와 마법사들을 찾아다닌다니…….
“그럼 텐은 지금 어디 있나요?”
“그게, 요즘 들어서는 아침 일찍 궁을 나서서는 저녁 늦게 돌아오십니다.
그 시간 동안은 어떻게 해도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어서 영애께 찾아온 것입니다.
영애라면 황자 전하가 그리 행동하시는 이유를 알아내 주실 수 있으실 것 같아서요.”
그는 마치 내게 부탁이라도 하듯 간곡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내가 텐의 돌발 행동을 말려주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선 타국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속 시원히 터놓을 곳도 없었을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로 내가 텐의 편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입증만 발급되면 내가 황궁으로 가 텐을 만나겠어요.오늘 저녁에 그를 보면 제가 황궁으로 갈 테니 시간을 내달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영애.부디 부탁드립니다.”
카네르바 그레이의 간절한 표정이라든가 살이 좀 빠진 것 같은 얼굴을 보면 그의 마음고생이 짐작이 갔다.
나는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과 함께.
“텐은 어디에 있어요?”
“응접실에서 영애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입궁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카네르바 그레이였다.
나도 모르게 당연히 텐이 마중 나올 거라 생각했었나 보다.
카네르바 그레이를 보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텐이 제멋대로인 나에게 지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서.
“사실 전하께서 직접 마중 나오려고 하셨는데 제가 막았습니다.
영애를 주목하는 시선이 많기도 하고…….”
거기까지 말한 카네르바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처음 봤을 때는 그 무엇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 철벽같은 이미지였는데 조금 가까워지고 나니 의외로 잔소리 많은 부관 같은 이미지가 강했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고.
“몰골이 말이 아니셔서 말입니다…….”
“몰골이라뇨?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궁을 비우시는 동안 끼니를 잘 안 챙기신 것 같습니다.
엔데버의 귀족들이 보면 로한에서 황자 전하를 굶기고 있다 착각할 겁니다.”
“…그 정도로 말랐다고요?”
텐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입장인 카네르바가 그리 말하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굶기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말랐다니.
텐은 나가서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현재 궁에는 시중 들 사람이 없습니다.황자 전하 외에는 다 먼 곳에서 할 일을 하고 있을 겁니다.두 분께서 만나시는지도 모르게 말입니다.”
옆에서 카네르바가 싱글싱글 웃으며 뭐라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미 굶어서 뼈가 드러나는 텐을 상상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흘려들었다.
만나면 한 소리, 아니 두세 소리는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전투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응접실 복도가 나타나자마자 카네르바 그레이가 나를 불러 세웠다.
“죄송하지만 급한 업무가 있어 저는 여기서 다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경도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었나요?텐을 설득하려면 경도 있는 게…….”
“아,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입니다만, 황자 전하께서 따로 명령을 내리신 게 있는지라…….”
그래, 충직한 신하에겐 주군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바로잡을 의무도 있지만 주군이 시키는 일을 정확하게 해낼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한 법이겠지.
나는 결국 그를 보내고 익숙한 복도를 걸어 응접실 앞에 섰다.
이 문을 열면 그가 있겠지.
응접실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할 시녀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아서 나는 떨리는 손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똑똑.
“전하, 로즈 나이트입니다.”
“들어와.”
또렷한 목소리가 허락을 담고 떨어지고 손을 들어 응접실 문을 연 나는 재빨리 그 안에 발을 들였다.
햇볕이 내리쬐는 소파,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된 테이블, 그리고… 내게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텐까지.
나는 카네르바의 이야기에 울컥한 마음을 가다듬을 생각도 않고 빠르게 걸어 텐의 맞은편에 앉았다.
예의고 나발이고 그의 상태에 대한 잔소리를 한참 동안 늘어놓을 생각이었는데…….
“오랜만이네요, 아가씨.”
“…너…….”
카네르바가 ‘몰골이 말이 아니’라고 표현했던 텐은 저번보다는 확실히 말라 턱선이 더 또렷해지긴 했으나 몰골을 운운할 정도는 아니었다.
몇 끼니를 안 챙긴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 ‘해골’텐 정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너 도대체…….”
“그렇게 편히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무척 기쁘네요.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싱긋 웃은 텐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자 금발이 사르륵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순금을 녹인 듯 햇빛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나는 그 빛깔에 홀리듯 시선을 고정하자 그의 눈이 더더욱 깊게 휘어졌다.
“아가씨.”
“…왜?”
텐은 잠시 쓰게 웃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가 테이블을 돌아 내 앞에 무릎 꿇는 그 순간까지 나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있을 뿐이었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는 그 순간 누구보다도 성스러운 존재처럼 보여서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아가씨께서는 이제야 저를 봐주기로 하셨군요.”
“…….”
텐이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 내가 감히 모든 것을 알 순 없겠지만, 이때까지의 내 태도가 그를 상처 입혀왔다는 것은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 말하는 텐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어려있었으니까.
아니라면 내가 예전처럼 말을 놓고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뻐할 리가 없었다.
“제가 돌아오고 싶었던 곳에 비로소 돌아온 느낌이 들어요.아가씨께서 저를 ‘텐’으로 봐주시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쓸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처연해서 그가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말로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 그 표정에는 나를 원망하는 기색조차 엿보이지 않아서, 나는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아가씨께서 독에 당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가씨께서 무사하길 빌며 저택으로 달려가는 것뿐…….혹시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파고들어서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지옥보다 끔찍한 악몽에 잡아먹히는 기분이었어요.세계에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는 느낌이 어떤 건지 그때 깨달았죠.아가씨의 존재가 제게 어떤 의미인지 그 순간보다 더 실감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텐, 나는…….”
“그런데 저택에 도착해서 들어보니 아가씨는 독이 아니라 수면제를 드셨던 거고, 그 모든 게 데이지 퀴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더군요.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잘 지내고 있는 사이 아가씨는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아니야, 나뿐만 아니라 너 역시 치열하게 살아가려 노력했잖아…….
너 역시 고통스러웠을 텐데, 너도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 왜 내 걱정만 하고 있는 거야?
“제가 아가씨의 위험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어요.저는 아직 입지가 불안정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신세니까요.황태자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좀 나아지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아서…….”
“아니, 아니야.
텐, 네가 나를 위험에 빠뜨린다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
마음이 아파서 울컥한 감정을 그대로 내뱉어 버렸다.
울듯이 떨리는 내 목소리에 텐이 고통스러운 듯 눈매를 찡그렸다.
“제가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 아닐지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니, 사실은 어떤 길이 아가씨를 위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어떤 길도 아가씨에게 위협이 될까 봐 두려워서…….”
“…내가 도와줄게.
네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지 내가 도울 거야.
내 걱정은 하지 마, 난 괜찮을 테니까.”
그의 볼에 손을 대니 그가 얼굴을 기대어 왔다.
눈을 감고 내 손에 기대는 그의 얼굴에 평온함이 느껴져서,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겨우 짓씹어 삼켜냈다.
의지할 곳 없이 떠돌던 나를 지탱해 주었던 건 너였는데, 나는 네게 안식처조차 되어주지 못했구나.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이루어 줄게.약속해.”
그 말에 눈을 뜬 텐은 정말로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제 볼을 지탱해 주던 내 손에 깊게 입 맞추는 그의 눈에 넘실거리는 애정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그렇다면… 지금 키스해도 될까요, 아가씨?”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내 무언의 긍정을 알아들은 그가 몸을 기울이며 드리워진 그림자가 눈을 아프게 찌르던 빛을 가렸다.
그의 혀가 입술 깊숙이 파고듦에 따라 차분했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응, 흐읏…….”
“참지 마세요.그러다 입술에 상처 날까 걱정돼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아내려는 나를 본 텐이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이곳은 도로테아궁의 한복판인 응접실이고, 창문으로 햇살이 비쳐들 정도로 맑은 날이었다.
지나가던 사용인에게 이 꼴을 들켰다간 얼마나 부끄러울지 상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주변에 모든 시중인들을 물려두었어요.사신단 일행도 갖가지 이유로 쫓아냈고요.”
“뭐?”
마치 이런 일을 예상한 듯한 조치가 아닌가.
내가 당황하자 텐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유두를 깨물었다.
“앗, 으응…, 으흣.”
츕츕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노골적으로 핥아오는 그 때문에 낯부끄러운 신음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아가씨께 귀가 많이 달라붙었을 것 같아 하나하나 골라내기보단 다 쫓아내는 걸 선택했거든요.이제 보니 좋은 선택이었네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에는 진심으로 제 결정에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이 어려있었다.
거기 담겨있는 속내를 파악해 버린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가리지 마세요, 아가씨.”
“…부끄러운걸.”
텐은 새삼스럽다는 얼굴을 하며 망설임 없이 내 손을 떼어냈다.
벌을 주듯 내 두 손을 결박한 채 키스해 오는 그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풀어 헤쳐진 치마 사이로 그의 다른 손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텐……?”
“생각해 보니 아가씨 취향은… 이렇게 묶인 채로 하는 거였죠?”
어딜 봐도 장난치는 게 분명한 미소가 어려있는 얼굴로 텐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 속삭임에 텐이 처음 우리 저택에 오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그거 내 취향 아니라니까?”
“뭐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로 아가씨가 충분히 즐기셨다면 이미 취향을 초월한…….”
“조용히 해!”
발갛게 달아올랐을 게 분명한 얼굴로 빽 소리치자 텐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저런 표정을 할 때의 텐은 내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볼을 깨물곤 했다.
예상대로 볼에 아릿한 아픔을 남기고 멀어진 텐을 흘겼다.
“읏, 아파…….변한 게 없구나, 텐.”
“아가씨가 저를 상대해 주지 않으시니 변할 리가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텐이 얄미워 빤히 노려봤지만 텐에게는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았다.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내 긴장을 풀어주는 듯했던 손이 얇은 천 조각 너머로 밀지를 꾹 눌러온 것이다.
깜짝 놀라 그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바르작거리자 짧게 웃은 텐의 손이 더더욱 대담해졌다.
천 조각을 아예 옆으로 밀어낸 그의 손가락이 젖은 틈새를 가볍게 문질렀다.
“흐읏……!”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이성과 달리 몸은 그의 손길에 착실히 반응하고 있었다.
그가 주는 쾌락의 맛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의 손가락이 젖은 틈새를 가르며 체온에 비해 차가운 공기가 속살에 달라붙었지만 그 감각조차도 야하게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나는 오랜만의 색사에 너무도 쉽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유려하게 움직이던 그의 손가락이 옴죽거리는 입구에 와 닿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방황하던 내 시선이 그와 마주친 순간, 텐의 눈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열감을 목도하고 말았다.
내가 그에게 너무도 쉽게 반응했던 만큼 그 역시 내게 곧바로 욕정했다.
“아가씨께서 솔직하게 반응해 주셔서 기뻐요.”
이성은 여전히 부끄러움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성을 잠시 눌러놓을 때였다.
이미 온몸이 그를 향해 열려있었으므로.
내 반응을 확인한 그는 입구 근처에서 맴돌던 손가락을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오랜만이어서일까, 그의 손가락이 안쪽을 파고드는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중간중간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내벽 이곳저곳을 문지르는 감각도 생생하게 와 닿았다.
그는 간간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참아내듯 입술을 물었다.
“으응…….”
짧게 흘린 신음에 그가 고개를 내리더니 입술을 부딪쳐 왔다.
혀와 혀가 질척하게 얽히며 타액이 입가를 적셨다.
잡아먹을 듯 날뛰는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학학대고 있으니 내가 숨 쉴 틈을 주듯 입술이 떨어졌다.
“하으응……!”
어느새 질구에서 빠져나온 손가락이 음핵을 문지르며 새로운 성감을 일으켰다.
무의식중에 허리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내 흥분을 눈치챈 그가 음핵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희롱했다.
“으으응…, 앗, 아흐…….”
이전까지의 간질간질한 쾌락과는 달리 뇌로 직접 꽂히는 듯한 쾌락이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열리고 그의 손길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예뻐요, 아가씨.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꿀을 녹여 부어내도 저보다 더 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풍성한 치맛자락을 들치는 손길은 달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직 한낮의 시간임을 증명하듯 응접실 내부로 쏟아지는 햇빛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어떤 표정, 어떤 몸짓을 하고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 잘 보였다.
그는 내가 그를 쳐다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시선에 진득이 남아있는 욕정을 숨기지 않았다.
쾌락에 힘이 풀린 다리 한쪽이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텐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리고, 내 위에서 몸을 물린 그는 아래를 훤히 드러낼 수 있도록 펼쳐져 있는 치맛자락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으아앙……!아으응…….”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아래를 핥아 올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간간이 닿아오는 따뜻한 입김 또한.
말랑말랑한 혀가 음핵을 꾹꾹 누르거나 휘저으며 예민한 감각을 희롱했다.
움찔거리는 허리를 그의 두 손이 붙잡고 있는 탓에 도망칠 기회마저 박탈당해 버렸다.
젖은 살덩이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내질렀다.
텐은 끈질기게 내 쾌감을 종용했다.
내 몸의 주도권을 그에게 빼앗기는 감각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가 주는 쾌감을 받아들여 신음하며 우는 것뿐이었으니.
그가 쏟아붓는 감각의 홍수에서 나는 소파를 붙잡으며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니, 사실은 어디로든 떨어질 것 같은 부유감이 무서워 붙잡을 것을 찾아 헤맸던 것도 같다.
흐릿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본 순간 우연처럼 그와 눈이 마주쳤다.
색에 젖은 얼굴이 성스럽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햇볕이 내리쬐는 그의 얼굴은 남녀노소를 떠나 모든 인간을 홀릴 듯 아름다웠다.
그런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보란 듯이 혀를 움직였을 때는 촉각적인 감각보다도 시각적인 쾌락이 뇌를 잠식했다.
방금 전의 여유는 장난이었다는 듯 텐은 나를 더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쾌락의 진원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움찔거리던 허리가 더욱 격렬하게 들썩였다.
그러나 그런 나를 붙잡는 텐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나는 그가 주는 감각에 오롯이 몸을 맡겨야만 했다.
그가 착실히 쌓아 올린 성감이 폭발을 앞두고 있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소파를 붙잡고 있던 팔이 굽어지고 온몸이 곧 다가올 감각을 기대하듯 술렁였다.
나를 덮쳐버릴 파도의 크기는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나는 두려움과 쾌락에 잠식되어 울듯이 도리질을 쳤지만 텐은 멈추지 않았다.
아, 쾌락에 집중된 온 신경이 하얗게 불타올랐다.
텐이 피워 올린 불길은 몸 구석구석을 내달린 끝에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마저 불태웠다.
“읏, 으아아앙……!!”
통제를 벗어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도 느낄 여력이 없었다.
그저 뇌리를 새하얗게 물들인 감각이 너무 강렬해서 그곳에 파묻혀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오르가슴의 여파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몸을 일으킨 텐이 장난스레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내 시선을 눈치채고 부러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 노골적인 움직임이 방금까지의 행위를 다시금 떠오르게 만들었다.
내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자 텐이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배부른 포식자처럼.
그에게 딱 맞게 제작되었을 제복은 그의 부푼 앞섶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깜짝 놀라 시선을 여기저기로 굴리고 있으니 그가 내 속옷과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왜……?”
왜 끝까지 가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그가 흥분했음이 이토록이나 명백한데 여기서 내 옷차림을 정리해 준다고?
“피임차를 드시지 않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 이런 상황이 될 줄 전혀 몰랐으니 피임차를 마시고 왔을 리가 없다.
나도 염두에 두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러니 먼저 배려해 준 그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할 텐데, 어째서 아쉬움이 먼저 나를 찾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런 속내를 들킬까 싶어 시선을 피해버렸다.
“하지만 텐 너는…….”
“…이 이상 하면 제가 참을 자신이 없을 것 같아서요.”
아연한 나와 달리 텐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듯 상쾌하게 미소 지었다.
“곧 카네르바 그레이가 시녀를 보내올 테니 욕실에 다녀오세요.
새 드레스도 준비해 드릴게요.”
“…너,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해 두고…….”
그 태연한 반응에 기가 막혀 노려보자 텐이 딴청을 피우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내 옷차림을 점검해 주었다.
“다시 응접실로 돌아오시면 카네르바 그레이까지 포함해 셋이서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죠.”
“…알겠어.”
응접실을 노크한 시녀의 등장으로 더 이상 그에게 따져 물을 수 없었다.
어쩐지 텐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시녀의 뒤를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두 분, 이야기가 잘되셨나 봅니다.”
응접실로 돌아온 나를 능글맞은 웃음으로 반기는 카네르바 그레이를 보고 있으니 간신히 식혔던 두 볼이 달아올랐다.
텐이 그에게 일일이 이야기할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사용인을 물린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남녀가 시녀를 불러 욕실에 다녀올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표정 관리에 실패한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 카네르바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카네르바가 텐의 옆자리에 앉자 텐의 얼굴이 파삭 구겨졌다.
“경이 왜 여기에 앉지?”
“영애 곁에 앉고 싶으신 건 이해합니다만, 이리 박해하시다뇨.”
“하하…….”
유치한 말다툼을 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으니 어쩔 줄 모르는 내 심정을 눈치챈 것처럼 동시에 입을 다무는 그들이었다.
“영애께서 눈치를 주고 계십니다, 전하.”
“경은 그 입을 다물라는 내 눈치는 보이지 않는가 봐?”
“…그래서 내 눈치를 본다는 거야, 안 본다는 거야?”
원래 저런 사이인 것인지 말을 나누는 두 사람은 퍽 친밀해 보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더 이상 지체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뒤였으므로 나는 텐을 향해 암묵적인 눈짓을 보냈다.
텐은 짧은 침음성과 함께 잠시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진지한 낯으로 카네르바를 바라보았다.
“경은 오늘 듣는 이야기를 비밀에 부쳐줄 수 있나?”
“…새삼스러운 말입니다만, 제가 전하께 충성을 맹세했던 것은 알고 계시죠?”
그러나 텐은 카네르바의 반응을 가볍게 넘겨버리고 나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 의미가 명백해서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겠다 다짐한 순간부터 이미 결심한 것이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를 돕기로.
그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제가 제국에 간 뒤 있었던 일을 카네르바가 말했다고 들었어요.”
“맞아, 저택에 왔을 때 짧게 들었어.”
“전하께서 홀로 폐하를 뵙고 오셨다는 이야기까지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후에 사신단을 꾸리셨다는 것도요.”
“정확히는, 그날 폐하를 뵈었기 때문에 로한에 왔던 거라고 해야겠지만.”
텐은 침중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찻잔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일순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그 순간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가 놀랄 정도로 무거워서 나도 모르게 내 두 손을 맞잡고 말았다.
“제가 처소로 찾아뵌 날, 폐하는 끝내 답을 주지 않으셨었어요.
그게 제 청에 대한 거부임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너무도 답답해서 강제로… 침전의 문을 열고 말았는데…, 폐하는 그런 저를 책하지 못하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
“…마법에 걸려 하루 중 대부분을 침대에서만 보내는 듯했어요.
처음엔 독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 모습은 독으로 설명할 수 없었어요.
자정이 되면 일어나 서류를 처리하고 다시 누워있는 인간이라니…….
그 일련의 행동을 하면서 폐하는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어요.”
…마법?
흠칫한 나와 달리 카네르바 그레이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께 마법을 쓰다뇨!
누가 그런 짓을…….”
“가장 의심스러웠던 자는 시종장이었지.
그동안 나와 폐하의 독대를 막았던 것은 시종장이었으니.
그래서 그의 뒤를 캐서 그 배후를 잡아내는 것까진 성공했다고 들었다.”
“…벌써?
그러면 일이 다 정리된 것 아냐?”
텐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황자’라는 지위로 사신단에 참가한 텐.
그 때문에 여태껏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사생아’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는 걸.
“…마법이 풀리지 않은 거구나.”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엔데버는 로한보다 더 마법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엔데버는 황실 마법사도 두지 않고 있는 형국이라…….”
“그래서 로한으로 오겠다고 하신 거군요.
로한은 명목상으로나마 황실 마법사를 두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니까…….”
그러나 여전히 시름에 잠겨있는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황실 마법사를 만나서 이야기가 잘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로한 역시 마법사에 대해서 배척적인 것은 여전하지.
그들은 마법사들이 두각을 나타내길 원하지 않아.
황궁의 마법사들이란, 굳이 따지자면 귀족 자제들을 거두기 위한 제도일 뿐이었으니까.
그들은 마법을 제대로 구사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이들이었어.
그들과 만나서 알 수 있는 거라곤 마법을 풀 방법이 더 요원해졌다는 것뿐이니…….”
“그렇다면 오히려 마탑의 도움을 구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마탑……?”
익숙한 단어에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으나 두 사람은 이야기에 푹 빠져 듣지 못한 듯했다.
“마탑의 마법사들과 어떻게든 접촉해 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정보를 모으는 중이지만 로브 끝자락도 보이질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을 배척하는 중이니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죠.”
“…마탑의 마법사면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한 내 말에 카네르바와 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카네르바의 홉뜬 시선은 다소 부담스러웠으나 한 줄기 희망을 찾아 헤매는 듯 다급한 텐의 시선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알고 있었다면 그가 이리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마탑과 연이 있으신 겁니까?”
“설마 토네이도를 통해서……?”
텐의 중얼거림에 나는 곧바로 긍정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일국의 황자인 텐마저도 접촉하기 쉽지 않은 그들을 일개 영애인 내가 마주칠 일은 더 드물 테니.
수긍한 얼굴이 된 텐과는 달리 카네르바의 표정 위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수십 개는 떠다니는 듯했다.
평소에는 그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늘의 이야기가 그에게 퍽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 앉고 나서 그의 표정 관리가 잘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토네이도는 사실 마나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이에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소수지만, 경은 텐의 최측근이니 믿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런 일이……!”
탄식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텐의 얼굴에 스며들어 있는 노골적인 초조함과 희망이 보였다.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는 그에게 지금의 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감히 예상할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황제는 텐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무리 오랜 기간을 떨어져 지냈다고 하더라도 핏줄이 그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 얼마나 그를 불안하게 할지…….
“토네이도에 마탑주가 직접 찾아온 적이 있어.
아이들의 마나를 따라왔다고…….
그가 아이들을 구해준 내게 고마워하면서 준 반지가 하나 있는데, 내가 원할 때 그를 부를 수 있을 거라고 했어.”
“…마탑주?”
“아니, 마탑의 일반 마법사도 보기 힘든데 마탑주를 만나시다뇨……!
범상치 않으시다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실 줄은…….”
카네르바가 감탄을 거듭하는 사이 나는 칼라일의 목걸이에 걸어둔 반지를 꺼냈다.
여전히 화려하게 생긴 반지를 텐에게 전달하자 카네르바 그레이의 흥미로워하는 목소리 뒤로 낮게 잠겨있는 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위험하진 않으셨어요?
그가 아가씨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별일 없었어.
아까 말한 대로 아이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내게 호의적이었으니까.”
카네르바 그레이가 텐의 안색을 살폈을 정도로 텐의 목소리는 착 깔려있었다.
그의 걱정은 타당해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별일이 없었음을 피력했다.
별거 아닌 일로 텐의 걱정을 사고 싶진 않았다.
그 순간에는 나 역시 겁먹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탑주는 내내 나에게 호의적이었고, 실제로도 별일이 없었으니까.
“마탑주가 직접 이런 반지까지 주신 걸 보면 정말로 아가씨께 호의적인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탑주를 언제든 부를 수 있는 반지라뇨!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 아닙니까.”
“글쎄, 이 제국에서 마탑주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면 말이지.”
그러나 카네르바 그레이의 흥분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텐에게 넘긴 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카네르바가 말했다.
“이미 상당수의 귀족들은 마법이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마법이 존재하는 것보다는 존재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으니 입을 다물고 있는 추세인 거죠.
마나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거리를 다니는 백성들에게 더욱 현실적으로 와 닿을 뿐이고요.”
“로한도 사정은 비슷해요.
황궁에서 마나의 자질이 보이는 아이들을 거두려고 했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니까요.”
“마나를 가진 이들을 받아들이면 자신들의 몫이 적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실제로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는 관심 없고,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짓이죠.”
나는 신경 쓰일 정도로 가라앉아 있는 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반지를 손에 쥔 텐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침내 입을 연 텐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하며 반지를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반지를 보는 카네르바의 시선이 아연했다.
어째서냐고 묻는 나와 카네르바의 시선에 텐은 고뇌 어린 얼굴로 제 의견을 밝혔다.
“그레이 경의 말대로, 이것은 돈을 주고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어요.게다가 아가씨께서 노력해 일군 토네이도의 일로 얻으신 건데 그걸 감히 제가 쓸 순 없어요.”
옆에서 카네르바가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다만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반지를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진심이야?”
“네.”
“…하지만 황자 전하…, 폐하께서는……!”
흔들림 없는 텐의 대답에 카네르바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그러나 텐은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얼굴로 카네르바를 외면했다.
내게 시선을 둔 그의 눈에는 이미 자신의 생각을 쉬이 굽히지 않겠다는 고집이 엿보였다.
“좋아, 마음대로 해.”
내가 긍정하는 듯하자 텐의 표정에는 안심하는 기색이 어렸고 카네르바는 죽상이 되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나는 그걸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도 마음대로 할 테니까.”
“…아가씨.”
텐이 만류하듯 나를 불렀지만 나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마탑주를 필요로 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가 호의로 준 물건이기에 받았을 뿐이지, 이게 정말로 필요한 순간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후의 내게 어떤 일이 생기든 지금의 텐만큼 이걸 필요로 하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 저택에 돌아가서 마탑주를 불러내고 엔데버의 황제 폐하를 치료해 달라고 할 거야.”
“하지만 아가씨, 이건……!”
“텐의 말대로 이건 내가 얻은 내 물건이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써도 상관없는 거잖아?”
카네르바는 나와 텐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내게 응원의 제스처를 보내왔다.
심각한 지금의 상황에 맞지 않게 앙증맞은 움직임에 풋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텐의 진지한 얼굴을 보니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후회는, 너를 돕지 않겠다고 했을 때나 하는 거지.처음부터 내가 너를 돕겠다고 했었잖아……!”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실려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쩌면 죄책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내 아집으로 둘러싸여 그에게 상처를 줬던 일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내고 싶었기 때문에.
이제라도 그를 돕고 싶어서.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두 사람 모두 놀란 눈초리가 되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너무 과했음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여태껏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니 그들이 놀란 게 당연했다.
“…큰소리 내서 미안해.하지만 진심이야.나는 너를 돕고 싶어, 텐.”
어떻게든 진심을 전하고 싶어 호소하자 텐의 굳은 시선이 내게 고정됐다.
카네르바 그레이가 심상찮은 우리의 분위기를 흩트려 놓듯이 끼어들었다.
“자, 곧 황궁이 문을 닫을 시간입니다.
영애, 제가 모셔도 될까요?”
“…경은 여기 남아있어.내가 다녀오지.”
일어서려는 카네르바 그레이를 제지한 텐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도로테아궁을 나서자 퇴근 중이던 몇몇 귀족들이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수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우리는 예상한 것처럼 그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지나쳤다.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자 한참을 침묵하던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적막을 내가 깨트렸다.
이렇게 집에 돌아가더라도 아까 하던 말은 마무리 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텐, 네가 나를 생각해서 그런다는 거 충분히 알아.”
“…….”
“그렇지만 나 역시 그렇다는 걸 충분히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나 역시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말하는 동안 나를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열기가 느껴지는 시선을 오롯이 느끼며 나는 속삭이듯 내뱉었다.
“내가 네게 잘못한 거 알아.
너를 위한단 핑계로 내 멋대로 했던 거, 전부 너에겐 상처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너무 뒤늦게 깨달아 버려서…….”
그럼에도 나는 모든 순간 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고 조심스레 속삭이는 나를 보던 텐이 조용히 읊조렸다.
“아가씨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고는 있었어요.…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겠다 고집부린 것은 저였어요.아가씨께서 달가워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놓을 수가 없어서, 욕심만 부렸어요.”
“…….”
“아가씨를 처음 뵌 그때부터 저는 늘 그런 욕심과 함께였어요.
저를 생각해서 제안해 주신 것을 알면서도 아가씨의 곁에 있고 싶어서, 그래서 엔데버로 가기 싫다고 투정 부렸고, 매번 저를 위해 해주시는 모든 충고를 무시하고 아가씨 곁으로 부득불 기어갔으니까요.”
텐의 담담한 어조 아래 깔린 진득한 자책감에 숨이 막힐 듯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도리어 더 자책하는 그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내 욕심으로 그를 흔들었을 뿐인데, 그것까지도 모두 제 탓이라 하는 그가 안타까워서.
“텐…….”
“아가씨께서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가 단호하게 말할수록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갔다.
어째서 그가 담담하게 굴 때마다 그 이면에 새겨진 그의 상처가 보이는 것만 같은지.
“저는 아가씨가 저를 다시 돌아봐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아가씨께 텐이라고 불리는 순간보다 행복한 순간은 없을 테니까요.”
그 말은 그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할 말이었다.
나에게 ‘텐’이 어떤 존재였는지 너는 알고 있을까.
…내가 네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나의 과거는 오로지 텐과의 기억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없었으니.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지금 당장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그래서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텐.”
“네, 아가씨.”
“나는 너에게 선택지를 주고 싶어.”
의미 모를 말에도 텐은 내 말이라는 이유로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언제나 곧게 시선을 보냈던 그때의 그처럼.
언제나의 텐이었다.
나는 조금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돌아가서 마탑주를 부를 거야, 아까 말했던 대로.
그러면 그때부터는 너에게 달렸어, 텐.”
“…….”
“너는 분명 그 누구보다 빛날 수 있는 사람이야.
내 작은 도움만으로도 너는 금세 날개를 펼치겠지.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해.”
그는 조금 횡설수설 말을 잇는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처럼.
“이번 일이 해결되면 너는 그 누구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어.
누구도 네 흠을 잡지 못할 거고, 넌 누구보다 고귀한 자리에 오를 거야.”
그는 비로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요지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달싹였지만, 내가 좀 더 빨랐다.
“나의 클로버였던 텐도, 네가 원한다면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어.”
“……!”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할게.”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그의 앞에는 여러 개의 선택지가 놓일 것이다.
그는 그 어떤 길을 선택하든 잘 해낼 것이고, 나는 그의 선택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배웅해 줘서 고마워.
이만 가볼게.”
먼저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가 감정이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에스코트하기 위해 닿아있던 손은 어느샌가 떨어진 뒤였다.
나는 괜스레 허전한 손을 꼼지락거렸다.
“…곧 찾아갈게요.”
“…….”
찾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머뭇거리자 그의 손이 바람에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붙잡은 머리카락에 입 맞추는 그의 몸짓이 경건하기만 해서 이곳이 귀족들이 오가는 곳임을 순간적으로 잊고 말았다.
아까에 비해서는 비교적 인적이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가는 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각자의 걸음이 바쁠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다음번엔 청혼서를 가지고 갈 테니, 기다려 주세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집중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겁할 상황이었는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나서는 더 놀라고 말았다.
혹시라도 그 말을 들은 이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봤으나 다행히 말소리까지는 듣지 못한 듯싶었다.
그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이곳을 힐끗거리긴 했으나 생각했던 만큼의 격렬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아가씨는 저에게 선택지를 주겠다고 하셨지만.”
“…….”
“저는 나머지 선택지를 고려해 본 적도 없어요.”
고개를 기울인 텐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저에게 있어서 아가씨는 단 한 번도 선택지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 어떤 인간이 생존 수단을 ‘선택’해서 살아가나요?”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내가 없으면 죽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 말하는 텐의 얼굴에는 일말의 장난기도 없어서 그것이 그의 진심임을 실감하고 말았다.
텐이 내 손을 붙잡아 문지르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아가씨.
언제나 그랬듯이.”
“…나도.”
망설임 끝에 속삭인 말에 텐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놀람이 환희와 기쁨으로 바뀌어 가는 그의 얼굴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지금 키스하면 혼나겠죠?”
“지금은 안 돼.”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래에 이렇게 행복했던 때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를 보내고 싶지 않은 듯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손을 떼어내고 마차에 올라타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텐이 창문 너머에서 물었다.
“제가 갈 때까지 기다려 주실 거죠?”
“…얼른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 대답에 그가 지은 미소는, 절대로 잊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 * *
“오, 반지를 이렇게 금방 쓸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부탁할 일이 있어.
마탑주밖에 못 할 일인 것 같아서.”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는 걸 알아챈 것인지 카리브 역시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런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사소한 일은 아닌가 보네.”
“…사소한 일로 마탑주를 오가게 시킬 순 없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더 궁금한걸.
무슨 일이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지.”
흔쾌히 대답해 주는 그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이어진 인연이었지만, 그라는 존재가 이렇게 든든하게 여겨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엔데버의 지존에게 마법이 걸려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마법이?”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있고 일정한 시간이 되니까 움직인다고 하던데…….
물론 본인 의지는 아닌 것 같고.”
“…흠, 꼭두각시 같은 개념인가.”
짚이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카리브는 곧바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의 표현이 틀린 구석도 없어서 긍정하자 그가 벌떡 일어섰다.
“……?”
“뭔지 알 것 같아.
근데 그게 엔데버의 황제에게 걸려있다고?
지금도?”
“응, 그렇다고 들었어.
2년 전부터 걸려있었다고 하던데.”
“꽤 오래된 마법이란 뜻이네.
그럼 더 쉽지.”
“마법을 해제하는 데 얼마나 걸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리브는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그의 말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적어도 이틀 내로는 끝날 거야.
일이 끝나고 다시 돌아오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사흘이 걸리겠네.”
“…생각보다 빨리 끝나네.”
일이 쉬울 것 같다고 할 때 일주일 정도를 생각했건만, 사흘밖에 안 걸릴 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
나는 조금 아연한 기분과 허무한 기분에 휩싸였다.
“2년간 지속된 마법이면 그 어떤 마법이더라도 틈새가 드러나기 마련이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풀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이때를 틈 타 제 능력을 과시하는 그에게 설핏 미소를 지어 보이니 찻잔을 비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부탁도 받았으니 움직여 볼까.”
“벌써?”
“일국의 황제가 마법으로 정신을 못 차린다는데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됐으니 어서 풀어주러 가야지.
인간 된 도리로.”
그에게 인간의 도리도 지키지 않은 이들이건만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무한한 긍휼함이 놀라울 다름이었다.
저번에 내게 반지를 줬을 때도 그렇고, 생각 외로 다정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보인달까.
“그럼 사흘 뒤에 보자고, 깔끔하게 끝내고 올 테니.”
“…부탁할게.”
그는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빈 찻잔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큰일을 하나 넘긴 듯 공연한 탈력감이 찾아왔다.
나는 지친 듯 몸을 소파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사사건건 나를 건들던 데이지 퀴니도 제 죗값을 치르고 있을 테고, 카리브가 움직여서 황제도 치료를 받게 되면 텐도 마땅히 제자리를 되찾을 것이다.
이제야 모든 일이 정리된 것만 같았다.
내가 바라던 평화에 도달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텐은 뭐 하고 있으려나.”
찾아오겠다던 텐은 아직 연락이 없었다.
청혼서를 들고 오겠다던 그 자신감은 어디 갔는지.
청혼서로 쓸 종이부터 만들러 간 건가.
내가 생각해 놓고도 실없는 생각이었다며 피식 웃어넘기고 말았다.
여유가 찾아오니 별생각을 다 한다 싶었던 것이다.
나는 지친 걸음으로 침실을 향해 걸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머릿속이 깔끔해질 것 같았다.
* * *
“흑, 우리 로즈가…, 우리 로즈가아……!”
“어휴, 그만 울어요.
아직 결혼식은커녕 약혼식도 멀었어요, 여보.”
“귀여운 막내가 우리 중에 제일 먼저 결혼하게 생겼네.”
“음, 갑자기 생각난 건데, 이거 반대하면 어떻게 돼요?
우리 막내 아직 내 옆에 두고 싶은데.”
차례대로 아버지, 어머니, 케드릭과 라미엘이었다.
텐이 가져온 청혼서를 펼쳐본 뒤로는 계속 저 상태였다.
뭐든 좋다는 듯 웃고 있는 텐과 씩씩거리는 내게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당사자 앞에서 반대를 운운하다니!
얄미운 마음에 힘을 실어 라미엘의 발을 밟았건만 개미라도 지나갔냐는 표정이라 더 약 올랐다.
“화내지 마세요, 아가씨.”
미간을 찌푸리고 라미엘을 노려보는 나를 계속 쳐다보던 텐이 손가락을 뻗어 미간을 문질렀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얼굴에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다.
그런 우리 두 사람을 케드릭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음, 마음에 드네.
검만 좀 잡으면 더 괜찮을 것 같고.”
“가르쳐 봤는데 나쁘지 않더구나.”
“오, 그런가요?
그럼 전 찬성.”
허무할 정도로 어이없는 이유였다.
머릿속에 검밖에 없는 거야?
이래서 오라버니들이 여자 친구를 못 사귀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음, 이건 오라버니들이 들었다간 울지도 모르니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